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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의 안무학: 움직임의 해부와 해석 / 김보슬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4일


- 2023년 여름 서울에서 만난 국제라반키네토그래피협의회 -


언제부터인가 거리를 걷을 때 사람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본다. 뒷모습에서 저마다의 나이를 느낀다. 연령을 특정하지 않는 차림새. 누구에게나 어울림 직한 배낭을 메고, 청바지를 입고, 우산을 들고 걷는 평범한 뒷모습만을 보고 그가 스물다섯일지 서른다섯일지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같은 움직임이라도 그것을 취하는 사람이 어린이인지, 청년이나 중년인지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는 게 어느 안무가의 말이었다. 일상적 움직임에서의 작은 차이가 그에게 춤 창작의 실마리를 제공하곤 했다. 움직임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비단 나와 타인 사이에서 다를 뿐 아니라 어제와 오늘의 나 사이에서 다르고, 달라지는 즉시 사라진다.


고도의 집중력이라든지, 소매틱 훈련 메소드라든지 하는 데에 기대지 않고 나의 움직임을 자각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자각하지 않으면 움직임은 신체를 관통해 흘러갈 뿐이다. 어떤 이의 안무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정해진 러닝타임, 가령 0분 0초부터 55분 32초까지 매 순간 모든 움직임의 모음." 이 정의는 모든 움직임에 잠재적으로 예술적 가치가 깃들어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한 동작 한 동작이 어떤 작품의 일부다.


하지만 시시각각 신체를 관통하는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포착한다고 해도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신체를 빌어 공연되고 반복되는 작품이라면 제삼자가 알아볼 수 있는 객관적 양식으로 기록 가능할까? 기록으로 남은 것은 어떻게 다시 춤으로 해석, 소생, 재현될까?


이러한 물음들의 중심에서 떠오르는 사람은 20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현대무용가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 1879~1958)이다. 그는 춤을 학문의 반열에 올리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국제라반키네토그래피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Kinetography Laban, 이하 ICKL)는 라반의 학문적 기여를 다양한 춤과 신체언어에 적용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후학들 간의 교류를 꾀하기 위해 1959년 영국에서 결성된 단체이다. 결성 이래 현재까지 세계 각국에서 학술모임을 이어온 이들은 지난 7월 서울에서 제33회 국제학술회의를 가졌다.


[사진 1. 루돌프 라반이 1929년경 자신의 표기법을 발표하는 모습]

ICKL은 그 단체명에 라반의 이름 (‘L’)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의 정체성과 활동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라반이 생전에 이루었던 업적을 조금이라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의 피상적인 이해를 거칠게나마 요약해 본다. 라반은 1900년대 초중반 유럽과 영국에서 무용가로 활동했다. 그는 춤추거나 창작하는 대상으로서의 춤을 기록과 해석의 대상으로 확장하고 재정립했다. 요즘에는 영상 촬영이 보편화돼 있어 움직임을 기록하기 쉽지만, 비디오그래피가 드물었던 당시에 이것은 매우 도전적인 영역이었다. 흘러가는 시간 예술을 객관적인 체계 안에 남기고 고정시키는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음악은 악보가 아닐진대 기록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과 전승은 무한한 변용과 재창조를 유발한다. 나와 타인 사이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서 새로운 창작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하여 영감을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기록은 인류의 여러 세대에 걸쳐 힘을 얻고 또 발휘했다.


이야기를 글자로 전하고 음악을 악보로 기록하듯 춤을 성문화하려는 시도 역시 빈번했다. 이것은 라반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많은 예술가와 이론가들 또한 공유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라반은 “20세기 초 유럽 전반을 강타한 모더니즘의 거대 담론 속에서 보편적 움직임 개념을 통해 춤의 지평을 넓혀” 나갔던 것이다 (심경은, 2023). 라반의 움직임 연구는 오늘날 무보의 근간을 이루어 무용 역사 패러다임에 강렬한 족적을 남겼다. 무용 기록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는 유럽의 경우 ‘키네토그래피 라반(Kinetography Laban)’ 혹은 ‘라반 키네토그래피(Laban Kinetography)’로 굳어졌다. 미국식에서는 라반의 기보법이라는 의미에서 ‘라반노테이션(Labanoation)’이 통용되는 추세다. (이것을 한국에서는 소리나는 그대로 ‘라바노테이션’으로 적기도 한다.)

