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우리 공동체는 낙차 큰 감성의 널뛰기를 경험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하늘로 치솟는 즐거움을 만끽했다가, 서슬 푸른 계엄 소식에 공포의 검은 늪으로 추락했다. 얼마 전 조강석 평론가는 한강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개진한 적이 있다. 독립적으로 발표된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세 작품이 묶인 책, 『채식주의자』 초판본에 ‘연작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 것을 두고서, “중요한 것은 3부작이, 많은 헬라 비극이 그러하듯, 질문에 최적화된 형식이라는 사실이다.”(웹진 <한국연구> 한강의 문학을 읽는 세 가지 키워드 / 조강석)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무릎을 쳤고, 대표적인 헬라 비극인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떠올렸다. 아마 시국이 시국인지라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룬 이 연작이 떠올랐을 것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이 고전은 마이클 샌델이 결코 넘볼 수 없는 심오한 정의론을 담고 있다. 이 삼부작은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야기 셋의 간단한 줄거리와 결부된 질문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 왕이 귀향하며 시작된다. 성대한 환영식이 벌어진 다음, 뜻밖에도 그의 아내는 욕조에서 남편을 무참히 살해한다. 10년 전 남편이 딸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작가 아이스퀼로스는 묻는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이 행위는 과연 정당한가? 국가적 대의를 위해서 죄 없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건 올바른 일인가? 두 번째 이야기는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귀향하며 시작된다. 어릴 적에 (왕위 계승권이 있기에) 이웃 나라로 쫓겨난 오레스테스가 청년이 되어 돌아온다.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구박을 받아온 누이 엘렉트라가 부친의 무덤에 제주를 바치고 있을 때, 오레스테스와 극적으로 상봉한다. 두 사람은 공모하여 부친을 죽인 모친에게 복수한다.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를 죽인다. 두 번째 작품에서 작가는 다시 묻는다. 아들이 애비의 원수를 갚는답시고 제 어미를 죽여도 되나? 누군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국가의 수장을 죽였다면, 국가 위기를 초래한 사람을 응징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닌가?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는 오레스테스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시달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번민에 미쳐가던 오레스테스는 이웃 나라 아테네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고발인은 피살된 어미를 대변하는 복수의 여신들이고, 피고인인 오레스테스와 그를 변호하는 아폴론 신이 변론을 맡는다. 아테네 시민 11명이 배심원 역할을 하며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법정을 주관한다. 여기에서 복수의 여신들은 태초의 인간 사회의 주춧돌이었던 혈육에 기초한 정의를 상징하고, 아폴론 신은 혈육을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의 정의를 상징한다. 전자는 되갚음의 복수에 기초한 원초적 정의를 뜻하고, 후자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기 위해 고안된 사법적 정의를 뜻한다. 이 두 정의관의 충돌이 전장(戰場)이 아닌 법정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미 승패는 예견되었다. 오레스테스는 무죄를 선고받는다. 그때 복수의 여신들은 다음과 같이 한탄하며 판결에 불복하려한다.
아아, 젊은 세대의 신들이여,
그대들은 옛 법을 짓밟으며
내 손에서 빼앗아 가는구려.
가련한 나는 모욕당하여 깊은 원한을
품고 여기 이 나라에 독을 아아,
복수의 독을 나의 심장에서 내뱉노라.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8, 184쪽.
이처럼 법원 판결을 수용하지 못하는 복수의 여신들을 아테나는 끈질기게 설득한다. 평온히 지하 은신처에 머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경하기까지 할 거라고 말이다. 결국 복수의 여신들은 아테나에게 설득되어 자비로운 여신들로 변신한다. 3부작의 대미인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저자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복수는 어떻게 자비로 바뀔 수 있나? 이 질문은 (앞선 질문들도 녹록치는 않지만) 가장 답하기 어려운 것이자, 궁극적인 정의의 지향점을 묻는 질문이다.
한반도 남쪽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계엄 포고 이후 평온한 일상이 깨졌다. 불거진 사태가 대통령 탄핵으로 대충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의외로 규모가 큰 탄핵반대 집회가 연일 벌어지고 서부지법 폭동 사건이 일어났다. 폭동이 발생했던 그날, 단순 봉합 처치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누적된 갈등과 모순들이 결코 해결될 수 없겠다고 생각되었다. 친했던 이들끼리 총칼을 겨누는 가장 끔찍한 전쟁, 곧 반인륜적 내전(內戰)마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는 몇몇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대규모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연루된 문제였던 것이다. 산산조각 난 일상의 불편함을 우리는 오랫동안 견뎌내야 할 것 같다. 대략 1400년 전 삼국시대로 퇴행하지 않으려면, 인고의 시간을 버티며 필사적으로 지혜로운 해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80년 전 나라가 두 동강 난 것은 외세의 영향 탓이라고 어느 정도 책임회피를 할 수 있겠으나,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지리멸렬하게 자폭하느냐 자랑스러운 K-공동체를 새롭게 구축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도처에서 증오 가득한 말을 듣는다. 말이 번개라면 행동은 천둥이다. 곧 천둥이 울릴 것이다. 서부지법 사건은 첫 일성일 뿐이다. 뉴스 화면에 포착된 그들의 눈빛에 살기등등한 복수심이 어려 있다. 대통령을 몰락시킨 모든 사람과 단체 및 법에 대한 복수심, 자신을 왕따시키고 궁지로 내몰았던 이 사회에 대한 복수심... 그렇다. 무엇보다 이 복수심이 문제다.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한 사람들을 직업과 연령대 별로 분류하면 이렇다고 한다.
