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상태 / 김보슬

[바닥상태 l 비대면 퍼포먼스]

이 작업은 “비대면”과 “접지”를 골자로 한다. 얼굴을 지우고 장소에 머무른다. 코로나 팬데믹의 비대면·비접촉 사태를 맞닥뜨리면서 ‘비대면 퍼포먼스’라 명명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의 관계망을 포함한 기존의 대면적·관계적인 존재 상태로부터 멀리 가기를 시도한다. 무면목(無面目) 상태로 되돌아가 어떤 곳에 머무름으로써.

얼굴을 지우는 방식은 장소마다 다양하다. 서울생각마루에서는 붕대로 머리를 감았다. “뚝섬자벌레”라고도 불리는 이 장소의 특성과 코로나 휴관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부동의 상태에 있지만 그 안에서 탈바꿈해 가고 있는 번데기를, 일종의 ‘바닥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나는 비대면과 접지 수행을 매개로 어떤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태에 관심이 있고, 그 수행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상태가 펼쳐지는 ‘장소가 되어줌’을 “퍼포먼스”로 간주했다. 따라서 이 작업은 무언가 보여주거나 내용을 전달하지 않으며, 단지 퍼포머와 기록자들이 감지하는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목구비 감각이 안으로 여며진 상태에서 무엇이 행해지는지, 무엇으로 존재하게 되는지. 그리고 무엇인가 지워진 얼굴 앞에서 묵연히 있음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음미, 그것.

(기록 제공_현지예)

[사진 1.]

지예: 2016년이었을걸. 박근혜 퇴진 시위랑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세간을 온통 떠들썩하게 하던 때였으니까. 온라인으로만 알고 지냈던 너와의 첫 만남도 미루어지던 중이었고. 그때도 나는 행동력이 부족한 사람이었거든. 그런데 형준이 알지? 형준이가 이런 나를! 나를 예술인 시위에 끌어들인 거야. 처음엔 ‘내가? 어떻게?’ 하는 의구심뿐이었어.

[사진 2. Denise Dalzell, <Protest>, 2017, 출처: www.absolutearts.com]

사건에 대한 애석함을 느끼면서도 특정한 개인(들)을 비난할 자신이 없었어. 광화문 앞을 블랙텐트, 1인 시위가 점령했는데 시위나 구호 따위하고는 한참 거리가 먼 내가 거기서 무얼 할 수 있었겠어? 유일하게 해 보고 싶었던 일은 눕는 것, 단지 가만히 누워보는 것이었지. 그래서 이순신 동상 앞 즈음 길바닥에 등을 찰싹 붙였는데, 예상치 못했던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어. 우선 눈이 부셔서 허공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살며시 눈꺼풀을 열자 당연하게도 먼지가 잔뜩 나뒹굴지 뭐야. 엄청난 무리의 발걸음들과 이따금 담배꽁초 따위가 시야를 메우고, 귓가에는 바람 소리, 낙엽 굴러가는 소리, 간혹 아이들 목소리…. 평소 내 키높이에서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낮은 곳에서 귀로 감각하게 되었지.

[영상 1. 행인들의 발걸음]

이윽고 마음이 편안하고 환해지는 거 아니겠어? 웃음이 났어. 내가 뭔가를 타도하자고 외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시위를 너무 무겁게만 여겼었던 것인가 싶었지.

그때부터 바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 같아.

그 뒤로는 유심히 발밑을 내려다보곤 했지. 사회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낮은 것들이 거주하는 곳이더군. 기본적으로 버려진 것들. 또한 가끔은 더러운 것들, 똥이나 토사물처럼. 그런데 아이를 낳고서야 알게 되었어. 갓 태어난 것들도 거기서부터 올라온다는 것을. 돋아나는 싹이나 고물고물 기어다니는 어린 생명들을 봐. 죽음에 처해 있는 것들뿐 아니라, 새 생명이 함께 머무는 곳이야. 바닥에 대한 이런 나름의 관심과 사유를 예술작업으로 풀어낼 기회를 찾다가, 2020년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 안에서 시도하게 되었어.

[사진 3. 지예의 노트_작품의 제목 가운데에 알파벳 소문자 엘(l)로 칸막이를 세운 조형원리를 설명하던 중]

나: ‘바닥으로 떨어지다’ ‘바닥을 치다’ ‘바닥을 드러내다’ ‘~이 바닥나다’ ‘바닥을 긁다’ ‘이 바닥(분야)에서’ 등 각양각색의 바닥을 떠올려 보았어. 각각의 상태가 의미심장한데, 올해는 유도를 배우는 동안 낙법을 통해 극단적인 ‘falling’을 경험했지. 난 그때마다 지예의 바닥 작업을 기억해 내곤 했어. 그런데 어느 날 인터넷에 지예가 올린 작업 사진을 보았는데, 종이봉투나 붕대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야. 스스로 그것을 비대면 퍼포먼스로 부르더군. 바닥됨의 사안으로부터 비대면의 사안으로 점프한 계기가 뭐야? 그 둘이 어떻게 연결되는 거지?

