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지구인들은 오래도록 남성, 어른, 인간, 생명 등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실은 지배하고 착취해왔다. 같은 인간을 살해할 때는 짐승만도 못하다든가, 인간이 아니라든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며 그런 짓을 자행했다.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여자를 살해하기도 해왔다. 그렇지만 오늘날 지구의 풍경을 보면 변화는 분명히 시작되었다. 아니, 재생 에너지의 사례에서처럼 판이 다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생태주의, 기후 위기, 만물을 차별없이 보자고 하는 평평 존재론(flat ontology) 같은 소리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더 확산되고 심화되고 풍부화되어야 할 흐름이다. 그런데 그 흐름 속에서 불편할 때가 종종 있다. 생명이 소중한 이유가, ‘한낱 물질과는 다르니까’가 아니면 좋겠다.
1. 생명이 소중하다고들 한다. 나도 그렇게 느낀다. 한데 여기서 더 나아가 생물과 무생물(물질)을 대립시키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럴 때면 불편해진다. 심히 불편할 때도 있다. 생명의 소중함이, 사물에 대한 무심함 혹은 폄하나 비하와 쌍을 이룰 때가 그렇다. 이런 불편함 때문에 해월 최시형 선생의 경물(敬物) 사상에 대해 들었을 때 크게 반색하며 흐뭇했다. 대략 이런 성향의 나는 (생기론자는 아니고) 물활론자다. 생기론은 불활성(不活性) 물질에 생명의 기운이 깃든다고 본다. 유대 기독교라든가 몇몇 영성주의 같은 것들에서 볼 수 있다. 대단히 중요한 통찰이 생명 대 물질이라는 틀에 갇힌 꼴이다. 물질에 대한 폄하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물활론은 세상 만물이 활동한다고 본다. 현대의 자연과학과도 아주 잘 들어맞는 사상이다. 137억년 이래로 우주를 만들어온 것이 물질 아니면 뭔가! 생명을 어떤 할아버지가, 혹은 위대한 1님이 어느 날 뿅! 창조한 게 아닌 한, 물질들을 물질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만물은 활동한다.
2. 한데 언제부턴가 이런 자연주의나 물활론에도 불편함을 느낄 때가 생기곤 했다.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을 가지고 얘기해보자. 베넷은 장구하게 이어져 온 물질에 대한 폄하를 비판한다. 그리고 물질의 활성, 생명적인 특성, 능동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당연히 생기론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한다. 자신의 생각을 생기적 유물론이라 칭하는 것도 이와 관련해서다. 아주 훌륭한 책이며 일독을 권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더 치고 나가지 못한 문제는 있다. 물질과 생명의 구별 문제다. 말하자면 이런 질문이다. 물질을 존중한다고 하면, 생물과 물질의 구별은 없어지는가? 만족스럽지 못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의 대립 문제다. 한낱 수동적이기만 하지 않다고, 반대로 대단히 능동적이라고 하면 충분한가? 능동-수동 문제는 본래 자주 고민했던 문제지만, 특히 중동태의 세계를 번역하면서 훨씬 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첫째 문제에만 집중하자.
3. 나는 생명이 소중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공장식 축산과 대부분의 동물 실험에는 극력 반대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생물과 무생물을, 동물과 식물을 대립시키지 않기 때문에 채식주의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4. 생물은 물질의 특정한 구성체다. 그래서 “물질과 생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질문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다. 동물에 대한 멸시와 무지가 없이는 발상부터가 불가능한 질문이다. 질문을 바꿔보면 문제점이 분명해진다. “민들레와 식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실 민들레는 식물의 특정한 종류지, 식물과 다른 존재가 아니다. 민들레가 식물이 아니면 그럼, 동물이거나 바위 같은 존재라는 말인가? 생물과 물질의 차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운운하는 것은 전자를 신성시하고 후자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멸시하는 훈련을 사회로부터 체계적으로 반복해서 받아왔기 때문일 뿐이다. ‘흑인과 인간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만큼이나 야만적인 질문이다.
5. 나는 이런 상식적인 판단에 큰 문제를 느끼지 않으며 살아왔다. 한자 문화권에서 동물, 식물, 광물은 모두 물(物)이다. 인물은 물론이고 사물까지도 모두 물이다. 무생물도 물이다. 이런 생각은 자연주의라든가 범우주적 물론(物論)이라 부를 법한 것이다. 한데 이런 내가 “물질과 생물의 차이는 무엇인가?”와 비슷한 질문을 종종, 그리고 점점 더 많이 던지게 되었다.
