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시아의 비틀즈’를 넘어 ‘21세기의 비틀즈’로 호명되기까지, 방탄소년단(BTS)은 어떻게 하나의 사건이 되었는가? ‘BTS 현상’에 대해 한류와 국위 선양이라는 차원에서 그들이 가지는 산업적 효과의 잠재적 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당장의 일이다. 세계를 향한 한국 아이돌 그룹의 마케팅 전략의 우수성과 유튜브를 비롯한 SNS 마케팅 전략의 성공담을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니다. 그들의 노래와 춤, 그리고 일상의 퍼포먼스들을 펜덤 ‘아미(ARMY)’의 전투적 보호 활동과 연동하여 말할 수도 있겠다.
허나 이것들은 BTS 현상을 다 말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한국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세계적으로 소비되는 방식의 변화라는 중요한 문제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국적, 인종, 지역 등의 차이를 불문하고, 그들의 노래가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유통 ‧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BTS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한국어 가사에 담긴 ‘메시지’의 전달력을 빼놓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랑’의 메시지가 BTS의 전유물일 순 없는데, 이는 메시지가 어떻게 전달되고 향유되는지가 관건임을 암시한다. 이때 대두되는 것이 ‘한국어가 지닌 음성적 자질’이다. 노래든 랩이든 연설이든 인터뷰든, BTS 효과는 한국어의 음성 발화가 지닌 우수성과, 거기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담는 방식의 특수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당연한 말이지만, 음성언어는 그것이 발화되는 장소와 분리될 수 없다. 두 개의 장소, 뉴욕의 ‘UN 본부’와 런던의 ‘웸블리 경기장’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자가 세계 정치와 음악의 중심점이라는 상징성을 띠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이질적인 두 개의 발화, 곧 연설과 노래라는 표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관류하는 기저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가? 리듬이다. RM이 “숨”이라고 칭한 그것은, 그의 발화에서 비트와 선율의 대위로 출현한다. 그의 “숨”은 발화의 정동을 추동하고,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가장 밑바닥의 리듬이라는 말이다.
2.
BTS의 리더인 RM이 ‘Speak Yourself’라는 제목으로 UN 본부에서 연설한 것은 2018년 9월 24일이다. 연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적절했다. 하나는 유니세프의 캠페인 ‘Love Myself’의 대중적 확산이라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앨범 ‘Love Yourself’의 메시지 전달이라는 측면이다. RM의 영어 연설은 발화의 호흡, 강약, 속도 등에서 매우 유연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특정 부분에서의 단절이 반복적으로 들리는데, 그건 어떤 어휘에 실린 강세 때문이다.“So, like this, I, we, all lost our names.”와 “And I’m sure that I and we will keep stumbling and falling like this.”의 “I”와 “we”, 여기에 돌출하는 강세는, 마치 와류(渦流)처럼 흐름을 끊고 어조를 고양시키면서 발화를 지체시킨다.
연설은 ‘Love Yourself’의 실현 방법으로써 “Speak Yourself”를 촉구하면서 끝난다. 강세는 이 부분에서 더욱 증폭되는데, 이는 연설의 요지가 “Speak Yourself”라는 공적 메시지에 맞춰져 있음을 보여준다. “I”와 “we”에 놓인 강세는 이러한 목적에 따라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마치 랩에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강한 비트를 놓듯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강세와 어조가 UN 본부와 같은 장소에서 발화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당시의 청중이 “Speak Yourself”라는 발화의 적절한 수신인, 곧 ‘아미’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그의 발화가 제대로 반향되지 않고 허공에서 흩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역으로, 이는 RM이 공간의 특수성을 아랑곳하지 않고 특정 부분에 비트를 실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I”와 “we”, 그리고 “Speak Yourself”에 실린 강세는 발화의 기저에 흐르던 어떤 감정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순간을 표시한다. 