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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평화 / 최엄윤

작성자 사진: 한국연구원한국연구원

지난 12월 15일은 영하의 날씨였다. 오후 12시 57분, 합정역에서 <강화도 산책 : 평화 도큐먼트>라는 행선지 표시가 붙은 버스에 헐레벌떡 오르자 이미 대부분의 좌석은 출발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오후 1시 정각에 출발한 버스는 1시간 남짓 달려 강화대교 DMZ 평화의 길 앞에 도착했다. 군인 역할인 듯 구령을 붙여 절도 있게 참가자들을 안내하는 배우들로부터 수신기와 명찰을 받아 목에 걸고 강화로 이주한 공연 제작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강화대교(구 대교)를 건너는 것으로 산책이 시작되었다. 이동식 공연인 <강화도 산책 : 평화 도큐먼트>는 강화도의 역사, 사람, 자연, 그리고 오늘을 리서치하고 기록한 창작자들을 따라 듣고, 보고, 걷고, 맛보는 입체적 여정이다. 그 길 위에서 관객은 잊고 있거나 무감해진 분단의 현실과 평화에 대해 생각하고 감각을 회복하거나 재발견하게 된다. 버스로 이동하며, 혹은 길 위에 앉거나 서서, 멀찌감치 또는 가까이에서 실향, 이산가족, 전쟁과 학살, 그리고 오늘 강화도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평화에 대한 이야기와 생각을 육성 인터뷰,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장면과 움직임, 노랫말과 때로는 자연 풍경 그 자체로 만날 수 있었다. ‘평화’는 이야기의 형태였다가 보이는 실체였고, 아주 가까이서 만날 수 있으면서도 너무 먼 곳에 있는 몽상이고, 엄청 힘들게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 세 시간 동안 스산하고 광활한 무대를 이동하며 어떤 이야기에는 집중하고 어떤 이야기는 흘려보냈다. 매서운 날씨 때문이기도 했고, 자유롭게 날아가는 철새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 이야기를 놓치기도 했고, 장소를 이동할 때 간간이 만나게 되는 군인들의 모습과 말로만 듣던 대북 방송의 소음에 긴장과 호기심이 생겨 집중을 흐리기도 했다. 산책길에는 강화도에서 농사 지으며 살아가는 배우가 실향민 할머니에게 배워 직접 만든 ‘대갈범벅’이라는 찹쌀을 빚어 팥고물을 얹힌 떡을 관객들에게 나눠주었고 여정의 마지막은 강화도 향토 음식을 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 총 든 군인이 경계를 선 접경지역에서 고요하고 아름다운 여정을 밟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의심 없이 따뜻한 음식을 나눌 수 있었던 되돌아보면 아이러니한 시간을 떠올리며 평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일상의 평화가 흔들리고 불면증에서 무기력증으로 이어지는 날들이 지속되고 있다.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언론과 출판 통제, 파업이나 집회 행위 금지, 의료인들에 대한 복귀 명령과 위반 시 처단,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 등의 내용을 담은 포고령이 발표되던 순간부터 하루아침에 자유가 침해당할 수 있다는 실존적 불안을 느꼈다. 계엄 해제 후에도 법에 불복하고 사실을 부정하며 교묘한 말 바꾸기로 이 모든 혼란에 대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대통령과 폭력도 불사하며 그를 옹호하는 세력들의 모습에서 일상은 계속 위협받고 있다. 민주주의와 사회 질서의 근간인 헌법을 무시하는 사람들과 부끄러움 없이 그들을 독려하며 선동하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어떻게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 불안과 걱정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다.

     

고립되어 인터넷 알고리즘 속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폭도가 되어 미디어 뒤에 감춰 두었던 불안, 스트레스, 일상 속 폭력을, 대통령을 구한다는 허위의식으로 거침없이 분출한 것이 서부지법 폭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의 실패는 상상력과 공감의 문제“라고 했다. 프랑스 정신 분석학자인 세르지 티세롱1)은 공감을 네 개의 차원으로 분류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자기 포기의 동일시로 사실상 최면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미디어가 주도하는 사회에서는 이 상태의 공감이 쉽게 나타날 수 있는데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빠지는 것도 바로 이 단계에 속한다. 감정적으로 동요되고 동일시만이 있는 상태, 자각을 상실한 상태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정파에 상관없이 소위 ‘빠’의 정치에 빠진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 학살 당시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동일시 상태에 있었다. 군중 속에서 개인은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의식하지 않고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저항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리는 것이다. 이렇듯 공감의 가장 큰 단점은 일종의 융합 상태를 만들어 착각과 혼란, 감정이입을 유발하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티세롱은 미디어에 의해 공감이 위협받는다고 했는데, 긴 호흡보다는 빠른 속도의 SNS와 쉽게 접속해서 빨리 감고, 멈출 수 있는 영상, 언어나 감정 표현도 단순, 단편화되어 클릭하는 세계에서 공감은 무뎌지고 금세 휘발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유와 다양성 등 다원적 가치 추구의 언어가 극단적 이기주의와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용되며 오염되고 전유되기까지 한다.

