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지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지적 호기심이야말로 다른 동물들과 변별되는 호모 사피엔스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알고자 하는 것일까? 이 욕망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단지 인간의 본성이라고 가볍게 처리했다. “모든 사람은 본성상 알고 싶어 한다.”1) 그런데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대답해버리면, 물음은 중단되기 쉽다. 본디 그렇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있겠는가. ‘뭐 당연한 거 아니야?’라는 태도 앞에서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물음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끈질기게 물음은 물음을 이어간다. 심지어 질문은 이렇게 묻는 자신마저 물음에 붙인다. ‘나는 왜 묻는 걸까?’라며 재차 묻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의 파노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물음은 물음을 통해서는 결코 해소될 수 없을 것만 같다. 이 지경까지 이르러야 ‘호모 사피엔스’라는 명칭 끝에 ‘사피엔스’ 하나를 더 붙여 줄 만한 자격이 있다.
물음이 해소되었다고 여기는 경우는, 물려서(satiable) 그만두든지 아니면 끝까지 물고 있다가 그게 익숙해져서 물고 있는 것조차 잊든지, 둘 중 하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철학자는 물음에 생의 정곡을 물린(bitten) 사람이라 할 만하다.
빗발치는 화살처럼, 철학자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수많은 물음표(?)를 쏘아 올린다. 혹은 낚싯바늘(¿)처럼 드리운다. 도대체 철학자는 그 숱한 물음들을 통해 무엇을 낚으려는 걸까? 한두 마디 말로 답하기는 어렵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철학자가 물음을 통해 낚으려던 것보다는 차라리 그 자신이 물음에 낚여 있는 아이러니다.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물음의 투망을 던지면 던질수록, 그는 더 크고 복잡한 물음들에 낚인다. 물음으로 낚으려는데 그럴수록 자꾸만 물음에 낚이는 형국이다.
아니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낚이는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마치 낚시꾼이 미끼를 낚싯바늘에 걸어 두어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일부를 미끼로 삼아야 한다. 낚여야 한다. 그래야 트로이의 목마처럼 사로잡혀서 적진 한복판에 들어갈 수 있을 때에야 대어를 낚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미당의 시 제목 가운데 물음표가 적힌 시가 있다. 이 시는 물음표를 시 제목으로 삼고 있지만, 어떠한 회의와 망각의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는 어마어마한 긍정을 노래하고 있다.
무엇을 하려고 문밖을 나서다가
그만 깜박 그게 무엇이었던가를 잊어버린다.
그 대신에 생각나는 것이 한가지 있다.
인생이란 바로 이렇게 걸어 나와서
그만 깜박 그게 무엇이었던가를 잊어버린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게 사실은 나은 편이니까
이렇게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서정주, 「?」 전문)2)
시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집에 핸드폰을 두고 나온다든지 버스에 우산을 두고 내리는 것 같은 깜박 잊는 경험 말이다. 이런 소소한 일을 시인은 인생 전체로 확대한다. 환유적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종종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그런데 이 물음엔 답이 없다. 그렇다고 물음이 멈춰지지도 않는다. 문화적 동물이기도 한 인간은 의미를 먹고 사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든 게 무의미해져 버리면, 자살까지 감행하는 무서운 동물이다. 물어봐야 딱히 답은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묻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실존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보니까, 인생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의 무의미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이렇게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다. 본래 우리는 어떤 뜻(의도/의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는데, 깜박 그걸 잊은 것이라고 말이다. 망각을 긍정하자고 말이다. 이런 제안은 조금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하고, 문제를 회피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제안을 실천하려 하면, 쉽지 않은 일임을 금방 알게 된다. 집안에 두고 온 스마트폰 때문에, 아니면 버스에 두고 온 우산이 자꾸만 신경이 쓰여 정상적인 생활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그처럼 인생의 의미를 움켜쥐려고 얼마나 많은 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
사실 한나절 정도 스마트폰 없이 살아도 된다. 우산 없이 지내도 된다. 그것들이 없어도 너끈히 살아갈 수 있으며, 그간 그것들 때문에 살피지 못한 것들에 눈길을 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이렇게 마음먹을 수도 있을 텐데, 이 작은 회심이 개종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무엇인가를 쉽게 잊는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망각의 존재 이유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잊을 만하니까 잊는 것이고, 잊는 게 더 나은 것이라서 그토록 쉽게 잊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인 이상,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묻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거기에만 악착같이 매달리는 것은 좋지 않다. 때때로 삶의 무의미 역시 긍정할 줄 알아야 한다. 무의미 앞에서 호들갑스럽게 반응하거나 공포에 짓눌릴 필요는 없다. 까맣게 잊어버리는 일도 의미가 없지 않다. 모든 망각이 넌센스는 아니다. 하이데거는 망각의 의미를 ‘보존’이라 말한 적이 있다. 자꾸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그때마다 조금씩 원래의 기억내용이 수정되기 마련이다. 완전히 잊고 있다가 언젠가 다시 기억하게 된다면, 변형 없는 상태 그대로 기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비몽사몽 잠을 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신이 개운한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처음 망각을 긍정했던 철학자 니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망각은 칠흑 같은 과거가 인생의 발목을 붙잡지 못하게 해 주는 힘을 가졌다. 알고 보면 결국 잊는다는 게, “이게 사실은 나은 편이니까” 그렇듯 잊었던 게다. 이 사안엔 확고부동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시인의 말을 한번 믿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1)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1』, 조대호 옮김, 나남, 2012. 25쪽. Ⅰ권(A) 980a.
2) 서정주, 『미당 시전집 1』, 민음사, 1994, 4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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