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간은 5월 7일 오후 5시였다. 강릉 송정해변에서 서울 예술의전당까지 3시간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오전 10시 무렵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서울에 간 김에 강북에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본 후 신촌에 들러 지인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공연장으로 갈 계획이었다. 영동고속도로는 그럭저럭 잘 지나왔는데,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차는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했다. 전시회를 먼저 포기했다. 신촌에 갔다가 서초동으로 이동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조문마저 포기했다.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까지 연휴 기간이었던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콘서트홀 주변은 싱그러우면서도 약간 달뜬 분위기였다. 이 묘한 설렘의 정체는 뭘까 잠시 생각했다. 2020년 KBS TV에 출연한 구자범의 말이 떠올랐다.
“저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지휘하고 싶어서 지휘자가 됐어요. 그런데 제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베토벤 교향곡 9번은커녕 베토벤의 모든 곡을 하나도 지휘해본 적이 없어요.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경외심이 크고 그를 너무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젠가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지휘하게 된다면 4악장의 독일어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부르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복귀를 누구보다 바라면서도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그날이 올 줄이야. 나 같은 마음을 가진 관객이 많은 듯했다.
‘우리말로 부르는 최초의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연주회’ 이날 공연에 붙은 수식어였다. 한국인의 베토벤 사랑이야 유별나지만, 매년 세밑이면 빠짐없이 연주되는 이 곡의 연주회에 언론과 관객이 이토록 많은 관심을 보이는 건 특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베토벤이기 때문일까, 우리말로 부르는 첫 번째 연주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구자범이기 때문일까 궁금했다.
합창단의 규모, 오케스트라의 편성, 긴 침묵을 깨고 등장한 지휘자, 무엇보다 우리말로 부르게 될 4악장 연주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나는 여린 첫 음부터 마음을 모았다.
고요 속에 1악장이 시작되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작은 손짓은 호른이다. 귀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은근한 느낌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황홀감과 신비로움이다. 베토벤은 음악을 지구에서 우주로, 지상에서 천상으로 옮겨 놓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악장은 뜨거운 열정과 해학 그리고 감미로운 사랑과 평화가 가득했다. 새처럼 먼지처럼 하늘을 날던 나는 어느 틈엔가 가뿐히 땅으로 내려왔다. 여기까지 즐기는 사이, 4악장이 울려 퍼졌다. 4악장에서는 지구와 우주, 지상과 천상이 하나가 된다. 인생의 고통과 기쁨이 한꺼번에 녹아든다. 첼로에서 바이올린을 거쳐 인간의 음성을 통해 완결되는 멜로디는 반복을 거듭해도 매번 새롭게 들렸다. 그 하모니는 안주하는 하모니가 아니라 끝없이 도전하며 질주하는 하모니다. 교향곡에 기악과 성악이 합쳐져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음악에 마침표가 찍힌 듯하다.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 좀 더 즐겁고 환희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그전까지는 베이스 독창자의 독일어 가사를 들으며 재빨리 스크린에 뜬 이 자막을 읽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인 독창자가 또렷또렷한 우리말로 이렇게 불렀다.
“오 벗이여, 이런 소린 그만! 이제 우리 참 목소리를 내보세. 더 자유롭게!”
게다가 한쪽 귀퉁이가 아닌 정면에 등장한 스크린에서는 상세한 해설까지 곁들여졌다.
〔시인: 베토벤〕 (거짓된 삶에 진저리 치며)
이 대목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가 아니라 베토벤이 쓴 가사로 거짓이 난무하는 삶에 진저리 치는 심정으로 썼다는 설명이다. 참 목소리는 베토벤이 꿈꾸는 자유로운 세상이었다.
“자유, 삶의 참 빛이여! 하늘 고운 님이여! 우리 가슴 불에 취해 그 빛 따르나이다. 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 되는 큰 뜻 이뤄지이다!”
“참된 벗을 맺어낸 자, 이제 여기 서리니, 사랑할 줄 아는 자면, 모두 함께할지라. ‘나의 얼은 내 것이요’ 말할 자는 남으라! 이마저도 못하는 자, 흐느끼며 떠나라!”