     

한편,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인 공감은 인지, 정신, 신체적 감응을 불러일으켜 공유와 연대의 바탕이 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통상 공감 능력은 미덕으로 간주한다. 두 번째 차원의 공감은 인지적 공감으로 사회적 상황의 의미를 해독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표현하는 지적 능력이다. 셋째는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방식의 공감으로 예를 들어 극장에서 모든 관객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공연을 보더라도 다르게 인식하듯 여기서는 상상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넷째는 공감이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행동으로 이어져 사회적 현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현상은 가치와 원칙의 이성으로 연대함을 전제하여 앞서 말한 자기 포기의 동일시로 발생하는 행동과 구분된다. 이러한 공감의 다양한 차원은 상호 의존적이며 정도에 따라 다르다. 예측할 수 없는 내일, 삶에 대해 떠오르는 의문과 불안의 사회적 아노미와 정치적 혼돈 속에서 절망으로 고립되지 않고 가치관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안전을 지켜내며 살아가려는, 그 자체가 바로 용기이다.

     

“인간의 자유와 행위는 다른 사람의 존재, 즉 다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위를 하면서 정체성을 획득하고,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고 확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간다”2)


    

계엄 사태가 일어나고 탄핵 가결을 촉구하는 집회에서 아는언니들 합창단이 국회의사당 무대에 올랐다. 팽목항, 광화문 등의 현장에서 노래로 연대해 온 아는언니들은 비혼, 퀴어, 페미니즘을 노래하는 합창단이다. 아시아 LGBT 합창단 네트워크인 ‘자랑스러운 목소리들(Proud

Voices Asia)’의 일원으로 대만, 서울, 도쿄의 합창대회에도 참가한 아는언니들은 작년 12월 말 열 번째 정기 공연 <일해라, 절해라>를 올렸다.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 앨범에 함께 한 아는언니들을 방송과 축제에서 접했던 나는 일 년에 한 번 뿐인 정기공연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예매를 서둘렀다. <일해라, 절해라>는 ‘일과 놀이’를 주제로 ‘상경, 고난, 회복, 잘 살자’의 네 개 키워드에 어울리는 노래들로 구성하였다. 열여덟 명의 단원과 반주자, 1부와 2부로 나누어 지휘도 하고 노래도 한 음악감독과 부 음악감독까지 총 21명의 아는언니들 합창단은 노래는 물론 단원들의 일과 일상을 담은 인터뷰와 브이로그 영상, 특급 게스트들의 무대까지 2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지루할 틈 없이 가득 채웠다. 아는언니들의 무대는 불완전해서 아름다웠다. 한 사람이 한 소절씩 독백하듯 부르기 시작한 곡 <서울살이 몇핸가요>에서는 연약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에 혹시 삑사리가 나면 어쩌나 긴장했는데 신기하게도 다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힘이 나고 조화로워 감동이 더 컸다. 소박하게 맞춰 입은 의상과 사랑스럽고 때론 유쾌한 몸짓, 알고 있던 노래들도 아는언니들의 편곡과 합창으로 들으니 가사가 쏙쏙 들어왔다. 원가정으로부터 떠나 독립하고, 노동하고, 지치고, 꿈꾸고, 쉬고, 연대하고, 투쟁하는 이야기를 담은 공연을 보며 몇 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었다. 이해와 웃음, 눈물, 흥겨운 환호와 들썩임의 인지, 정서, 신체 반응으로 아는언니들의 노래와 이야기에 공감했던 시간은 실존적 만남의 순간으로 남았다.

     

“혁명이 혼란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리니”라는 백기완 선생님의 말씀처럼 예술은 무기력에 빠진 존재에게 잃어버린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도록 손 내밀고, 공감 속에서 순환할 힘, 그 가능성으로 이끈다. 그 순환이 사회적 현상이 된다면 그것은 “한 사람이 아닌 복수의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거주하는 지구가 될 것이다.

     

1)Serge Tisseron 『L’empathie au coeur du jeu social』, Albin Michel, 2011.

2)이진우, <전체주의와 ‘정치적 자유’의 의미> in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2006, p.24.




최엄윤, 사무엘 베케트의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말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언젠가 결국은 창작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omyunchoi@hanmail.net
최엄윤, 사무엘 베케트의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말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언젠가 결국은 창작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omyu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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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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