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와 김기영: 한국 사회의 영상 인류학자들 / 김청강

지하실의 사나이


이미 천만이 넘는 관객이 보았으니 영화의 줄거리는 생략하겠다. 영화 <기생충>의 반전은 부잣집을 점거(?)한 기택 가족이, 빈 집에서 한껏 기분을 내고 있을 때 시작된다. 어둠 속에서 온몸이 비에 젖은, 전(前)가정부 문광이 대문의 벨을 누른다. 문광은 주택의 비밀 지하의 공간으로 기택 가족을 이끈다. 다급하게 카메라가 쫓아간 그 곳에서 관객은 무기력하게 젖병을 들고 누워있는 한 남자를 마주하게 된다.


다른 영화의 한 장면으로 가 보겠다. 중년의 남자가 침대에 아기 옷을 입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 폭력적인 아내의 지배에 식물화 된 남성은 젊은 여성이 건내 준 젖병을 쥔 채로 자신의 몸이 소생하기를 기다린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1985년 작 <육식동물>의 한 장면이다. (<육식동물>은 김기영의 1972년 작 <충녀>의 리메이크작이다.) 폐소 공포증을 유발하는 어둡고 갇힌 공간에서 일어나는 기괴한 상황. 봉준호와 김기영의 영화가 만나는 지점이다.

<기생충>(2019)과 <육식동물>(1985)

봉준호 감독은 여러 지면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 감독으로 김기영을 꼽아왔다. 김기영 영화의 마니아인 봉준호에게 <기생충>의 젖병을 든 남자의 설정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업에 실패하고, 사회에서 격리되어 극단적으로 폐쇄된 공간에서, 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남성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김기영은 젖병을 든 남성을 상상했고, 봉준호는 그 장면을 현대 한국사회로 옮겨왔다. 봉준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남몰래 보신탕을 끓여먹는 공간으로 지하 보일러실을 그려낸 것을 보면, 폐쇄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음험한 일에 대한 무의식은 봉준호 영화의 아주 초기부터 존재했다. 야외로케보다는 지어진 세트 속에서 완벽한 미장센을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했던 김기영 감독과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통한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충녀>를 꼽는다. 그는 김기영 감독이 당대의 한국 사회를 그리는 방식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과연 김기영은 당대 한국사회를 관찰하는 뛰어난 눈을 가졌다. <하녀>는 신문에 실린 하녀와 한 가장의 치정 사건을 읽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고려장>은 텔레비전에 나온 패널들이 현재의 인구증가의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충녀>는 남성성을 잃은 ‘종(種)’의 섭생에 관한 인류학 보고서처럼 시작한다. 봉준호의 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지리멸렬>에서는 남의 우유를 훔쳐 먹거나, 도색잡지를 들춰보거나, 노상 방뇨를 하는 가증스런 엘리트군이 TV패널로 나와 한국 사회를 진단한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부터,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봉준호 감독의 렌즈는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을 떠나지 않았다. “인간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나온다”라고 말한 김기영처럼, 봉준호 또한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가장 위악적인 순간을 포착해내는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변태들(김기영 감독이 스스로를 일컬은 말)”이자, 렌즈를 통해 한국 사회를 세밀히 관찰하는 영상 인류학자이다.


봉준호 감독, 김기영 감독


먹이사슬: <기생충>과 <충녀>


봉준호 영화 중에서 김기영을 가장 의식하고 만든 영화는 단연 <기생충>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김기영 영화의 계단 이미지와 <기생충>의 계단 이미지를 언급하며, 사회적 계층 이동의 수단으로서의 계단과 영화 속 계급 갈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 사회의 수직적 구조를 상징하는 계단, 그리고 그 계단을 오르면서 느끼는 인간의 아슬아슬한 욕망,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는 파격적 엔딩. <기생충>과 <하녀>/<충녀>는 서사구조와 수직적 이미지 배열에서 정확히 일치한다.

<하녀>에서 하녀가 집주인을 유혹하는 장면과 <충녀>의 포스터

그러나 <기생충>과 <하녀>/<충녀>가 그려내는 계층/계급은 ‘지배계급 대 저항계급’과 같은 이분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계층의 상부나 하부 모두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하녀>에서는 아내의 재봉틀 노동과 남편의 강의 활동, <기생충>에서는 실력을 쌓은 전문가의 ‘정상적 노동’을 통해 ‘정상가족’과 계급이 그려진다. 이들의 욕망은 ‘정상적 욕망’이다. 이에 반해 성적 매력 하나로 하루아침에 가정의 안주인이 되고자하고, 위조된 증명서와 거짓말로 가정에 필요한 모든 노동을 독차지하게 된 기택 가정은 ‘반칙적 욕망’을 가졌다. 그러나 사회적 계급이나 윤리, 도덕에 앞서는 이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은 두 계급을 서로 필요하게 하고, 만나게 한다.


