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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 대학의 가짜 교수들 / 고부응


12세기경 유럽에서 시작된 대학의 역사에서 대학이 순수하게 진리를 추구한 적도 없지만 현재만큼 진리 추구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적도 또한 없다. 물론 대학의 도서관에는 공부하는 학생들로 넘쳐나고 교수들은 엄청난 양의 논문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대학의 모습은 없다. 학생들은 취직을 위한 스펙 관리에 정신이 없고 교수들은 업적 경쟁을 위한 논문을 짜내고 있다. 대학 본부는 학생과 교수를 채찍질하며 각종 대학 평가에서 순위를 높이기 위한 전략을 짜고 실행하는 데 전력한다. 그 뒤에는 대학 기업을 경영하는 사학법인이 있다. 국립대라면 사학법인 대신 교육부가 있다.


대학(the university)은 원래 학생과 교수로 이루어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한다. 따라서 그 모임을 주도하는 교수의 사명은 자신의 학문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학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대학은 다른 교육기관이나 연구소와 다르다. 대학이 아닌 교육기관의 교사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교과과정에 따라 학생을 가르친다. 교육 내용을 스스로 정할 수는 없다. 연구가 업무인 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은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나 그 대상은 자기가 결정하지 않는다. 연구원의 연구는 자신이 속한 연구소의 설립 목적에 부합하여야 한다.


이 글의 제목 "망해가는 대학의 가짜 교수들"에 대한 미드저니봇의 생성결과. 프롬프트 오영진

교사나 연구원과는 달리 교수는 교육과 연구의 내용을 스스로 선택한다. 이른바 학문의 자유이다. 그런 학문의 자유가 없다면 교수가 아니다. 볼로냐 대학과 더불어 최초의 대학이었던 파리대학이 당시 이미 존재하던 수도원이나 성당 학교와 달랐던 점은 학문의 대상을 교회의 지침에 따르지 않고 학자들 스스로 설정한 데 있다. 파리대학에서 현재의 인문학 자연과학 등 기본 학문에 해당하는 철학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의 교수들이 스스로 학문의 대상을 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 대학의 기원이 된 베를린 대학은 학문의 자유를 대학의 원리로 천명하면서 시작하였다. 20세기 초의 미국 대학에서는 교수들은 대학을 사기업으로 생각하는 대학의 경영자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하면서 교수의 신분 보장은 학문의 자유에 의해 확보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학문의 자유가 없다면 교수의 신분은 유지될 수 없으며 교수는 학문의 자유의 원리에 따라 학문을 추구하여야 한다.


교수의 본업에 필수적인 학문의 자유를 현재의 교수들이 보장받고 있을까? 물론 교수에게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학문 영역은 없다. 어떤 내용을 교육하거나 연구하였다고 해서 교수직이 박탈되거나 감옥에 가는 일은 없다. 그러나 학문의 자유가 대학에서 자유로운 학문 탐구를 보호하고 부흥시키는 원리라면 대학의 역사에서 현재의 대학만큼 학문의 자유가 위축된 적도 없다. 더구나 더 큰 문제는 학문의 자유가 없어진 상태를 교수들이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교수들 스스로 그런 상태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겉으로 보면 한국의 대학은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교수와 학생 수, 재정, 외국 대학과의 교류, 국제적 위상, 그리고 무엇보다 교수들이 생산하는 논문의 양을 본다면 이제 한국의 대학은 세계적인 대학이다. 한국 대학의 대표 서울대가 20여 년 전에는 세계대학 순위 평가에서 100위 밖에 있다가 현재 30위권에 들어와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사립대학도 순위 상승이 비슷하게 빠르다. 그리고 대학 경영진은 그런 평가에서 순위 상승이 대학의 발전을 입증하고 있다고 한다.


순위 상승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교수의 연구업적이다. 교수의 연구업적을 높이기 위해 대학 본부는 교수들을 경쟁으로 몰아가는 교수업적 상대평가를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이용한다. 연구, 교육, 봉사로 이루어지는 교수업적 평가 대상 중 연구업적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연구업적은 논문 편수 (인용지수 등으로 논문의 질도 평가한다지만 결국 가중치를 반영한 수치이기에 편수와 다를 바 없다), 연구기금 유치 등으로 이루어진다. 논문 편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학술지 게재가 쉽거나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는 학술지를 염두에 두고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연구기금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이 원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연구기금 유치는 이공 분야, 의약학 분야의 학문에서는 논문 업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이들 분야는 교수 인원, 대학원생 수, 배정되는 예산, 연구 공간 크기, 행정 지원 등의 면에서 대학에서 절대적 존재다. 대학 순위 평가에서도 이 분야의 성과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교수들의 자부심도 높다). 수학 등 순수 이론 분야를 제외하고는 이공 분야나 의약학 분야의 연구는 실험 과정을 거치며 실험을 위해서는 연구비가 필요하다. 연구비를 수주하지 못하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여 논문을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실험 장비나 재료비뿐만 아니라 연구진의 인건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나 기업 등 거대 조직으로부터 큰 규모의 연구비를 수주하여야 한다. 이런 연구비를 수주하기 위하여 제출하는 연구계획은 당연히 정부나 기업이 원하는 연구계획이어야 한다. 정부나 기업의 심사진은 심사 대상이 되는 연구계획서가 정부나 기업이 원하는 연구가 아니면 연구비 지급 대상으로 선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과학, 공학, 의약학 분야에서는 연구성과, 연구비 수주, 특허 등에 따른 수익, 연구성과와 연구비 수주에 따른 금전적 수입 확대가 모두 맞물려 있고 이런 순환구조에서 성과가 높은 교수는 다시 연구비 수주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여 이 순환구조를 더욱 확대하며 재생산하게 된다.


