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 5월 7일 1770년생인 지휘자 루트비히 베토벤이 생애 마지막으로 지휘대에 섰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극장이었다. 20대 초반부터 시작된 그의 청각장애가 심해질 대로 심해져 그가 마지막으로 지휘대에 선지도 1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왜 다시 지휘대에 선 걸까?
영국의 음악학자 니콜라스 쿡이 쓴 『베토벤 9번 교향곡』에 따르면 실제 지휘는 캐른트너토르극장의 수석지휘자인 미하엘 움라우프가 맡았다. 베토벤은 그 옆을 지키고 서 있다가 의자에 앉아서 악보를 넘기고 박자를 맞추며 자신이 작곡한 초연곡의 연주 상황을 체크했다고 한다. 움라우프는 2년 전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의 드레스 리허설 때 베토벤이 지휘봉을 잡았다가 재앙을 초래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역대 베토벤 작품 중 최대 규모로 편성된 연합 오케스트라 단원과 4명의 성악가, 합창단원들에게 지휘대 위의 베토벤을 철저히 무시할 것을 주문했다.
실제 공연 도중 다양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4악장 중 2악장이 끝날 때 박수갈채가 터지는가 하면 베토벤이 갑자기 일어나서 움라우프 앞에서 미친 듯이 손발을 휘둘렀다. 다행히 연주진은 그 뒤에 있던 움라우프의 지휘를 따랐기에 공연은 차질 없이 끝났다. 그 순간 앨토 파트를 부른 콘트랄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가 지휘대로 올라가 여전히 혼자만의 지휘를 하고 있던 베토벤을 돌려 세웠다. 베토벤은 그제야 관객이 기립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199년 뒤인 2023년 5월 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1970년생인 지휘자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지휘했다. 오미선 김선정 김석철 공병우 4명의 성악가와 90여 명으로 편성된 연합오케스트라(참 페스티벌오케스트라), 4개 합창단(국립합창단, 서울시합창단, 안양시립합찹단, 참콰이어)으로 구성된 250여명의 연합합창단이 참여한 점도 초연 상황과 엇비슷했다.
가장 큰 차이는 4악장의 합창곡이 독일어가 아닌 한국어로 불린 점이었다. 심지어 베토벤이 직접 붙인「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라는 제목을 「자유의 송가(Ode an die Freiheit)」로 바꾸는 ’불경죄‘까지 저질렀다. 알고 보면 불경죄도 못 된다. 냉전시대 자유진영의 기수였던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미 1989년 독일 통일을 축하하는 베를린공연에서 독일어 freude를 freiheit로 바꿔 부른 바가 있었다.
이 교향곡을 지휘하는 것이 필생의 꿈이었다는 지휘자 구자범은 이번 연주를 위해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까지 구성했을 뿐 아니라 직접 4악장의 독일어 가사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또 공연 전 무료로 배포한 팸플릿에 해당 가사의 원형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의 초고에서도 freude가 아닌 freiheit였으나 정치적 이유로 자유를 환희로 바꿨음을 소개하는 장문의 글을 썼다.
그에 따르면 실러보다 열한 살 연하던 베토벤은 젊은 시절부터 이 시에 심취했다. 또 원작 시에 담긴 인류 평등과 자유에 대한 염원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해 심지어 실러의 시를 해체해 오라토리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밑바탕엔 베토벤이 열아홉 때 발생했던 프랑스 혁명정신에 대한 찬미가 깔려있었다. 초연이 이뤄진 빈이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구성된 빈체제의 구심점이라는 점에서 적의 심장부에서 예술적 반기를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교향곡을 신에 대한 찬미와 인류 대화합이란 보수적 메시지로 이해해 왔던 일반 한국인에겐 사뭇 충격적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구자범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던 2000년 KBS 음악프로그램 ‘안디 무지크’에서 베토벤이 4악장의 선율을 다섯 음으로만 구성한 이유를 설파한 바가 있다. ‘(전제정의) 억센 사슬을 끊고 왕과 거지가 형제 되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함이라고.
이를 토대로 실제 공연을 접하니 가슴이 웅장해지다 못해 울컥해졌다. 오페라도 아니고 교향곡 연주를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실제 4악장의 노래가사가 우리말로 울려 퍼진 뒤 객석 여기저기서 눈물 흘리는 관객이 속출했다. “자유, 삶의 참빛이여, 하늘 고운님이여!/ 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 되는 큰 뜻 이뤄지이다!” 250여명의 합창단과 100명 가까운 오케스트라가 하나 돼 온 인류가 (정치적) 억압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은 노래는 그 어떤 ‘운동권 가요’보다도 힘이 셌다.
늘 독일어로만 부르다 우리말로 부르는 게 낯설어서였을까? 솔로 파트에서 박자를 놓치는가 하면 오케스트라도 한 소절을 건너뛰었다가 재연주하기도 했다. 게다가 빈에서 초연 때처럼 악장 중간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지휘대 위에 베토벤이 서 있던 것을 빼곤 유사한 상황이 계속되더니 관객의 과반 이상이 기립박수를 보내며 환호하는 것까지 같았다.
199년 전 귀머거리 신세였던 베토벤이 왜 지휘대에 서기를 고집했는지가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또 웅거의 안내로 객석을 향해 돌아섰을 때 환호하는 관객의 반응 앞에서 베토벤이 느꼈을 ‘환희’가 전율처럼 전해졌다. 환희의 전제조건이 자유임이 여실히 확인됐다. 고전음악의 완성자라고 머리로만 이해했던 베토벤은 프랑스혁명의 대의였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음악으로 완성한 뜨거운 가슴의 작곡가였던 것이다.
베토벤의 이런 진가가 한국에 제대로 상륙하는데 199년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것은 이날 공연 전후 벌어진 사건에서도 확인됐다. 공연장소를 제공한 예술의전당은 공연 직전 공연 제목이 ‘환희의 송가’가 아니라 ‘자유의 송가’라는 것을 뒤늦게 문제 삼아 번역 가사가 포함된 팸플릿 배포를 막았다. 지방의 한 공연장이 특정 종교의 신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금지곡 명단에 올려 빈축을 사더니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기관이 곡 해석에 의문을 제기해 검열 시비를 자초한 것이다.
다행히 팸플릿 배포는 공연이 끝나고 허가됐고, 예술의전당은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팸플릿을 받지 못한 관객이 요청할 경우 우편 배송을 약속했다. 21세기 자유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199년 전 서슬 퍼런 전제정 체제 아래서 이런 곡을 벼려내고 공연하다니. 베토벤에게 왜 악성(樂聖)이란 칭호가 붙는지를 뜨거운 가슴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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