그건 일차적으로 “나의 심장은 9-10살 때쯤 멈췄다.”는 기억 속에 잠복해 있던 감정의 잔여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방아쇠를 당긴 건 또 다른 감정, 곧 청중과의 거리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자각에서 오는 감정의 소요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발화의 ‘스투디움(studium)’은 캠페인의 대중적 확산을 위한 공적 메시지의 전달이겠으나, ‘푼크툼(punctum)’은 발화자의 과거의 기억 또는 공적 공간의 거리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감정’의 떨림이었던 것이다. 정동이 발화를 지배하고, 강세와 호흡에 있어서의 리듬의 변조를 일으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RM이 래퍼이고 작사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그가 래퍼가 된 과정은 초기의 믹스테이프의 랩에 담겨 있는데, 그의 <목소리>들 들어보라. “난 한평생 한이 담긴 한숨 쉬며 살기보다/한을 떼어내고 그냥 숨을 쉬며 사는 길을 택했어/내 꿈은 나의 목소릴 모두에게 주는 것/다시 한 번 나의 목소리에 불륨을 키워”에서 보듯, 그에게 랩은 “한숨”에서 ‘한’을 떼어내서 고유의 “숨”을 만드는 작업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한”을 제거하고 “숨”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그것을 공유하고 공감을 얻으려는 욕망으로 급격히 경사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비약이 있는가? 있다면, 그건 그의 랩의 비트와 동조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가 자신의 목소리에 “불륨”을 키우는 방식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목소리>의 경우, 초반부의 피아노 반주와 동조하던 랩이 점차 빨라지고 강해진다는 점, 이러한 추세가 ‘노래 파트’인 후렴구에 이르러 급격히 하강하면서 원래의 템포와 비트를 회복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랩의 비트와 노래의 선율이 기묘한 대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후렴구의 두 번째 반복에서 점점 강해지는 피아노 소리를 들어보라. <Too much>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곡에서 랩 부분은 지나치게 강하고, 노래 부분(“Too much Too much Too much Too much”)의 선율은 지나치게 유연하다. 전자는 비트의 강약에 의해, 후자는 선율의 길이에 의해 “Too much”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랩 부분의 강한 비트와 노래 부분의 반복적인 선율 사이의 대위법을 예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그러니 마음속 반대편의 양가적 감정을 극복한다고 말할 순 없고 다만 인간은 누구나 필연적인 고독이나 어둠을 갖고 가야 하니 안식처가 필요한 것 같다. 예전에 저는 유일한 게 음악이었고 운 좋게 그걸 선택해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 직업적, 경제적으로 성취했다. 그래서 저는 불안함과 차라리 친구가 될 수 있게 안식처를 여러 개 만들어놨다. (중략) 그럼 불안이 분산된다.(「방탄소년단 "성공 비결은 SNS 아닌 진심+실력“」, 연합뉴스, 2018. 1. 28)
대위법은 그의 곡들이 지닌 양가성, 나아가 ‘예술가’와 ‘아이돌’ 사이의 괴리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가적 감정”을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는 그의 발화가 흥미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건 그가 “양가성”을 수용함으로써 “불안”과 “안식처”라는 두 개의 영토의 거주민이 되었음을 뜻한다. 그는 이중 국적의 소유자다. 여기서 관건은 “음악”이 어느 쪽으로 망명하는가에 있다. ‘불안함의 친구’와 ‘안식처의 목록’으로 추정컨대, “음악”은 전자의 영토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랩의 비트와 노래의 선율 사이의 대위적 반복이 ‘불안의 리듬’의 박동의 결과물임을 암시한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불안해지는 것을 제대로 배운 자는, 유한성의 온갖 불안이 연주를 시작하여 그 제자들이 자신의 정신과 용기를 잃게 할 때에도 춤추듯이 걸어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불안의 춤’에 대한 그의 비유는, 부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불안의 리듬’이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RM의 곡게 나타난 랩의 비트와 노래의 선율 사이의 대위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참조점이 된다. 그리고 실제 우리는 그 춤사위를 두 번째 ‘스투디움’에서 발견할 수 있다.
4.
