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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형 서비스에 저항하라? / 오문석

한국에 로봇에 대한 소설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사회주의자 박영희다.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봇」(1920)이 당시 갓 사회주의에 입문한 박영희의 번역을 거치면서 「인조노동자」(1925)로 재탄생한 것이다. 1925년은 사회주의 문학단체 KAPF가 결성된 해이다. 그로 인해 SF는 돌연 정치소설로 해석되었다. 인간이 인조인간으로 인해서 몰락한다는 「로봇」의 이야기는 「인조노동자」에서 자본가의 몰락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거기에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인간들 사이의 지배 관계를 보여주는 단순한 알레고리, 심하게는 우화(寓話)로 취급된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 역전의 문제가 시야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때만해도 그것은 황당무계한 공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출처: https://socialecologies.wordpress.com/2013/06/22/dystopian-machines-karel-capek-r-u-r/

반면 오늘날의 로봇 기술은 상상을 초월하는 데가 있다.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박영희의 예측과는 달리, 로봇은 이제 노동자의 편에서 자본가에게 맞서는 존재가 아니다. 되려 자본가의 편에서 노동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로봇이 들어서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기계와 인간, 즉 인조노동자와 인간노동자가 같은 일자리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로봇」에 나타난 기계와 인간의 갈등이 노자갈등이 아니라 노노갈등의 알레고리로 읽힌다니, 박영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계와 인간의 관계는 단순한 갈등과 경쟁으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기계가 되고, 기계는 인간이 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연적 신체는 인공적 조작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반면에 인간의 뇌를 모방한 AI의 기술은 놀라운 성장을 보이고 있다.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의 기술력을 보자면, AI의 인간 선언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사정이 이렇다면, 양자 사이의 경쟁이란 오히려 서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경쟁이라고 할 만하다. 인간은 기계의 위치에, 기계는 인간의 위치에 서는 소설 「로봇」의 혁명적 발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단기간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최근에는 인간의 삶에 기계가 깊숙이 침투한 것을 실감하는 일이 많다. 특히 인터넷 검색 기능에서 그것을 경험한다. 예컨대, 인터넷으로 특정 상품을 검색하면 인터넷 화면은 관련 상품을 나에게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것은 내가 검색한 상품이 나의 기호품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내용을 기계장치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 상품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나를 골라낸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무기력하게 진열된 예전의 상품들이 아니다. ‘나’라고 하는 특정인의 취향에 맞는 상품들이 나의 눈앞에 진열된다. 이것을 맞춤형 서비스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상품들이 나를 알아보다니, 우쭐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잘 알다시피 검색 엔진 앞에서 나는 개별적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만 검색창에 검색 흔적을 남김으로써 정보를 제공하는 한갓 존재에 불과하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나의 인격이 아니라 내가 검색한 정보의 총체일 뿐이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검색한 동영상의 취향을 파악하고 그와 유사한 동영상을 무한리필해준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기계장치의 서비스에 탄복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세에도 그랬다. 지구는 분명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지만, 인간은 오랫동안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믿었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착시현상이었다. 하지만 시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자 그것이 믿음의 대상으로 고착된 것이다. 지금도 착시현상에서 비롯되는 물음은 반복된다. 세상의 모든 상품들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가, 내가 세상의 모든 상품들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가? 나의 취향을 미리 알고 달려드는 온갖 맞춤형 서비스들은 나를 현혹한다. ‘너를 위해 준비했어.’

핸드폰이 사람들을 사로잡기 시작했을 무렵의 한 장면을 기억하는 시인이 있다.


철제빔과 유리로 된 빌딩들 사이로
늑대의 울부짖음이 황량하다.
핸드폰을 받기 위해 한 사람이 멈춰선다.
거리의 행인들이 동시에 핸드폰을 꺼내든다.
핸드폰이 입을 연다. 당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세계의 중심들이 다시 걷기 시작한다.
(좀비들은 盛裝을 하고 무도회에 간다네.)
세계의 중심들은 움직인다. 사랑이 그런 것처럼.
핸드폰의 몽롱한 눈을 통해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
눈 안의 환영적인 길을 통해 그들이 가려는 곳은?
(묻지마, 다쳐! 묻지마, 닥쳐?)
카메라폰이 찍은 낯익은 골목들은 아니리라.
- 장이지, 「모바일 오페라」

시인 장이지,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ron037

온갖 디지털 기계장치들이 말한다. “당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이 많은 상품들이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며, 당신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모두가 “세계의 중심들”이 되면 중심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나를 둘러싸는 순간, 나는 이미 원형 감옥에 갇힌다. 말하자면, 취향과 정체성이라는 견고한 감옥에 갇힌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를 가두고 먹이를 주는 사육사 겸 간수가 될 것이다. 나의 취향을 적중시키는 그 먹이들이란 오죽 맛있겠는가? 감옥으로 던져지는 그 많은 먹이들은 나의 취향과 정체성을 더욱 살찌게 만들 것이다. 지배관계는 역전된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맞춤형에 응답하는 순간, 우리들은 피를 향해 직진하는 굶주린 “좀비들”이 된다고. 그리고 직진만 아는 좀비들에게 질문의 길은 ‘닫혀’ 있다고. 듣자니, 사이비 종교의 포교도 맞춤형 서비스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사람들의 고민과 상처를 파악하고 맞춤형 접근법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들만의 좀비 만들기 프로젝트이다. 그것은 어쩌면 진화한 디지털 기계장치들의 수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검색 엔진 앞에 앉아 있는 그대들이여, 지금 당장 내 입에 달콤한 모든 것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내가 먹는 그것이 나를 잡아먹기 전에 말이다. 우리 모두 전염성 강한 살찐 좀비들이 되기 전에 말이다.


오문석(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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