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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라는 누룩 / 김보슬

번역이 잘된 책을 만나고 나면, 모처럼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뜻밖에 환대받은 느낌이다. 성큼성큼 건너뛰며 읽는다 해도, 잘 모르는 전문지식을 다루고 있다 해도, 내용의 진위를 가려내는 일을 차치하고 분명히 그런 느낌을 주는 책들(역서들)이 드물게나마 있다. 문학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번역투’의 문장을 모델로 삼는 작가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래알처럼 까슬까슬하게 의식에 걸리는 번역문과 친해지기란 좀체 쉽지 않다. 성이 마른다. 반면, 별다른 마찰감을 느낄 계제 없이 사뿐히 한 단어에서 다음 단어로 건너가는 번역문은 원작자의 글을 마치 자기의 집처럼 대범하게 열어젖히며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곤 한다.

번역 행위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그것은 사냥개들의 ‘수건돌리기’와 같다 ― 그들이 만일 그런 놀이를 한다면! {누군가(=원작자) 길에 낯선 물체를 떨어뜨린다. 거기에 코를 파묻고 킁킁거리며 냄새 맡는 한 사냥개(=번역자)로부터 게임이 시작된다. 그리고 냄새를 알아맞히고 거기에 스스로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그것을 건네받는 다음 사냥개(=독자)가 다시 킁킁거리게 한다.} 러시아인형 정리처럼 누가 봐도 알 만 것을 정해진 자리에 가져다두는 일과 번역 사이에 유사성이라곤 없는 듯하다. 기계적으로 훑어선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뿐더러 오히려 습격해 올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미지의 대상’ 앞에서 감각을 활짝 열고 그것을 마침내 알아내는 이 일에는 성실한 학생의 태도뿐 아니라 상상력과 창의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근래 신간을 읽었다. 외국어 저서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었다. 그 책이 다루는 분야에 대해 내가 가지는 배경지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이번에 국내에 최초로 번역이 된 이 책은 내게 원서를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담백하게 잘 읽혀서 그랬다. 잘 읽히다보니 용어와 개념을 원작자의 톤(tone)으로도 접해보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이었다. 어떤 것에 흥미를 느끼면 그걸 확장해나가고 싶은 법. 원서는 『Tax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이라는 제목을 가진 사회과학 분야의 서적으로, 역서를 통해 거꾸로 원서가 궁금해진 것이다.

이런 번역은 번역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효과를 드러낸달까. 나는 제2차 창작인 번역이 최초의 창작보다 더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라고 주장해 왔다. 원문이 주어져 있고, 개념과 소재를 발굴하지 않아도 되니까 상대적으로 쉽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남이 한 번 완성한 집을 그만한 완성도에 버금가게 다시 짓는 일이란, 그걸 해체하여 철근과 콘크리트 수준까지 들여다보고 재조립 해야 하기 때문에 괴롭고 피로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 번역문은 하나의 다른 방식으로 ‘암호상태’로 다시 뒷걸음질 칠 뿐이다. 독자로 하여금 문맹이 돼 버린 답답하고 막막한 느낌을 여전히 가지게 하면서…. 원작자의 의도와 의식을 완전히 수용하지 못했거나, 그것을 도착어의 언어적․문화적 특성에 녹여내지 못한 탓이 아닐까. 확실히 번역자의 글쓰기는 글솜씨만 가지고 승부를 내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책이 나에게 인상 깊었던 이유는,

