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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비극 앞에서 같이 웃기 / 오영진

최종 수정일: 2021년 4월 22일

1967년 간사이 지방에서 결성된 아티스트 그룹 ‘더 플레이’(The Play)는 강 위에 뗏목으로 만든 집을 짓고 항해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고 한다. 팜플렛에 따르면 그들 퍼포먼스의 특징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시작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유머와 즉흥성이 그들의 무기이다. 오사카 근처의 키주와 요도가와 강을 따라 뗏목 집에서 기거했던 1972년의 퍼포먼스를, 2015년 도지마 강에서 다시 재현했다.

이 재현의 과정에서 나온 다큐와 설치물을 전시회장 안에 전시했다. 2015년 도지마 리버 비엔날레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2011년 3.11 대지진을 의식하며, 강-액체의 이미지를 범람하거나 삼키고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그들의 유머감각은 놀랍다. 그들은 집이 없음에, 사라졌음에 슬퍼하지 않고, 강 위에 집을 짓자고 한다. 우스꽝스럽게 지어진 뗏목 집 안에 가지각색의 아티스트들이 모여 산다. 재난이 집을 삼켜버리면 그 재난 위에 집을 지으면 된다는 논리다.


이 전시가 열렸던 도지마 리버 비엔날레 맞은편에는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이 있었다. 같은 시간, 그곳에서는 『Time of Other』라는 특별전시를 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이 전시를 통해 아시아 전역의 억압받는 자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대개 가난하고 핍박받고, 이름 없는 자들이다.

그 중 한국작가 임민욱은 명동의 카페 ‘마리’의 반(反) 젠트리피케이션 시위현장(2011년의 일)을 찾아 그들의 모습을 담아냈었다. 짧은 다큐필름과 함께 간단한 멜로디 하나가 스피커를 통해 전시회장 안에 울려 퍼진다. 노래의 제목은 ‘국제호출주파수’(International Calling Frequency)이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동요 같은 멜로디를 부를 때는 언제나 친구들이 같이 있는 것처럼 상상하며 부르라고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면에 상호부조의 용기와 동정심이 생길 것이라고 한다. 매뉴얼 중 주의를 끈 14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의 배가 가라앉고 있을 때, 당신과 이웃의 구조를 위해 국경에 상관없이 이 조난신호를 보내라.”


2015년에 이 문구를 본 한국인 어느 누구도 한해 전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으로 이 문구를 읽었지만 한편으론 이 파국 앞의 우리들은 같이 껴안고 노래를 부를 때만이, 구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멜랑콜리는 혼자서 극복하거나 빠져나오기 어렵고, 내면의 불안은 타인을 향한 혐오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술가라면, 인문학자라면 공통의 비극 이후에 어떻게 같이 웃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안산에 위치한 4.16기억전시관에 갔을 때, 한 활동가에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취지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은 적 있다. 장례식 장에서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인 한 어머니가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딸이 남자하고도 사귀어 보지 못하고, 경험도 없이 죽은 것이 한탄스럽다 했다고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어머니가 울면서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 딸은 날라리라서 해 볼 것은 다 해 보았어요” 처음 이 에피소드를 들었을 때, 비극의 크기에 압도되어 나는 전혀 웃지 못했다.

2014년은 가수 신해철이 죽은 해이기도 하다. 당시 어떻게 해야 비극 앞에서 같이 웃을 수 있는 지 질문하고 있던 내게 지인은 최근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신해철의 의료사고가 있던 시기에 자신의 아이를 잃은 한 젊은 부부가 장례식을 치루고 있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조문객들도 별 위로를 할 수 없어 말문이 막혔다. 누군가 적막을 깨고 자연스럽게 신해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요즘은 왜 이리 억울한 죽음이 많은가에 대한 한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조문객 중 한 명이 ‘그대에게’라는 곡을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이에게 노래를 상기 시켜주고자 작은 목소리로 ‘그대에게’의 멜로디를 불러주는데, 아이를 잃은 부모들도 와서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고 말했다. 텅 빈 장례식 장에서 젊은 부부와 조문객들은 어느새 ‘그대에게’를 눈물을 흘리며 신이 나서 합창했다고 한다. 신해철과 아이 모두에게 보내는 송가였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울음의 반대말은 웃음이 아니다. 울음의 반대말은 혼자 울음이고, 웃음의 반대말도 혼자 웃음이다. 본디 울음과 웃음은 주변으로 쉽게 번져나가는 것이 특징인 감정이며, 특별한 이유가 없을 때가 많다. 다른 이가 울면 나도 울린다. 다른 이가 웃으면 나도 웃긴다.

더는 과거의 슬픔에 빠져 있지 말라는 사람도 더러 있다. 애도도 한정된 기간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은 슬픔을 멈추라는 방식의 냉소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같이 웃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길로 가야 한다. 개인적 책임을 물어 처벌하려는 방식은 결과적으로 그 대상자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갈 방법만 열어주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책임을 지는 사람도 그 원인을 특정하지 못한 채 영구히 애도해야 할 사건이 되어가고 있다. 구조적으로 이 참사를 규명하고, 동시에 그 책임을 사회적으로 같이 떠안을 때 우리는 같이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떠안는다는 것은 남탓이 아니라 두렵지만 내탓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마지막 기회가 남았다.


*The Play와 임민욱 작가에 대한 소개와 논평은 필자가 2015년 9월에 쓴 도지마 리버 비엔날레 스케치를 기초로 다시 개고했다. ([문학의 오늘] 16호, 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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