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의 전망으로서의 “진리의 패권”
박동환의 『진리의 패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사월의 책, 2019. 이하 『진리의 패권』)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개인적인 감상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한국인들과 어울려 한국어로 공부하다가 장년의 나이에 타국에 나아가 철학적 방랑자로서의 십여 년을 보낸 후 고민과 분투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흔치 않은 경험을 막 통과하였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종종 느낀 적이 있었지만 영어권과 중화권의 직업철학자들이 동시에 활동하며 교차하는 타국에서 점점 커져만 갔던 의문은 ‘왜 한국에서 철학하는 이들은 한창 무르익을 만한 나이에 철학하기를 그만두는 것일까’라는 것이었다. 박사논문을 쓰고 나서 지쳐 나가떨어지는 이들이야 하는 수 없다고 치더라도 후속세대를 키워내는 위치에 오른 분들조차도 새로운 주제나 발전적인 질문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기존의 사고틀에 갇혀 권위적인 담론을 되풀이하는 경우를 꽤나 보아왔던 나로서는, 나이 많은 선생들이 젊은 학자들의 발표를 들으며 호기심에 넘치는 얼굴로 질문한다던지 자신이 오랫동안 침잠해온 주제를 현대의 첨예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으로 엮어낸다든지, 철학하기를 멈추지 않는 외국 학자들의 모습들을 목격하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국제학회에서 한국에서 참가하신 선생님 한 분을 우연히 만나 이러한 속내를 털어놓았을 때 이 분은 단박에 스스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한국에서 철학하는 이들의 조로(早老) 현상은 자기 철학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리셨고 나는 해묵은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비로소 찾은 느낌이었다.
『진리의 패권』은 일생토록 자기 철학을 추구해온 한국의 철학자가 과연 철학하기를 싱싱하게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이다. 이 글에서 나는 잠정적으로 이 책의 저자를“박동환”이라는 통용되는 이름 대신, “x”라는 궁극적이지만 무차별적인 이름 대신, 그가 세상 사람들에 의한 규정에 저항하는 행위로서 택한 이름인 “ㅂㄷ”(15쪽 참조)라고 부르고자 한다. 젊은 날 “오직 사색의 힘으로써만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포부”(63쪽)를 가졌던 청년 ㅂㄷ는 자신이 맞닥뜨렸던 현실에서 돋아난 최초의 문제의식을 포기하지 않고 굴절과 변용을 거듭해온 끝에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까치, 1987),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고려원, 1993), 『안티호모에렉투스』(길, 2001)를 거쳐 여든이 넘은 나이에 내놓은 『x의 존재론』(사월의책, 2017)조차 건너서 최근의 『진리의 패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사월의책, 2019)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철학을 보여준다.
ㅂㄷ의 초기철학에서 최근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문제는 “(철학적) 패권 국가들의 사상 전통에 다만 편승해서 기생하는 주변국의 철학자”(24쪽)로서의 자기 인식이다. ㅂㄷ는 한국철학의 과거와 현재가 “(자신들이) 겪은 역사와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외래의 철학”을 가지거나 “그런 것들을 학습해서 공상에 사로잡힌 전통” (24쪽)일 뿐이라고 갈파한다. 하지만 ㅂㄷ는 철학사를 가지지 못한 주변인으로서의 헐벗은 자의식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데에서 성큼 나아가 이제 서구와 중국 철학자들이 “추구했으나 미달했던 ‘자아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완성하려고”(25쪽) 한다. “과거의 철학자들이 남긴 철학서를 읽지 않고 하겠다고 생각했던 철학”(63쪽)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ㅂㄷ는 서양철학사를 관통하는 개념 분석론 뿐 아니라 중국철학사를 관통하는 상반상성의 관계론조차도 인간 중심의 주관적 인식을 통해 세계를 포섭하는 완전한 정합적 체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폐쇄적 체계라고 본다.(66-70쪽 참조) 과거에 진리의 패권을 휘둘러왔던 이러한 체계들은 주관의 편향성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허구의 보편성이며 (169쪽) 언제나 미지의 영역에서 도사리고 있다가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인 의외의 사태에 대해서 심히 취약하다. 그리하여 ㅂㄷ는 철학사를 가지지 않은 이들에게도 허락된, 혹은 철학사를 가지지 않은 주변인이었기 때문에 간직할 수 있었던, 인간의 경계 너머 미지의 X에 열려 있는 x의 존재론을 구상하며, 진리의 패권은 더 이상 인간중심주의적인 기존의 철학 체계에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서양과 동양 철학의 패권을 넘어서