연구비 수주가 교수 연구의 출발이면서 목표가 될 때 대학의 연구는 이윤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기업과 같아진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 추구이며 이를 위해서는 팔릴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여야 하듯이 교수의 연구 목적은 연구비 명목의 이윤 추구이며 이를 위해서는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 연구를 수행하여야 한다. 기업이 상품 생산을 위하여 공장을 짓고 자재와 기계를 구매하고 노동자를 고용하듯이 교수는 연구실을 확보하고 실험 장비와 실험재료를 구매하고 연구진을 구성하여야 한다. 기업이 이윤 확보에 저임금 노동자가 필요하듯이 대학의 실험실은 저임금 노동자인 석박사 대학원생이 필요하다. 대학의 연구실은 기업이고 그 기업의 대표가 교수이다. 그리고 그 뒤에 이 모든 기업을 총괄하는 모기업 대학 본부가 있다.


대학 기업의 수익 모델은 프랜차이즈 기업이다. 대학 본부는 프랜차이즈 사업의 본부이고 교수의 연구실은 가맹점에 해당한다. 교수는 특정 대학 소속 교수가 됨으로써 가맹점주 자격을 획득한다. 이 가맹점의 사장인 교수는 각각의 방식으로 연구사업을 한다. 연구사업의 목표는 수익 목적의 연구비 수주이다. 연구비는 매출액에 해당하고 이 매출액에서 실험 장비, 인건비를 지급하고 난 나머지가 수익이 된다. 대학 본부는 연구실이라는 가맹점을 감독하고 지원하면서 연구비에서 파생되는 연구간접비(행정지원비)를 수수료로 취득한다(이런 면을 보면 앵벌이를 부리는 왕초나 상인에게 자릿세를 받는 조폭과 비슷하기도 하다). 이 프랜차이즈 사업은 대학 기업의 다른 사업인 교육 상품 판매 사업에도 도움이 된다. 연구 실적이 좋아 명문 대학으로 자리매김하면 교육 상품을 고가에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의 교육은 사실상 차이가 없음에도 명문 대학일수록 수업료가 비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연구와 교육이 상품이 된 대학에서 경영의 목표는 수익 창출이다. 그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경영 원리는 최저 비용을 최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경제성이고 자원 활용을 극대화하여야 한다는 효율성이다. 경제성의 원칙은 선택과 집중으로 나타난다. 선택의 대상이 되는 학문 분야는 대학 본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커가고 정리 대상이 되는 학문 분야는 소멸하기 시작한다. 선택의 대상이 되기 위해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상대평가를 교수나 학생이나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다.

이런 조건에서는 교수가 스스로 학문적으로 의미 있는 연구를 수행할 수는 없다. 성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가 연구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성과가 나오기 어려운 순수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필연적으로 도태된다. 순수 과학이 학문의 세계에서 도태될 때 학문의 미래는 없다. 학문 조직으로서의 대학의 미래 역시 없다.


수학이나 이론 물리학 등 일부 순수 이론 분야를 제외하고서는 이공학이나 의약학 분야의 교수들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구비 수주 없이는 연구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원칙적으로 학문을 살리고 대학을 살리기 위해서는 조건 없는 연구비 지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외부의 연구비 지원이 없어도 큰 문제 없이 수행할 수 있는 학문 영역이 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분야의 학문은 대부분 외부 조직이 제공하는 연구기금 없이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에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교수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는 대세를 따르는 것이다. 대학 경영진의 지침에 따라 논문 편수 양산에 매진하고 연구기금을 수주하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돈이 되는 학문을 하는 것이다. 소위 유능하다는 교수들이 취하는 태도이다. 기업 친화적인 정책 연구, 생산성 효율성을 높이는 인력 개발 연구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문화산업 콘텐츠 개발, 인문학을 위한 인공지능 등은 인문학 분야의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대세가 대학의 몰락을 가속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현재의 대학이 대학의 본질이나 이념과 괴리되어 있음을 의식하고 이상적인 대학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소규모의 대학에서는 학생과 교수가 함께하는 대학 공동체 복원 노력이, 규모 있는 연구 중심 대학에서는 대학의 연구가 공공성이 확보되도록 하는 노력이 될 것이다. 학문의 자유와 지식의 공공성이 대학의 본질임을 잊지 않으면서 연구성과가 기업의 독점적 이익 등 사적 목적으로 이용되지 못하게 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일을 국가의 학문 정책으로 요구하는 것 등이다. 아마도 이런 태도가 상식적이거나 정상적인 교수들이 취할 태도일 것이다.


셋째는 교수직이 더 이상 특권적 신분이 아님을 인정하고 공장 노동자와 별로 다르지 않은 지식 노동자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제 교수들 스스로 특권층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교수들 스스로 자연스럽게 그냥 그저 그런 직장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직장인은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이다. 자신의 신분을 직장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계급 의식이 없을 것이고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계급 의식이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 현장에서 성과를 내기 위한 경쟁은 경쟁자 모두를 파멸로 몰아가기 때문에 노동자 전체의 입장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노동자의 단결이다. 교수들이 스스로 계급 의식을 갖는다면 교수들은 이런 노동계급의 연대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가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하면서 교내의 다른 노동자 집단과 함께 노동자 연대를 구축하며 밖으로는 모든 직종, 모든 산업의 노동 조직과 연대를 모색하고 실천할 때 교수 집단은 막강한 힘을 갖게 되고 교수의 신분 보장은 더 확실해질 것이며 노동자가 절대다수인 이 사회는 좀 더 살만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이 세 번째 자세가 가장 바람직하고 미래의 희망이 되겠지만 이런 교수가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우둔하다는 생각도 든다.

고부응 (중앙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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