지예: 바닥을 주제로 퍼포머와 감상자가 대면할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파견시설로 지정된 서울생각마루가 코로나 때문에 휴관 중이기도 했고, 퍼포먼스 제안이 처음엔 반려되었어. 바라봄 없는 것이 공연일 수 있을까? 지켜봄 없는 공연을 공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근원적인 물음에 부딪혀야 했어. 그렇게 한 차례 좌초를 겪으면서 관심의 반경이 자연히 비대면으로 확대됐어. 바닥에 놓인 것들의 외면 당하는 신세, 그리고 감염병 예방을 위한 비대면 생활 수칙 사이에 연관성이 있더군. 바닥은 밀쳐낸 것들이 돌아가 안기는 품이 되지. 추하고 더러운 것, 죄와 죽음, 멀리에 두면서 대면하고 싶지 않은 것들―지위든 사물이든 피하고 싶기만 하면 바닥에 내려놓는 습관에 나는 삐딱한 입장을 취하지. 과연 우리가 회피와 기피의 대상들을, 하물며 노숙인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있냔 말이야. 이런 발상만으로 노숙인을 대상화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그럼 대상화하면 안 되는 건가? 길거리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알고 싶어. 이걸 결핍의 추동력이라고 해도 될까.

바닥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넘어지다, 무릎 꿇다, 기다, 떨어지다, 내려가다… 같은 것들만 해도 그래, 나는 원래 친숙하게 느끼던 것들이었는데 어느새 떨쳐버리려 하고 있더군. 이순신 동상 앞에 누웠을 때에는 ‘다같이 누워서 손잡고 시위하는 프로젝트’를 상상하기도 했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지내왔어. 그런데 지금은 공연이 허용되지 않으니 무얼 해 볼까? 어떻게? 하다가 오히려 더 멀리하고 더 비대면하자, 입과 코뿐 아니라 눈까지 가려버리자! 아예 감각을 차단하자, 그리하여 관계 자체를 끊어보자 하는 충동이 밀려들었어. 일상에서 불가능한 이 일을 작업을 통해서라도….


[사진 4. 무면목의 상태로 되돌아가다]

나: 눈까지 가린다, 감각을 반납한다, 관계가 잘려나간다…. 『눈과 마음』이라는 산문집이 생각나게 하는군. 그걸 쓴 메를로-퐁티는 현대 예술가들이 많이 참조하는 철학가라지. 그 책에서도 ‘보는 일’이 그 자체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었나. 난 오래전에 절반만 읽었어.

지예의 비대면 퍼포먼스 소식을 접하기 전에 나도 비슷한 실험을 했었다는 걸 말하고 싶어. 8월 15일이었지. 온종일 눈을 감고 있었거든. 국경일이라 아침 여덟 시가 넘도록 느긋하게 이불에 파묻혀 있었는데, 전날 벌어진 사고, 며칠째 달아난 우리 집 비상열쇠 등등으로 얽힌 난잡한 생각의 타래 속에서 의식을 잃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느낌. 눈을 뜨면 현실에서 도망갈 구멍이 없겠더라고. 무얼 했게? 그날 난 눈을 뜨지 않았다. 확고하게 외면하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휴대폰조차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었고, 시간을 알 수 없었고, 무얼 차려 먹지도 못했어. 그 몇 가지 마비만으로 이미 일상의 궤도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고 할 수 있었어.

장장 열한 시간을 두 눈 꼭 감은 채 버텼지. 그러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이면 해 나갔지. 빨래 개기, 맨손 체조, 양치질, 가벼운 청소. 욕실에 전등을 켤 필요도 없이 더듬더듬 벽을 짚어가며 샤워를 했고, 이제 창밖에 빛이 물러갔구나! 싶을 즈음에서야 눈을 떴어. 저녁 일곱 시를 넘기고 바깥에 땅거미가 지고 있었지. 묵언수행, 장애체험 같은 말들이 떠오를지도 몰라. 그런데 눈감는 수행을 들어본 적 있어? 흡사 폐소공포증 같은 호흡곤란이 잠시 다녀갔지.

눈과 마음의 스위치를 내린 것이 내게는 이랬었는데, 지예에게는?