[사진 2. 베네쉬 (Benesh) 무보, 출처_캐나다 Royal Academy of Dance / ca.royalacademyofdance.org]
[사진 3. 라반의 <슈라이프트탄츠 (Schrifttanz, 1928)>의 한 페이지]

[사진 4. 라반노테이션의 예]

그의 안무학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코루틱스 (choreutics), 코레오그래피 (choreography), 코레올로지 (choreology)가 그것이다. 첫째, 코루틱스는 움직임과 그것의 발생 조건인 공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둘 간의 상호작용으로서의 움직임 질서를 탐색하는 영역이다. 둘째, 코레오그래피는 명칭에서 드러나는 그대로 (“-graphy”) 동작이 2차원 그림이나 문자로 옮겨졌다가 다시 3차원 동작으로 펼쳐지는 춤의 도식화 및 움직임의 재현 과정이다. 셋째, 코레올로지는 춤도 통사적 구조를 가진 일종의 언어라고 보아 그것이 가진 기호성에 접근하여 논리적/언어적 춤의 원리를 밝히려는 시도이다. 이렇듯 그의 관심은 움직임의 문법, 움직임의 공간, 재료, 그리고 그것의 기록과 해석을 넘나들었다. 무용가가 되기 이전에 건축학도였던 라반의 이력을 생각하면 이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맥락이다. 오늘날의 안무학이 무용 기록에 치우쳐파악되는 경향이 있으나 20세기 라반에 의해 촉발되었던 안무학의 기원은 움직임 과학 전체를 아우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최근 몇십 년 사이에 급속도로 발전하며 꾸준히 관심을 모으는 소매틱 메소드 역시 라반의 움직임 이론과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할 수 있다.


ICKL의 제33회 국제학술회의는 2023년 7월 17일부터 22일까지 세종대학교 대양AI센터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격년으로 이루어지는 이 대회는 COVID-19 중 한 해 미루어진 관계로 작년에 라반의 고향 헝가리에서 제32회를 개최한 바 있다. 올해는 많은 무용 연구자들을 배출하고 있는 한국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스, 대만, 독일, 미국, 이스라엘, 프랑스, 한국 등 12개국에서 총 43명의 참가자들이 모였다. 5박 6일간의 공식일정은 모두 18개의 학술연구 발표, 6회의 테크니컬 세션, 5회의 워크숍 발표 등으로 이루어졌고, 여기에 무용공연과 마스터클라스와 같은 부대행사가 더해져 더욱 풍성하게 진행됐다.


[사진 5. ICKL 제33회 국제학술회의 포스터]

[사진 6. 학술발표 현장]