6. 민들레는 물론 식물이다. 그렇지만 채송화, 소나무, 바나나랑은 다르다. 공통점(가령 광합성)이 많으니 식물로 한데 묶이지만 서로 다른 점들이 있으니 다른 종류인 것 또한 사실이다. 생물은 물(物)의 일종이다. 무생물도 물의 일종이다. 생물과 무생물은 모두 물(物)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같지만, 서로의 차이도 있다. 그런데 이 차이는 민들레와 바나나의 차이와는 다르다. 왜냐면 생물 역시 무생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7. 우주 진화사를 떠올려보자. 원자로부터 다른 원자와 분자들이 만들어지고 초고분자들도 만들어지고 그러다가 생물도 만들어졌다. 물질이 생물의 부모고, 생물은 물질의 자손이다. 만물이 다른 사물들을 생산한다. 산출한다. 낳고 또 낳는다. 그렇게 태어난 물질들이 다른 물질로 변하거나 사라진다. 낳고 또 낳으면서 끊임없이 변해간다(생생지역(生生之易)). 그리고 생이불유(生而不有, 노자). 낳되 소유하지 않는다. 낳아놓고 자기를 닮으라 강요하지도 않고, 자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감금하지도 않는다. 서로 무심할 때도 있다. 비슷한 것들끼리 친하게 지내기도 한다(유유상종). 정반대로 비슷한 걸 밀쳐내고(척력) 다를수록 끌린다(인력). 종의 기원에 보면 심히 다를 경우 사로잡히기(arrested, 매혹)까지 한다. 뒤쪽의 세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화학자들이다. 그리하여 물질들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자연스럽게. 태어난 대부분의 것들은 반드시 소멸한다, 자연스럽게. 이 끊임없는 변화를 기의 취산(聚散)이라 부를 수도 있겠고, 에너지의 변환 과정이라 할 수도 있겠다. 간단히 ‘생(生)과 변화’의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특정한 유형의 기의 군체, 혹은 에너지의 군체가 생겨났다. 생물이다.
8. 생물에겐 막이 있다. 피부나 껍질, 예컨대 단세포라면 동물의 경우 세포막이고, 식물의 경우 세포벽이다. 그런 막들로 구축된 것이 게나 가재의 갑각이다. 그렇지만 생물들 역시 물질들의 군체고 물질들 간의 상호 작용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분명한 물질들의 바탕 위에 막이 개입한다. 막을 경계로 이쪽과 저쪽이 구별된다. 막 이쪽이 ‘자(自)’고 저쪽이 ‘타(他)’다. 자와 타 간에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벌어지지만, 완전한 평형에는 이르지 않는다. 물질과 에너지의 교환이 막을 거치며 걸러지기 때문이다(가령 삼투). 어떤 건 거르고 어떤 건 흡수해 변형시킨다. 전면적이지 않고 부분적인 이 교환 과정이 지속되는 상태를 살아 있다고 한다. 요컨대 막이 있으면 목숨이 발생한다. 목숨을 지키려 하고, 가능할 때는 더 확장“하려 함”, 이를 생명력이라고도 하고, ‘자기’라고도 하고, ‘코나투스’라고도 하고, ‘항상성’이라고도 하고, 네겐트로피라고도 한다.
9. 그러니까 끊임없이 변한다고만 해서는 우주 만물을 기술하기에 충분치 않다. 끊임없는 변화와 함께 목숨 가진 것들의 독특한 양태들을 함께 생각해줘야 한다. ‘끊임없는 변화’를 생(生)이라고 한다면 ‘자기를 유지하려 함’을 명(命)이라 할 수 있다. 식물들은 바깥 물질을 들여 변형시킨 다음 그중 일부를 내보낸다. 핵심만 말하자면 이산화탄소를 들이쉬고 산소를 내쉰다. 동물은 산소를 들이쉬고 탄소를 내쉰다. 생물은 호흡한다. 흡(吸)하고 호(呼)한다. 한 동물이(당연히 당신도) 제 안에서 생성된 이산화탄소를 내쉬다가 도중에 거두는 경우가 있다. 숨을 거둔 것, 죽은 것이다. 머지않아 막은 점점 더 많은 구멍이 점점 더 크게 뚫린다. 평소의 부분적 교환 과정이 가속적으로 에너지-물질 교환과정으로 바뀐다. 죽음을 넘어, 무생물로 해체되는 것이다.
10.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두 물질이다. 어떤 물질체는 생물로, 어떤 물질(체)은 무생물로 활동하는 것이다. 생물은 목숨에 의해 한정되는데 그 한정되는 방식은 다채롭기 그지 없다. 목숨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 무생물들, 그리고 무생물로 이루어지되 목숨에 의해 한정되는 생물들. 이들이 생과 명의 활발한 군무(群舞)를 추는 곳, 그곳을 우주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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