지예: 눈을 가리면 귀가 더 열릴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시각이 더 예민해지더군. 빛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몸의 다른 부분에 눈들이 돋는 느낌이었어. 온몸에 시세포를 가지고 있는 지렁이처럼. 그리고 비대면은 대면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 비대면 속에서 무엇을 겪는지 묘사하는 일은 대면 중이었을 때의 감각, 경험과의 비교 속에서만 가능하더라고.

흥미진진한 장면 연출과는 반대로 의도를 제거하는 데에 중점을 두다 보니, 모순되게도 기댈 곳이 더욱 필요해졌어. 퍼포먼스에 집중하는 중에 의식하고 의존할 것을 찾게 됐지. 한 번은 커피숍에서 종이봉투를 머리에 쓰고 앞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벗어보니 앞자리가 텅 비어있는 거야! 고개를 돌려보니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지. 봉투 안에서 음향 교란이 일어난 것인가 봐. 뒤집어쓰는 사물의 크기, 질감, 밀착 여부 등에 따라서 같은 환경에서도 상이한 감각이 열려. 퍼포먼스 셋팅이 그걸로 결정돼. 동참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뒤집어쓸 것을 가지고 와서 함께 하자고 청해 보았어. 제각기 무얼 활용하는지를 보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참여자가 거의 없었어. 한 명은 청각 자극에 노이로제를 호소하다가 몇 분 만에 포기!

나: 그런 모습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중이잖아. 과연 사진 작업과는 차별되는 거야? 일반적인 포토그라퍼들의 촬영과는 무엇이 달라서 ‘비대면 퍼포먼스’라고 분류했는지가 궁금해. 사진 작업도 피사체의 궤적을 라이브로 관람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보는 거잖아.


[사진 5, 6, 7. 퍼포먼스 중]

지예: 나는 사진 작업의 의지가 없었는데, 촬영을 하고, 또 그걸 인터넷에 올리기도 하니까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 사진들이 최종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카메라 미학이 결정 짓는) 사진 작업과는 구분돼. 그냥 ‘선보이는’ 정도랄까, “내가 이런 걸 하고 있소”하고 알리기 위해서 무엇으로든 담아내는 행위가 필요해서 찍는 것일 뿐. 사진을 생산할 목적으로 벌이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야.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공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있음을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앞부분에 나오는 한트케(Peter Handke)의 시 속의 아이는 홀로 자신이 아이임을 알 수 있을까? 나는 어릴 적부터 이런 물음들 앞에서 극심하게 답답해지는 동시에, 아무도 보지 않고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는 존재들에 매료되는 사람이었어. 관객의 대면이 부재하는 중에도 어딘가에서 퍼포먼스는 이루어지고 있단 얘기를 건넬 목적이지, 사진 자체에 발표 의도가 있지는 않아.

그렇게라도 내 작업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 마음과 뒤섞여 있어. 인터넷에 사진을 공개하는 순간, 내가 홀로 목도했던 것의 에센스는 사라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거든. SNS에서 소비되는 순간, 그만 공연이 아닌 것이 돼 버려.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는 있겠지. 그것도 가치 있다고 할 만해.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 깨우치는 자리가 타인의 작품이나 작업으로 인해 마련될 수 있을 거야. 그 일에 철저히 혼자 성공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제주말로 “궁퉁이가 안 난다”고 하지, 나는 오히려 그런 ‘자리’에 의해서 나를 발견해 왔지. 그러니 예술가로서의 내 역할이 콘텐츠를 만드는 데에 있지 않고, 각자가 저마다의 무엇과 조우할 수 있도록 기회와 힌트를 제공하는 데에 있다고 보지. 억지스런 경험을 누구나 다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오랫동안 자기소개의 어려움에 처해 있었어. 하지만 이제는 직업인이 되고 싶어. ‘업’을 가지고 싶어. 내가 있어 온 바닥이 예술계인데, 여기에 작업으로써 뿌리내리고 바닥을 딛고 싶어. 이럴 때 바닥은,

발판인 동시에 나를 지지해 주는 것. 더러운 것을 추방하는 곳이 아니라…!

[사진 8. 「새벽 내 시 눈꺼풀 없음」, 현지예]

현지예

서울대 생명과학부를 졸업했고 춤바람으로 몸 쓰는 길에 들어섰다. 십 년간 무용수로 작업해 왔고, 근래 드라마투르그와 작가로 활동 중이다. 작품으로는 {Q書}, {몽움}, <필사적 퍼포먼스> 등이 있고, 현재 [바닥상태 l 비대면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움직임이 잠들어 있는 ‘움’의 상태가 친밀하고, 움이 직- 열리며 나오는 움직임을 ‘언어’로 본다. 그 과정에 얽혀들 때면 신이 난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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