오늘날 반성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철학자라면 혹시 서구철학 혹은 동양철학이라고 싸잡아서 일컫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경험한 지식인 가운데에는 동서 철학을 상대화하면서도 이를 넘어선 보편적 논리를 추구하는 ㅂㄷ의 시도를 대서사라고 비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한 연역적 논리를 서양철학으로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대대적 관계론을 동양철학으로 일컫는 ㅂㄷ의 일반화는 사실상 “새로운 철학의 초석을 마련”(65쪽)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으로서, 과거의 모든 철학자들의 저서들을 모조리 섭렵한 후라야 자기 철학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세계 인식의 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하면서 모험”(56쪽)을 감행하려는 이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양철학을 공부해도 게임의 룰을 익혀서 플레이를 하듯 재미있을 뿐 내가 혹은 우리가 정말로 그러한 틀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느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우리 사유 깊숙이 침투해 있는 개념들의 원천을 제공한 중국철학을 공부하면서 체험적 앎에 깊이 경도되었으나 여전히 후련하게 해소되지 않는 미심쩍은 간격을 느끼곤 했던 나로서는 제3의 길을 제시하는 ㅂㄷ의 철학이 한줄기 빛과도 같은 길잡이가 되었었다. 더구나 내가 철학을 전공으로 택했던 시대에는 서양철학에 사로잡혀 “한국어로는 철학을 할 수가 없다”고 공공연하게 단언하는 전업철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는가 하면, 중국철학에서 제기된 개념들을 상세하게 토론한 한문 자료를 읽고 이해하는 것 자체가 곧 한국철학이라고 보는 시각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으니 말이다.
한국에서 한국인이 수행한 지적 탐구라 하더라도 만일 동서의 지배적 사상을 보편이라고 당연시하는 경우라면 이러한 사유 전통을 곧장 한국철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한국철학이 되기 위한 조건은 “한국에 고유한 역사적 체험을 보편적 논리로 승화”(23쪽, 김상환『근대적 세계관의 형성』2018: 210쪽에서 재인용)시킨 경우에 한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논리...』와 『동양의 논리...』를 통해 철학의 종주권을 주장하는 서구철학을 상대화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동양철학이라고 불리는 사상 체계를 집요하게 분석하여 동양에 서구와 비견할 만한 논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마저도 상대화함으로써 제3의 철학을 탐색할 수 있는 창조적 여백을 만들어낸 ㅂㄷ의 철학적 여정은 한국철학이라는 사유의 모험을 감행하려는 이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진리의 패권은 어디에도 없다: x의 존재론 뒤집어 읽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x의 존재론이 주변자로서의 한국인들이 “겪은 역사와 현실에 근거”(24쪽)한 철학인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동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재3의 영역을 요구하는 데 따른 논리적 귀결로서 추상적으로만 확보되는 환원주의라는 생각이 든다. ㅂㄷ에 의하면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은“인간의 경계 안에 갇힌 제2의 환원주의자”(164쪽)일 뿐이며 이들이 고안해낸 환원주의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 불시에 들이닥치는 불멸의 절대자인 미지의 변수 X에 의해 격파된다.
