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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망설임의 흔적 / 오문석

‘주저흔’이라는 말이 있다. 망자의 신체에 남겨진 망설임의 흔적을 가리킨다. 그것의 존재 여부는 자살과 타살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되곤 한다. 삶과 죽음에 경계라는 것이 있다면, 주저흔은 망자가 그 경계에 잠시 머물렀던 시간을 보여준다. 짧은 망설임 끝에 결단이 내려진 것이다. 이처럼 망설임은 모종의 결단을 앞두고 있는 사람의 두려움을 담고 있다. 이 두려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다. 적어도 망설임은, 그가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 앞에 서 있다는 것,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 문 앞에까지 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망설임은 단순한 우유부단함이 아니다.



누구나 다 아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 그것이다. 널리 알려진 번역은 여석기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이지만, 그 외에도 번역 판본마다 10여 개의 다른 번역이 존재한다. 이 대사는 선왕(先王)을 대신한 햄릿 왕자의 복수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중차대한 문제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지만, 번역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구절이다. (예컨대 “살리느냐, 죽이느냐”에서처럼) 그래서 이 대목은 성급하게 뜻을 정하지 못하게 하는, 번역자의 망설임을 유도하는 부분이다. 무릇 번역의 어려움이란 수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저 망설임의 시간을 견디는 데에 있는 탓이다.

그러나 시인을 빼고 망설임을 거론할 수는 없다. 잘 알다시피 시적 언어는 과학자의 수학적 언어처럼 정확성을 겨냥하지 않는다. 시적 언어는 근본적으로 망설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 김소월, 「가는 길」 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말을 할까” 말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냥 갈까” 하다가도 발걸음을 멈추고 있다.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화자는 “To be, or not to be”, 즉 ‘있을 것이냐 말 것이냐’, ‘머물 것이냐 떠날 것이냐’의 미결정 지점을 배회한다. 이 시는 이 망설임의 지점을 전달하는 데 적합한 형식을 띠고 있다. 줄글로 잇지 않고 행마다 끊어 읽기를 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과 행 사이에 큰 한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줄글에는 없는 큰 숨통이 행과 행 사이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느리고 답답한 언어, 한숨이 포함되어 말을 더듬는 듯한 언어가 시적 언어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표현이 시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인력거꾼 김첨지는 그날따라 수입이 좋았다. 아파 누워 있는 아내를 위해 그렇게도 먹고 싶다던 설렁탕을 충분히 사고도 남을 만큼 벌어들였다. 그런데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주저한다. 그는 망설인다. 심지어 망설임의 알리바이가 되어 줄 상황을 만들고자 한다.


한 걸음 두 걸음 집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조차 괴상하게 누그러웠다. 그런데 이 누그러움은 안심에서 오는 게 아니요 자기를 덮친 무서운 불행을 빈틈없이 알게 될 때가 박두한 것을 두리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불행에 다닥치기 전 시간을 얼마쯤이라도 늘이려고 벼르적거렸다. 기적에 가까운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을 할 수 있으면 오래 지니고 싶었다. 그는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었다. 그 모양은 마치 자기 집 — 곧 불행을 향하고 달아가는 제 다리를 제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으니 누구든지 나를 좀 잡아 다고, 구해다고 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선술집 앞에서 친구를 만나게 되고, 그를 붙들고 진탕 술을 마시고 취하는 쪽을 택한다. 그 친구를 “자기를 살려준 은인”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는 집으로 곧장 달려가 아픈 아내에게 설렁탕을 먹이고 싶어 하는 자상한 남편이지만, 그날따라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것이다. 그리고 확신에 가까운 그 불행을 직접 맞닥뜨릴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그의 아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예감이라기에는) 너무도 분명한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집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아내를 향해 냅다 욕부터 쏟아놓는다. 그의 욕설은 (사랑의 감정을 정반대로 표현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애정 표현의 다른 방식이기도 하지만, 싸늘한 침묵을 몰아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기도 하다. 그의 말과 행동은 보이지 않는 곳에 망설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시인도 그러하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판본이 있다. 그 판본은 시의 마지막 연을 이렇게 끝낸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시에서 저 쉼표는 사라졌다. 그러나 쉼표를 포함하고 있는 이 마지막 구절에서 확인되는 것은 망설임이다. 화자는 “죽어도”로 시작하는 문장을 쓰려 했으나 곧바로 이를 삭제하고 있는데, 그 흔적이 쉼표에 담겨 있다. 앞에서 보았던 「가는 길」에서 망설임의 표지는 행갈이였지만, 「진달래꽃」에서는 쉼표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망설임의 표지를 삭제하지 않고 마지막 구절에 살려둔 것이다. 그 흔적은 화자의 망설임이기도 하지만, 시인의 망설임이기도 하다. 결국 김소월은 최종적으로 그 쉼표를 삭제하는 쪽을 선택했다. 쉼표를 삭제하니 망설임은 사라졌고, 그 대신 결연한 의지가 전면에 대두한다. 그러나 표면에서 사라진 화자의 망설임은 외적 발언 뒤에서 숨겨진 눈물로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 망설임의 흔적까지 읽어줘야지 이 시는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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