이 만남은 야비하고도 파괴적인 욕망을 감추며 암묵적 ‘선(line)’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생충>에서 동익이 운전사 기택이 ‘선’을 넘지 않아서 좋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이 ‘선’을 넘게 되면, 이제 충(蟲)들의 욕망은 -<기생충>과 <충녀>의 충(蟲, 벌레)의 비유처럼- 파괴적으로 변한다. 김기영의 <충녀>의 원형이 되는 <하녀>의 한 장면을 보자. 한 중산층 가정에 새로 식모로 들어온 ‘하녀(그녀에게는 이름이 없다)’가 집주인 동식을 유혹하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하녀의 욕망은 벌레, 혹은 괴물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의자에 옴짝달싹 못하고 앉아 있는 남성에게 다가가며, 하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남성의 얼굴을 덮는다.


마치 괴물이 숙주를 포획하는 것 같이 연출된 이 장면은 <충녀>에서 여성의 신체를 벌레로 이미지화한 것과 통한다. ‘이층집’이라는 수직적 공간과 이 사이를 이어주는 계단, 그리고 이 공간에 환영받지 못하는 침입자로서의 하녀,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삼켜버리게 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이 장면은 서로가 죽기까지 기생할 수밖에 없는 관계의 극단을 그려낸다.


<기생충>에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동익의 집에 과외 선생으로 들어가게 된 기우는 영화의 초반에 자신이 과외 공부를 지도하는 미성년자인 다혜와 키스를 한다. 어떤 감정에이르기도 전에 전개되는 이 비윤리적 장면의 천연덕스러운 연출은 관객을 기겁하게 한다. (실제로 이 장면을 영화관에서 볼 때 관람석에서는 ‘으앗’하는 충격에 가득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들의 과감한 침입의 순간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괴물 같은 욕망이 가시화될 때, 사회 하층부의 인물들은 피해자로, 상층부는 가해자로 보는 도식은 파괴된다. 서로가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에는 필요만 있을 뿐, 가해와 피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영화는 이들의 ‘반칙적 욕망’을 크게 탓하거나 혼내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곳곳의 이런 지점들이 <하녀>나 <기생충>을 빛나게 한다.


기우와 다혜의 키스씬. <기생충>

파국 이후

<기생충>의 전반부에는 이 비윤리적인 기생충 가족이 숙주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들을, 박진감 넘치는 음악으로 채찍질하며 몰아간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가 홍수로 쓸려나가는 순간, 기생조차 불가능한 파국이 발생한다. 장마철에도 보송하고 향기로운 옷을 입을 수 있는 자들과 꿉꿉하고 냄새나는 옷을 입은 사람 사이의 ‘선’이 확연히 그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기택은 “고독한 한 남자와의 동행”을 멈추고 살인 현장에서 도피한 ‘지하실의 사나이’가 된다. <충녀>의 마지막에도, 첩의 딸이었던 침입자 명자는 자신이 다시 첩이 된 현실과,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첩 족속”들의 운명이라는 말을 듣고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긋는다. 쉽게 침투하여 숙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던 현실이, 침투 불가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다.


<기생충>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쓴 편지의 나레이션으로 끝을 맺는다. 편지 속에서 기우는 언젠가 아버지가 지하실로 연결되는 ‘계단’을 밟고 올라올 날을 꿈꾼다. 그러나 그 계단이 다시 이 가족에게 삶을 추동할 의미/상징이 될 수 있을까? 새로운 숙주들과 새로운 기생충은 또 다시 먹이사슬을 이루며 살겠지만, 우리는 같은 욕망 안에도 뿌리내리지 못할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한국 사회를 가장 세밀히 관찰해온 두 감독이 공통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영상 인류학 보고서의 결론이다. 어느 누구의 욕망에도 더 나은 가치는 없다. 그러나 결국 계급 사이의 선이, 욕망의 종류를 가르고, 누군가는 끝없이 ‘반칙의 욕망’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1960년과 2020년의 한국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이런 점이 60년대의 원형적 이야기가 여전히 현대의 천만 관객에게 공감을 얻었던 이유가 아닐까.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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