학술발표에서는 라반 키네토그래피의 역사와 교육, 실제 작품에서의 해석 방법, 춤 동작 및 호흡 표현에서의 무보 적용 등 각국 참여자들이 자신이 속한 무용 현장을 반영하는 이론적 주제를 다루었다. 한편 테크니컬 세션과 워크숍에서는 연구자와 청중이 함께 춤을 추어 보고 거기에 마땅한 기록법을 살피고 토론하는 실습 및 질의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파리국립고등음악무용원 (Conservatoire National Supérieur de Musique et de Danse de Paris)에서 20년 이상 라반 키네토그래피를 가르쳐 온 노엘 시모네 (Noëlle Simonet)는 미니멀리스트 안무가 앤디 드 그롸트 (Andy de Groat)의 작품인 <Red Notes>의 무보를 소개했다. 이것을 참가자들과 함께 읽고 즉석에서 재현한 그의 시도는 까다로운 작업이었음에도 각기 다른 해석을 실시간으로 마주한다는 의미가 있었고, 적극적인 청중의 관심이 학술적 자극으로 이어져 성공적이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한국의 연구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이자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처용무를 가지고 나왔다. 기록 매체별 특징에 의해 상이하게 해석되고 표현되는 처용무 무보를 비교한 사례였는데, 이론적 연구 결과와 더불어 전문 퍼포머의 작품 시연이 함께 선보여 발표의 생생함을 더했다. 텍스트와 이미지, 라반 키네토그래피 등 다양한 기록이 한국의 전통춤을 어떻게 보존하고 되살릴지에 관한 가능성, 그리고 서로 다른 기록매체가 발생시키는 차이에 관한 함의를 살펴보는 기회였다.



[사진 7. 처용무 기보에 관한 학술발표 중 시연 장면]

[사진 8. 발표자와 청중이 함께하는 테크니컬 세션]

[사진 9. 워크숍 한 장면]

동작분석 전문가인 주디 반 자일(Judy Van Zile) 하와이대학교 명예교수도 이번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라반의 제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전수받은 세대에서 생존해 있는 거의 마지막 연구자라고 할 수 있다. 처용무, 춘앵전, 진주검무, 굿춤 등 한국의 전통춤을 대상으로 춤의 표기에 접근한 논문을 다수 발표한 그는 이번 참가에서 새롭게 느낀 ICKL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제는 라반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임이라기보다 다양한 응용학문과 이론을 수용하는 모임으로 꾸준히 변화해” 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가 받은 느낌은 한국에서, 또한 전 세계에서 진행 중인 예술 매체의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1980~1990년대 대학 무용과 및 체육교육과를 중심으로 라반 키네토그래피 동작 기록법이 교육되기 시작하여 한때 활발한 연구로 이어졌다고 한다. 현재 교육적 입지는 과거에 비해 좁아졌으나 뉴 미디어 아트와 기술 기반의 예술창작은 라반 키네토그래피에도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다. 뉴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움직임 분석 체계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기록이 만드는 가치를 상기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디지털 아카이빙을 촉발하고 있다. 라반의 움직임 분석이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응한다면 안무학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사진 10. 로봇 학습을 위한 라반 키네토그래피 기반의 동작 설명]

라반이 살아있던 시기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지배가 약화되고 전체론적 세계관이 점점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때였다. 과학에서는 뉴턴의 고전물리학보다 데이비드 봄의 양자역학이 더 많은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라반은 공간 속에 흩어져 있는 움직임에 기호와 질서를 매기고, 기계적 기록의 (mechanize to transcribe) 기틀을 마련했다. 라바노테이션은 전형적인 데카르트적 공간과 축 (axis)에 의해 구축되었다. 그러나 이 체계는 놀랍게도 현대 뇌과학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알아차림 훈련이나 고유감각 훈련을 받아들이는 데에 무척 유용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라반 그 자신은 기계론적 세계에 속해 있었으면서 전체론적 세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치 양쪽 세계 사이의 이주자와 같이 과거의 기계론적 언어로 소통하며 동시에 미래의 전체론적 시선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움직임과 공간, 기록과 해석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했다. 그의 노력은 그가 살던 시대의 변화하는 문화적 맥락과도 깊이 어우러져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정립한 라반 키네토그래피가 다시 한번 현재와 미래의 예술 사이에서 다리가 되어줄 것을 기대해 본다.


[사진 11. 행사 참여자들]

* 행사는 국제라반키네토그래피협의회와 한국무용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하였다.

* 이 글은 「춤과의 공진화(共進化): 안무학 콘텍스트에 대한 비평적 소고」 (심경은, 2023, 『문화예술융합연구』 , 4(1), 57-66)와 33rd ICKL Conference Biennial 자료집을 참조하였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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