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란 자기네들 말이 절대 진리라고 한다. 나는 그들의 말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호밀밭의 파수꾼』(J D 샐린저, 1951)의 주인공 홀든은 근엄한 펜시고등학교로부터 쫓겨나면서 학교에 대해 이런 저런 증오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에게 세상은 불만투성이며, 조롱의 대상이다.
홀든은 졸업생 오센버거의 장황한 연설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는 그저 시체를 팔아먹는 사람(장의사)이었지만 단지 돈을 많이 기부했다는 이유로 전교생에게 너절한 농담을 던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홀든이 그의 연설에서 마음에 든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에드거 마살라라는 녀석의 방귀소리였다. 예배설교 도중에 울려퍼지는 방귀소리는 불경하다. 교장선생은 그 방귀 소리를 애써 듣지 않은 척 노력하지만 불쾌함을 감출 수 없다. 반대로 홀든에게 이보다 경쾌한 소리는 없다.
방귀란 불현듯 이루어지는 배설행위이다.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는, 이 엉덩이의 하품은 진지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고의적으로 흠집낸다. 잘 정돈된 오케스트라의 연주 속에 빗나간 연주가 끼어든다. 단지 어떤 흐름을 중단시키거나 방해한 것이 아니다. 방귀의 타이밍이 적절할 때, 우리는 웃기도 한다. 바로 그 때 방귀를 조롱하는 게 아니라 방귀가 조롱하는 대상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이러한 방귀의 유쾌함과 짝패를 이루는 것은 역겨움이다. 이 주제를 파고든 작가는 사르트르다. 『구토』의 주인공 로깡댕은 술집의 맥주병을 보고 갑작스레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가 느낌은 자명한 삶 속에 침입하여 모든 친숙한 사물들을 낯설고 역겹게 만들어버리는 어떤 사건의 결과다. 이를 방귀로 바꿔보자. 메스껍고 더러운 것은 방귀가 아니라 방귀로 인해 자각한 어떤 상황인 셈이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들이 방귀로 인해서 진지함이 얼마나 유치했던 가를 알게 되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은 계속해서 방귀를 뀌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홀든이 퇴학을 명령받고 학교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하는 다음의 장면.
“나는 계단 쪽으로 가면서 양가죽을 댄 슬리퍼로 그 빈 케이스를 걷어찼다. 나는 아래로 내려가서 맬 브로서드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 갑자기 무엇인가를 결심한 것이다. 바로 그 날 밤 안으로 펜시에서 도망치자는 것이었다.”(p. 81.)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이덕형 역,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1998.
이후에도 홀든이 겪는 이야기는 우발성으로 가득하다. 대개의 결정은 갑작스레 이루어지며, 스스로 결심이라고는 표현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홀든이 “갑자기 무엇인가를 결심”했다고 말하는 것은 독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신도 결코 그 “무엇인가”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되려 그가 겨냥하는 것은 독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가 실제로 도망치는 것은 이야기 속의 펜시고등학교가 아니라 독자가 예상하고 있는 내러티브이다. 물론 그 내러티브는 플롯 상의 진부함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진부함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들로부터 탈출함으로써 홀든은 세상을 거짓말로 바꿔버린다. 홀든은 늦은 밤 기숙사를 떠나 야간열차를 타게 되는데, 그는 우연히 만난 중년의 여인에게 마치 준비된 것처럼 거짓말을 해댄다. 그는 가상의 인물 루돌프가 되어 펜시고등학교의 번드르한 풍경들과 따스한 교우관계를 날조한다. 여인은 홀든 아니 루돌프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다. 초점은 홀든의 거짓말이 아니라 여인의 거짓 믿음으로 이동한다. 홀든은 단지 거짓말하고 있지만 여인은 거짓을 행하고 있다. 여인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속을 것이며, 결코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크고 더럽고 메스꺼운 방귀소리가 없는 한.
영어권에서 방귀와 관련된 말장난 중에 이런 것이 있다. “Art is Fart”. 예술은 방귀란 말이다. 나는 이 말을 한대수의 자전 에세이집(2003)에서 처음 보았다. 예술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뮤즈의 목소리가 아니라 무례하게 ‘뿡’ 내뿜는 방귀소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오직 예술에서만이 추함의 아름다움이 성립한다는 것이 이 말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Fart is Art". 방귀는 예술이다도 성립하는 것일까? 모든 무례한 행위가 예술일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방귀가 예술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예술이 방귀인 것은 아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에 대해 고민하다보니, 나의 오래된 친구 TK가 생각난다. 실은 나보다 한 살 위인 형이지만 나는 그를 친구라 부른다. 밤새 눈이 가득 내린 어느 아침이었다. TK는 하얗게 변한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며 아무도 상처내지 않은 순수함에 이상한 반감이 들었다. 그는 운동화를 신은 발을 지질 끌어 운동장에 거대한 남성의 성기를 그렸다. 곧 등교할 학생들과 학생주임, 교장 등에 전하는 메시지였다.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는 것, 동시에 내 좆을 찾겠다는 것. 이후 TK의 모험은 눈 위 그린 이 그림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모습을 지켜본 체육교사에게 붙들려 호되게 얻어맞았다. 그리고 이 학교를 떠나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K는 학교탈출에는 실패했다. 대신 지금은 파일럿이 되어 하늘을 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버지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집을 뛰쳐나가 야간에 택시를 탄 TK는 내일이면 곧 해외파병을 나가는 젊은이 행세를 하며 그 짧은 탑승시간 동안 택시기사를 감동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K는 가정탈출에는 실패했다. 대신 애가 둘이다.)

무례함과 거짓말로 어린 시절을 가득채운 TK는 궤도를 이탈하고 언제나 궤도로 돌아온 듯 보인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것은 그가 돌아온 궤도는 미묘하게 변경된 선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자신의 삶을 바꿔냈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도 결국 가정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흔해빠진 홈 스위트홈의 서사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해보고 돌아온 것이다. 무엇을?
“많은 사람들, 특히 이곳 병원에 있는 정신분석 전문의가 그러는데, 이번 9월부터 학교에 돌아가면 열심히 공부하겠느냐고 자꾸만 묻는다. 내 생각에 그건 어리석은 질문이다.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p. 312)
‘무엇’을 한다가 아니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하려하면 언제나 계산이 따르기 때문이다. 반면 그저 ‘한다’는 것은 낯설고 불균질한 생의 생생함 속으로 나를 던진다는 것이다. 홀든은 인생이 ‘무엇’=>‘한다’가 아니라 ‘한다’=>‘무엇’임을 깨닫고 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도피의 피안을 꿈꾸기가 아니라 방귀뀌기이다. 그것은 무례하고 메스껍고 역겨워 보이지만 되려 진짜 무례하고 메스껍고 역겨운 것으로부터 빗겨나가는 삶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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