하나, 도착어의 문법적 특성에 맞는 문장 엔지니어링이 탁월하다,

둘, 원서나 유관 자료를 참조하고 싶도록 독자의 관심을 환기한다,

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 두 번째 이유가 더 의미심장한데 단지 품위와 논리를 갖춘 문장력을 넘어, 번역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가 주어지는 장소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유학 시절 만난 은사는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미술가이며 학자였다. 아직은 내가 그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이기 때문에 그 점에 내심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그에게 관심을 갖는 한국의 예술계와 스승 사이에서 내가 교량 역할을 해야 한다고도 느꼈다. 그런데 언젠가 스승의 글을 번역할 마음을 먹었을 때 나를 만류하는 이가 있었다. 원문이 제2외국어라면 모를까, 제1외국어인 영어로 쓰여졌으니 원문인 채 그대로 읽히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었다. 영한번역 수요는 점점 줄어들 텐데, 들이는 공에 비해 효용이 낮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때는 그 의견에 수긍했다. 그런데 최근 훌륭한 영한번역을 접하자마자, 애초에 품었던 번역의 욕망이 더 분명해지고 말았다. 다시 말해, 영어 이해력이 미비한 독자에게 우리말로 내용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번역의 행위로써 내가 누군가의 연구와 작품에 깊은 공감을 보탤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차츰 기우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다른 이의 생각이 아닌 나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간격으로 인해 멀어져가는 목소리에 다시 마이크를 가져다댐으로써, 한국어 독자들을 논의의 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번역이 포기해서는 안 되는 기능이고 잠재력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번역 작업이 비단 언어적 리터러시(literacy) 부재를 해소하는 방편만은 아니다. 생각의 교류, 담론의 확장, 원안에 대한 관심 복원과 같은 ‘효과’를 실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번역은 원문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도리어 발효시켜 입체감과 두께를 이루어낸다. 제1차 창작(원작)과 제2차 창작(번역)이 맺는 길항관계 속에서 원작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의미가 밝혀지며, 거기에서 파생되는 또 따른 논의들은 제3차, 제4차 창작을 향하여 차수를 높여갈 수가 있다.

그리하여 번역은 비단 텍스트만의 문제도 아니다. 창작 보편이 떠안는 문제이다. 한국어를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것도 가능하리라 본다. 그 경우, 번역이라 불리지 않고 해설․해제 따위로 명명되겠지만, 원작의 생명력을 풍성하게 하는 효과의 측면에서는 역시 일종의 번역이다. 그리고 음악도, 미술도 번역의 대상이 될 수 있다.

2017년 2월 21일 자 한겨레신문의 어느 기사 제목은 이러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 “베토벤 의도대로 3대 소나타 번역”> 그리고 오랫동안 런던에서 활동한 조각가 신미경은 비누를 재료로 유명 조형물들을 재현한 <Translation Museum>이라는 전시로 국제적 관심을 모았다. 신미경은 2012년 ‘웹진 아르코’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누 작업은 ‘Translation’이라는 제목과 함께 계속 진행되었는데, 각 문화 간 시대 간의 차이, 간극에서 벌어지는 이해와 몰이해, 전달과 비전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작의 방식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방식과 비교할 수 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해 따라 익히기 과정을 거치게 되고, 그것이 체화되었을 때 나의 언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모국어 같지 않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나의 모작은 그 한계가 만드는 틈을 이야기하고 있다. 완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다르지 못하는 어떤 부분, 그것을 통해서 번역, 전달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을 인정하면서 더 넓은 장을 열고자 하는 것이다.”

(인터뷰 원문: 링크)


[사진 1. 신미경 <트랜스레이션-비너스 프로젝트>, 비누, 156x76x82cm, 2002 제작, 2013 복원]

[사진 2. 신미경 <트랜스레이션 시리즈>, 비누, 가변크기, 2006-2013]

과연, 번역하려는 노력들을 끊임없이 어려움에 빠뜨리는 바로 그 지점들이야말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건너다니는 동안 ‘설명되지 않음’의 수렁에 자주 빠지게 되는 동시에, 오직 거기에서만 도전의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는 흔히 가까운 사람들과도 갈등한다. 그러나 갈등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공통의 언어를 발굴하기 위해 지나야만 하는 통로이다. AI나 인공신경망 기술을 이용한 세련된 기계 번역이 가능해지고 있다. 그리고 첨단 기술로도 채 메워지지 않는 미세한 구멍은 인간의 손길이 개입하여 보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어가 국제적 학술어로 입지를 굳힐 가능성도 기대되는 등 번역의 축복이 아주 가깝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럴수록, 치밀하게 번역된 한 편의 텍스트에 만족하는 대신 그것이 불러오는 교류와 대화 안에서 번역의 번역을 거듭하며, 의미의‘차수’를 높여갈 수 있기를 바란다. 번역의 노력이 좌절되는 지점에서 공통의 언어를 구하는 것은, 한 자당 몇 백원을 매기는 번역소의 일도, 인공신경망의 일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말의 번역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터이다. 말은 어눌하게 행동은 민첩하게 하라는 민행눌언(敏行訥言)의 지혜를 터득한 자만이 풀 수 있는 문제일 듯하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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