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의 존재론 / 오문석

모처럼 맑은 하늘이 드러나고 있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재난경보 순위에서 밀려난 탓이다. 공장이 문을 닫고, 하늘길이 막힌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살길이 막막해진 사람들 앞에 맑은 하늘이라니.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날 수도 없는 맑은 하늘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자연과 인간은 또 이렇게 엇박자를 만들고 있다. 인간들이 활동을 멈추자 자연이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도심을 활보하는 동물까지 있다고 들었다. 그 모습이 낯선 것은 예전의 자연이 아닌 까닭이다. 인간이 자유롭게 움직일 때 자연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신화적 지배 이후로 자연은 지배와 관리의 대상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다시는 거대 자연 앞에서 허망한 죽음을 반복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 결과이다. 그것은 우리가 의존하는 과학기술의 약속이기도 하다. 이후에는 오직 관리된 자연만이 자연이라 불렸다.


그러나 자연은 가끔 지금처럼 관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즉 날것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최근 몇 년간의 미세먼지가 그렇다. 도무지 속수무책이다. 몇 년간 미세먼지로 자욱해진 봄 하늘의 풍경에 익숙해졌다. 숨을 쉴 때마다 폐를 짓누르는 먼지의 압박을 견뎌왔다. 재난이라는 것이 관리되지 않은 자연의 다른 이름이라면, 이 또한 재난일 것이다. 그런데 재난도 일상이 되면 그것도 익숙해진다. 일상이 재난이니,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이 오히려 낯설게 된다. 지금이 꼭 그렇다.



그런데 그 먼지가 문제다. 그것은 자연인가? 근대 이전까지 먼지를 만들어내는 주체는 단연코 자연이었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를 먼지로 되돌려보내는 것은 자연의 사명이고 역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은 먼지로 사라지지 않는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크기나 무게와는 무관하게 모든 물체는 언젠가는 먼지로 되돌아간다. 동양의 종교는 특히 오랫동안 그 ‘티끌의 존재’를 숙고하였다. 한국인들이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의 「Dust in the wind」를 좋아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는 모두 바람 속의 먼지에 불과(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하며,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먼지처럼 사라질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먼지의 존재’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자연을 거슬러 먼지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먼지에 저항하면서,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을 문화와 문명을 건설하는 데에 힘을 쏟는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먼지들이 생산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먼지로 되돌리려는 자연의 노동에 저항하기 위해, 인간의 활동은 엄청나게 많은 인공 먼지를 생산한다. 인공 먼지는 자연적 소멸에 저항하는 인간 사회의 부산물인 것이다. 먼지가 되지 않기 위한 먼지라고나 할까. 당연하게도 그것은 결코 자연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먼지가 아니다. 자연이 만드는 먼지와 인간이 만드는 먼지는 이렇게 다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만든 그 많은 먼지들을 재난이라 부른다. 먼지로 둘러싸인 삶이, 그 일상이 재난이 된 것이다. 과연 그런가? 모든 먼지는 원래부터 재난이었던가?

한때 땅 위에 살았던, 이젠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수한 생명체들은 어디로 갔을까? 정말 없어져버린 것일까? 숨을 쉬어보면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것도 같다. 내 몸 속의 공기들을 내보내고, 이미 누군가의 허파를 지나왔던 공기를, 짐승의 내장과 나무의 수액을 지나왔던 공기를, 변소와 하수구와 자동차 배기통에 있던 공기를 들이마시면 없어졌던 그 모든 것들이 느껴진다. / 공기 속에 가득한 이 먼지들은 무엇인가? 한때 땅 위에 살았던 사람들과 동시대에 살았다면 사랑했을지도 모를, 얘기하고 만지고, 그 눈동자만 생각해도 온몸에 열이 나고 떨렸을 어떤 아름다운 몸을 내가 지금 마시고 있지 않은가? / 하루하루 비듬이 떨어져나가듯 생명은 닳고 있다. 닳아서 체온과 목소리와 슬픔과 함께 먼지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자기가 밟아죽였던 벌레의 풍화된 먼지와 사이좋게 섞여서, 한때 화장을 하고 보디빌딩을 하고 옷을 입어 가꾸던 몸뚱어리들은 다시 누군가의 코와 입으로 노래와 욕설 속으로, 햇빛과 새벽 공기 속으로, 매연과 배설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기택, <태아의 잠>(문학과지성사, 1991) 뒷표지


시인의 상상력에서 먼지는 무수한 생명체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의 허파를 지나서 나에게 도달한 먼지는 누군가의 몸뚱아리였을지 모르는 것들이기도 하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결국 먼지로 돌아갈 것이고, 그 먼지가 살아 있는 허파를 작동시킨다. 먼지는 삶과 죽음을 잇는 거대한 보편자이다. 그 보편자는 인간과 곤충도 구별하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도 나누지 않는다. 먼지로 되돌아가는 길은 평등이 실현되는 통로인 것이다.


그러나 초미세먼지를 들이마시면서도 우리는 그 원산지를 기억할 수 있을까? 그 먼지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짐작하고 온몸으로 전율할 수 있을까? 먼지가 되지 않으려 저항하는 먼지들은 과연 사물의 기억을 실어나를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불가능 앞에 전율한다. 어쩌면 그 불가능이 곧 재난일 것이다. 먼지의 존재론, 그것이 하늘을 잔뜩 뒤덮고 있는 저 미세먼지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것은 너무 많은 먼지들 속에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보며 문득 떠오른 노래가 「먼지가 되어」(김광석)라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오문석(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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