“주관성이 발휘하는 제2의 환원주의는 결국에 경계 너머로부터 불어오는 격파의 바람 곧 제1의 환원주의자 X에 의해 폐기되고 끝내 망각될 것이다”(137쪽)
X는 “경계 너머에서 진리의 패권을 행사하는 마지막 결정권자”(225쪽)라고 묘사되지만, 그렇다고 진리의 패권이 X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X는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특정한 모습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진리의 패권이 귀속되거나 환원시킬 만한 자리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사를 가진 자들이건 그렇지 않은 자들이건 저마다 가지는 “고유한 개체성”(24쪽)을 의미하는 미지의 변수 x의 경우에는 어떨까? “현상계에 몸을 드러낸 한 개체 존재”(195쪽)인 x는 X에 맞닿아 있다는 의미에서 “영원의 기억에 궁극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개체성”(18쪽) 혹은 “영원의 한 조각 기억체계”(56쪽)라고 불리는데, 즉 “임시의 체계”(116쪽)이지만 죽음으로써 영원한 삶의 사이클을 이룬다(100쪽)는 점에서 “불멸의 존재”(95쪽)이기도 하다.
X와 x의 관계는 규정될 수 없는 궁극과 온갖 개체성의 관계라는 점에서 노자가 말하는 도와 만물의 관계를 연상시키지만, ㅂㄷ는 장자와 같이 온갖 개체의 경험 및 활동과 그로부터 얻어진 자각과 숙련을 긍정하는 길로 들어서는 대신,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지렛대로 삼아(65쪽) 구체적 혹은 개체적 경험을 탈각하고 미지의 추상에 도달하려는 것(x를 떠나 X로)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그의 몸을 드러낸 한 개체 실존”(53쪽)은 “각기 다른 개체성을 지니고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인”(59쪽)이라고는 하지만 그 현실이란 결국“어떤 특정의 문화와 언어체계에도 매이지 않은 ‘영원에 소속하는 개체 분신’으로서”(55쪽)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특정의 문화와 언어체계는 미지의 X가 일방적으로 아로새긴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를 거쳐 어떤 모양으로 끝날지 정해진 바 없는 한 일생을”(52쪽) 대표하는 미지의 변수 x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라, 오랜 좌절과 격파의 기억을 간직한 자각적인 개체들의 활동과 창조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문화와 언어체계는 결코 고정불변한 형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생명들의 투쟁과 되먹임의 궤적으로서 형성되며 또 변형되어 나간다. 그러므로 “인간 중심의 도전 아니면 착각을 점검하며 절제하는”(23쪽) 역할을 자임하는 x의 존재론은 기지(known)가 미지(unknown)를 압도하는 허구적 보편을 강화하는 쪽으로 비대해진 특정 문화와 언어체계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반성할 수 있지만, 반드시 “어떤 특정의 문화와 일상 언어에도 매이지 않은 제1언어”(53-54쪽)임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역대의 철학자들이 그가 탐구하는 궁극의 진리를 이해 전달하려고 할 때 사용해온 매체인 언어에 대한 반성이며 대안의 모색”(52쪽)이라고 볼 수 있는 x의 존재론은 인도유럽어와 고대 한어의 어법에 기초하여 성립된 기왕의 진리 패권주의를 경계하되, 철학사를 아직 가지지 않은 이들의 어법에 대해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령 한국어의 어법이 어떤 구체적인 양상을 띠고 전개되는지 그리고 진리의 패권을 쥐어 본 적이 없는 또 다른 이들이 의지하는 어법에는 무엇이 잠재되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일은 어쩌면 그동안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던 철학의 패권주의를 격파하여 어디에도 진리의 패권이 머무는 일이 없도록 판도를 재편하는 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ㅂㄷ의 철학이 동서의 지배적 사유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을 특정 문화와 언어에서 벗어난 “제1의 환원주의자 X”에서 찾는 것은 어쩌면 주변자로서의 새로운 철학이 또 다른 보편을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ㅂㄷ 자신은“현실의 각기 다른 분야에서 투쟁에 가까운 삶을 사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26쪽)라고 믿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종종 “인간 그 밖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계철학사에 대한 원경(遠境)이 그려졌다면 이제 더 구체적인 현실로 내려올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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