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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론: 욕망이라는 괴물 / 오영진

최종 수정일: 2023년 2월 28일


뱀파이어는 피를 빨아먹는 괴물이다. 그것은 상대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피를 공급받는 데 목표가 있다. 피를 공급하는 노예와 뱀파이어 간에는 위계가 있다. 이같이 피를 빠는 자와 빨리는 자의 관계는 지주와 소작농,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설정상 뱀파이어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는 경우, 그것은 원 뱀파이어에 비해 열등하다. 뱀파이어는 귀족적인 자태를 뽐내며, 자신의 수하들을 거느리곤 한다. 이 점에서 뱀파이어는 계급적 불만을 야기하는 괴물인 것 같다. 수업 중 나는 우스갯소리로 뱀파이어는 리더형 괴물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이 리더쉽은 누군가를 착취하는 형태로 완성된 것이다.


사실 뱀파이어가 본래 이런 리더형 괴물은 아니었다. 중세 이전 동유럽에 퍼져 있던 전설들에 의하면 뱀파이어는 늑대인간이나 언데드와 같이 야수형 괴물에 불과했다. 농가에서 가축들이 별일 없이 죽거나 사라질 때, 사람들은 흡혈귀를 그 원인으로 돌리곤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좀도둑에 불과했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귀족적이며, 우아하고, 신비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큰 일조를 한 것이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1897)이다. 브람 스토커는 루마니아 전쟁영웅 '왈라키아 공 블라드 체페슈'의 이미지와 피를 빠는 뱀파이어의 이미지를 결합했다.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보통 뱀파이어와 드라큘라는 습성이 다르므로 다른 괴물로 취급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드라큘라는 뱀파이어가 갖고 있는 부활과 영생의 역능에 신분상의 우아함과 자본가적 속성을 결합한 존재로, 자본주의적 괴물로 진화한 뱀파이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론가 프랑코 모레티는 드라큘라의 탄생엔 뭔가 사회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드라큘라의 이미지는 신흥자본가의 위세등등한 모습에 비할 수 있으며, 당대 인민들이 느꼈던 공포는 이 자본가의 무자비한 착취라는 말이다.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드라큘라가 동유럽 어딘가에서 들어왔다는 설정은 내부적으로 행해야 하는 질문을 외부적인 것으로(외부의 자본가, 이주자) 돌리기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본’ 그 자체를 비판할 수 없으니 외재적인 괴물로 돌려 말하는 것이다. 뱀파이어 영화들을 보면, 차라리 뱀파이어 혈족이 되게끔 해달라고 애원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뱀파이어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는 것이 축복이며, 단지 피를 공급하는 노예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뱀파이어들의 집사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존재다. 그들은 착취당하기 전에 착취를 매개하는 자의 포지션을 얻고자 한다.



피를 빤다는 것은 착취의 은유이기도 하지만 섹스의 은유이기도 하다. 피가 섞인다는 것, 즉 혼혈의 상징적 의미와 목덜미를 물고 빠는 행위의 환유적 의미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뱀파이어는 한편에 섹시함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1970년대 미국의 성해방 운동 이후 뱀파이어는 이러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뱀파이어는 전통적 기독교적인 문화가 허용치 않는 개방적인 성문화의 메신저다. 무자비한 착취자에서 섹시한 착취자로 변모한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의 뱀파이어물에서는 게이나 유색인종처럼 (당시 미국 사회 기준) 혼혈의 두려움이 되는 대상들로 변모하면서, 섹시하지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고귀한 존재로 해석되는 경향도 보인다. 뱀파이어는 남녀 가리지 않고 피를 빤다는 설정상 양성성교가 가능한 자유로운 성생활을 하는 괴물이다. 그 시대가 가장 두려워하지만 매혹되는 것들이 괴물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괴물에 대한 독해가 그 시대에 대한 독해가 되는 이유다.



뱀파이어는 종종 부활하며, 영생을 누린다. 이 점에서 이 괴물은 내면적인 고민을 안고 있다. 과연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인생의 목표 없이 단지 오래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하는 질문들이 뱀파이어를 통해 표출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현대인들의 가장 고질적인 질병, 권태가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아벨 페라라의 영화 『어딕션』(1995)에는 철학도이자 뱀파이어인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녀는 우리 모두가 뱀파이어이며, 죄악에 중독된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저 서로 빨고 빨리며, 죄를 짓는 이 영생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뱀파이어의 우아함은 여기에 없다. 그들은 그저 권태로울 뿐이다. 아니 스스로 권태롭다고 자각하지 못하면서 권태에 빠진 존재들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과 반복되는 뉴스들, 그 와중에 행하는 악행들. 이것이 뱀파이어의 삶인 것이다. 그러니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잃고 구조적 악행에 동참한다는 공포를 준다.

문득 ‘검사라는 직업은 다 뇌물을 받고 하는 직업이다’, ‘아빠는 아는 사람이 많은데, 아는 사람이 많으면 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등의 발언을 했다는 (요즘 회자되는) 어떤 인물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이 사람의 정신이 특별히 병든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서로 피 빨아 먹는 구조를 우리 모두가 욕망하면서 용인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래도 영화에서는 뱀파이어 철학도가 부조리를 스스로 깨닫는 데 성공한다. 현실의 뱀파이어 철학도도 그럴 수 있을까? 하긴 남 일이 아니다. 뱀파이어처럼 누군가를 피 빨아 먹는 존재가 되길 욕망하지만 그러한 역능에는 도달하지 못하니 중간 포식자라도 되길 애원하고, 급기야 악행의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린 존재가 우리들이다.



삐딱하게 보기


한스 홀바인의 유명한 그림 ‘대사들’(1533)은 매우 기괴한 그림이다. 언뜻 보기에는 ‘장 드 당트빌’과 ‘라보르’ 각기 영국과 프랑스의 대사였던 두 인물의 평범한 초상화이지만 화폭의 아래 가운데에 이상한 얼룩 같은 것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얼룩은 다른 시점에서 그려진 것으로 해골로 보인다. 하나의 그림 속에 두 개의 시각이 공존한다는 것. 하나의 관점에서는 얼룩이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해골로 인식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기본적으로 우리의 삶이 사실은 인식 불가능한 무의식과 함께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해골처럼 마주하기 싫은 또 다른 현실이 우리의 현실 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우리 삶 속의 얼룩들을 독해할 필요가 있다.

공포와 마주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일상은 진짜 공포를 뒤로 숨기고 가짜 공포를 내세운다. 뱀파이어, 괴물, 좀비, 초자연적 힘에 대해 분석하는 일은 단지 친숙한 괴물들을 해석의 자유를 통해 놀이화하는 일이 아니다. “뱀파이어물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군요. 재밌네요”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뱀파이어를 비롯한 모든 괴물들이 실은 우리 시대와 유관한 무의식적인 차원의 공포를 내포하는 대상들임을 깨닫는 일이 되어야 한다.


공포는 소위 정상사회의 짝패다. 이 말은 공포를 인식하는 일은 사회를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스 홀바인의 그림을 해골의 입장에서 다시 그린 두 번째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해골의 끔찍함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알 수 있다. 공포는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앎에 이르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프랑코 모레티가 말했던 "공포의 변증법"이다.


오영진(AI공포라디오 2022 연출자,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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