“뭇사람들 자유 찾아 장밋빛을 따르나, 무릇 자유 향한 길은 핏빛임을 아노라! 받은 것은 술과 사랑, 죽음 견딜 벗 하나. 헛된 욕망 다 버리고 인간답게 서리라!”
독창, 중창, 합창으로 이 같은 연주가 홀을 가득 채울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셀 수 없이 들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기악과 성악의 아름다운 조화로만 들렸다면 이번에는 구체적인 의미와 가치로 들린 것이다. 단순한 소리의 울림이 아니라 마음에 비수처럼 꽂히는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왔다는 말이다. 충격이었다.
구자범은 베토벤이 4악장 노랫말로 부분 인용한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가 사실은 ‘자유의 송가’라는 전제하에 기존 시를 완전히 다시 번역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785년 이 시가 발표될 때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는 ‘자유(Freiheit)’라는 말을 쓸 수 없어 부득이하게 ‘환희(Freude)’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한 자유는 ‘거지가 왕의 형제가 되는’, 즉 신분과 계급의 차이가 없이 누구나 숨 쉬듯 자유를 누리는 ‘평등과 형제애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혁명정신으로서의 자유’라고 해석했다. 젊은 시절 이 시에 크게 감동한 베토벤은 오랜 세월 가슴에 품어왔던 자신의 구상을 인생 말년에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나폴레옹 실각 후 유럽 사회가 다시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기에 ‘인류 보편 정신으로서의 자유’를 지켜내려는 심정으로 쓴 곡이라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1759년에 태어나 1805년 마흔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뿌리 깊은 전제군주제 아래서 종교의 자유는 물론 문학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격렬한 사회비판과 자유에 대한 동경, 폭정에 대한 분노와 공화주의에 대한 갈망, 계급을 초월한 순애보 등을 자신의 작품 안에 직간접적으로 녹여냈다. 절친이었던 괴테가 여든세 살까지 살면서 기존 질서와 조화를 중시하며 온갖 영화를 누렸던 것과 대조적이다.
연주가 끝났다. 벼락처럼 박수가 쏟아졌다. 나와 아내 그리고 같이 간 서울 사는 동서와 처형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앉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2층과 3층을 올려다보았다. 전부 기립해서 박수하고 있었다. “브라보!”와 “구자범!”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여간해서 기립박수를 잘 보내지 않는 한국 관객들이었기에 매우 이채로운 광경이었다. 악장과 악장 사이에도 박수가 나왔고, 4악장에서는 중간 박수까지 나온 터라 이날 공연은 보통 때와 달랐다. 조용필이나 BTS 콘서트에 온 것 같았다. 급조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여서 몇 가지 실수와 어색함은 있었으나 전체 공연의 감동과 완성도는 놀라웠다.
구자범의 말대로 클래식 음악은 해석이다. 어떤 오케스트라든 똑같이 기계적으로 연주한다면 음원을 들으면 되지 콘서트홀을 찾을 이유가 없다. 원곡대로 연주한다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합창단이 연주하고 카라얀이 지휘한 1968년의 연주보다 더 나은 연주를 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모든 독창자와 합창단이 악보도 없이 노래했다. 그러나 우리말로 연주한다면 한국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그들보다 더 잘 연주할 수 있다. 더 많은 감동을 줄 수 있다. 베토벤도 그걸 원했을 것이다. 구자범은 이를 확신했기에 이 같은 실험을 강행했다. 성악이 들어간 곡의 경우,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해석도 중요하지만, 노랫말에 대한 올바른 번역과 해석은 더욱 중요하다. 이를 잘 알고 있기에 구자범의 번역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했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과 사명감이 돋보이는 이유다.
구자범은 지쳐 보였다. 포디움에서 내려온 그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토한 뒤 쓰러져 이튿날 오후까지 잠을 잤다고 한다. 199년 전 5월 7일 밤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로 초연을 마친 베토벤이 가슴이 벅차 기절해 쓰러진 뒤 이튿날 아침까지 축 늘어져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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