직업: 자영업 19명(28.8%), 회사원 17명(25.8%), 무직 17명(25.8%), 유튜버 3명(4.5%), 학생 1명(1.5%), 기타 9명(13.6%)
연령: 10대 1명(1.5%), 20대 8명(12.1%), 30대 21명(31.8%), 40대 11명(16.7%), 50대 15명(22.8%), 60
대 9명(13.6%), 70대 1명(1.5%)
출처: <시사 IN> 이상원 기자,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940
소위 태극기 부대라 불리는 노년층이 아니라 청․장년층이 주류를 이룬다는 게 가장 눈에 띈다. 그들 각각의 복수심의 원천을 상세하게 알 길은 없다. 다만 복수심이 젊은 층에까지 만연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또한 그들을 바라보는 (나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의 눈에도 복수심은 엄존한다. 저들과 도저히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복수를 어떻게 자비로 돌릴 수 있을까? 난문(難問)이다. 막막하다.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 보자.
현대인들의 상식과는 달리, 복수란 정의의 출발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복수는 원초적 정의다. 기본적으로 정의란 “각자에게 주어져야 할 몫”(장-뤽 낭시,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이영선 옮김, 갈무리, 2012, 79쪽.), 즉 각기 제 몫(moira)을 인정받는 것이자 몫을 침해받는 경우 반드시 되갚아 주는 것이다. 불교식 용어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최초의 법은 이런 정의관에서 나왔다. 그런데 빌린 돈을 정확히 되갚는 것처럼 측정이 용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실 완벽한 되갚음은 실현 불가능하다. 예컨대 자식이 살해당했는데, 살인자나 그의 자식을 죽인다고해서 자기 자식이 되살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복수가 한없이 무자비해지기 쉽다. 게다가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거듭되는 복수의 반복은 공멸만을 낳을 뿐이다. 그래서 공권력을 내장한 사법 체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복수의 등가원리만큼은 사법 시스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의 경중도 측량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되갚는 복수는 문명사회 곳곳에, 심지어 사법 체계 깊은 곳에도 잠복해 있다.
고전 비극 작품에서 아테나는 복수의 여신들을 이렇게 설득한다. ‘공공연히 날뛰지 말고 지하 은신처에서 자중하기만 해라. 그러면 시민들은 자기 집안이 번성한 까닭이 당신들 덕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영역을 관장하는 막강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그 여신들을 칭송할 것이라고 말이다.
여신들의 적의를 겪어보지 않은 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타격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8, 189쪽.
복수의 여신들을 축출하거나 구박하는 대신에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줌으로써, 고전의 저자는 복수를 자비로 변용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복수의 여신을 지하 은신처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복수의 핏빛 냉혹함을 은폐한다는 것, 다시 말해 공개적으로 복수를 자행하는 게 아니라 공적인 사법 질서의 내밀한 등가원리로만 절제해서 등장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복수가 은밀하게(간접적으로) 인간사 전체를 관장한다고 믿기에, 각자가 자신의 과보를 기꺼이 수용하게끔 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복수심을 날것 그대로 폭발시킬 게 아니라 사법 절차에 따라 엄정한 심판을 받게 하고, (이렇듯 사법적 징벌을 통한다 해도) 복수는 반드시 복수를 부른다는 것을 명심함으로써 자비로 개심(改心)하는 것이 좋다는 게 아이스퀼로스의 해법으로 보인다.
큰 덩어리 복수심들 간의 충돌은 내전을 초래한다. 저마다 정의를 명분으로 내걸지만, (과학기술이 발전한 현대의) 전쟁은 공멸일 뿐, 절대로 정의의 수행 방식이 될 수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 피고인과 고발인 모두 복수심을 자비심으로 바꾸려 해야 한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어리석고 고만고만하고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자임을 자각하며, 몇 방울의 연민이라도 쥐어짜내야 한다. 기필코 성숙해야만 한다. ‘어린애의 손에 총을 쥐어 준’ 시대에는 사랑의 성숙이 곧장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복수가 자비로 전환되는 주요 장면들을 열거해보자.
복수의 존재이유를 인정하기, 그럼에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씨앗처럼 감춰져있음을 믿기, 마구 날뛰는 복수심에 절제와 사법의 재갈 물리기. 그 위에서 자타(自他)의 복수심을 이해하고 보듬어주기. 마지막으로 냉혹한 복수가 따뜻한 자비로 탈바꿈하기까지 서로의 존재를 참고 기다리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