BTS가 영국 런던의 ‘웸블리 경기장’에서 공연을 한 것은 2019년 6월 1일과 2일이다. 그곳이 팝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말해야 할 것은 ‘불안의 춤’이 어떻게 노래와 랩의 ‘목소리’로 발화되어 자신을 볼륨을 키워가는가에 있다. 이는 앨범 <<MAP OF THE SOUL: PERSONA>>에 표현된 음악의 ‘가면’ 혹은 ‘초상’을 도해하는 일과도 연동된다. 이런 맥락에서 웸블리 공연이 <디오니소스>에서 출발해 다양한 모습의 곡들을 거쳐 <소우주(Mikrokosmos)>로 끝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먼저 살필 것은 <디오니소스>.초반부에 등장하는 RM의 랩이다. “절대 단 한 숨에 나오는/소리 따윈 없다”를 들어보라. 여기서 “한 숨”은 <목소리>의 “한숨”과 연결되는데, 사라진 “한숨”으로서의 “숨”이 “단 한 숨”의 결과물이 아님을, 역으로 그들의 음악이 부단한 “숨”의 결과물임을 암시한다. “우린 두 번 태어나지/쭉 들이켜/창작의 고통/한 입/시대의 호통/쭉 들이켜/나와의 소통”은 이를 보다 명시적으로 나타낸다. “고통”, “호통”, “소통”의 라임(rhyme)은 단조롭기는 하지만, ‘술통’에 빠진다는 말처럼 그들의 노래에는 모든 ‘통’들이 혼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친 예술가”의 새로운 탄생이 이런 저런 ‘통’ 속에서의 뒤섞임 다음에 오는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옹헤야”와 “꽹과리 치며 불러 옹헤야”의 “옹” 역시 그러한 통(甕)과의 음성적 유사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암시하는 바는, 그들의 ‘숨통’을 옥죄고 있었던 것이 하나의 ‘통’ 속에서 뒤섞였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이돌이든 예술가이든/뭐가 중요해 짠해”는,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두 영토인 “아이돌”과 “예술가”에서의 이중 국적을 획득했음을 선포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의 무대는 음악의 숨통을 띄우는 일이 되기도 하는데, 그들의 공연이 ‘마당놀이’의 ‘흥’과 짝패를 이루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들은 이 놀이를 “Stadium Party”라 부른다. 따라서 그들의 ‘마당놀이’가 비록 “미친 예술가”라는 자기규정에 터를 잡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노래와 춤이 펼쳐지는 ‘무대’는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불안의 춤’은 ‘칼군무’보다는 ‘탈춤’의 춤사위에 더 가까운 듯하다.
“Stadium Party”는 <소우주>에서의 또 다른 작은 우주를 만들면서 끝난다. “난 너를 보며 숨을 쉬어”, “우린 그 자체로 빛나/Tonight”이라는 가사에서 보듯, 그들은 ‘아미’를 자신들의 “숨”을 가능케 하는 존재인 “너”로 호명하고 있다. 후렴구 “Na na na na na na”는 “우리”를 구성하는 각각의 ‘나’들을 하나하나 세는 것처럼 들린다. 이는 어둠 속에서 ‘아미’가 들고 있던 ‘아미맘’을 “칠흑 같던 밤들 속” 빛나는 “별”로 승화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웸블리 경기장’에는 있는데 UN 본부에는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국적과 인종과 언어가 하나의 공간 속에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지 않다. 허나 양자는 질적으로 다른 공간이다. 전자가 발화자의 ‘숨’을 막는 하는 공간이라면, 후자는 그의 ‘숨’을 다시 틔우는 공간이다. 후자의 공간에 있을 때 그들은 무대와 객석 사이의 그 어떤 경계와 차이도 다 무화시키는 듯이 보인다.
이쯤에서 <소우주> 이전에 또 다른 ‘공간’이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사실 ‘웸블리’ 공연의 백미는 <소우주> 이전에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건 BTS가 아닌, 아니 그들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그러니까 ‘아미의 합창’에 의해 개방된 어떤 공간이었다. 이벤트는 공연 기획자들에 의해 설계된 것이지만, 관중의 ‘떼창’은 기획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고통”과 “소통”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부른 것은 <<화양연화>>의 에필로그 <Young Forever>의 후렴구다.
Forever we are young/나리는 꽃잎 비 사이로/헤매어 달리네 이 미로/Forever we are young/넘어져 다치고 아파도 /끝없이 달리네 꿈을 향해
다성성(polyphony)이 하나의 목소리에 녹아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적과 민족과 인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지닌 6만 명의 관중이 ‘한국어’로 된 노래를 하나가 되어 부르는 광경은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발화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새로운 공간을 개시한다는 사실, 이것이 ‘웸블리’라는 ‘스투디움’에서 우리를 눈을 찌르는 ‘푼크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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