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의 시선, 우리의 공감
최근 한 미국인이 공개한 유튜브 동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한국을 지목한 내용이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은 뜨거웠다. 해당 유튜브 동영상에 달린 댓글은 8,000개를 넘어갔고, 그 내용을 다룬 언론 보도들도 잇따랐다. 물론 문제의 원인을 유교주의로 바라보는 서양인의 시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분석한 ‘소름 돋는’ 설명이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동영상에 달린 많은 댓글도 놀랍도록 정확한 ‘팩폭’이라는 감상을 쏟아냈다. 우리 사회를 분석한 서양인의 시선,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또 공감하고 있었다.
19세기 서양인 방문객의 조선 구경
한국을 분석한 서양인의 글은 19세기에도 존재했다. 개항 이후 다수의 서양인이 여행이나 취재, 조선 정부의 고용인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들은 자신이 듣고, 보고, 경험한 조선을 저마다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서양인 기록들은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로 유명한 영국인 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1894년 한국을 여행하다가 한 조선 고위관료의 호화주택에 초대받아 갔을 때의 이야기다. 집주인은 장구와 피리 소리가 나는 공연이 벌어지는 가운데 비숍 일행에게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며 예의를 갖추고 환대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비숍의 평가는 냉정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신기해하는 조선 여성들이 누구 할 것 없이 예의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주택 내부에 갖춰진 서양 물건들-프랑스식 시계, 독일식 거울, 외국산 탁자 등-에 대해서는 돈으로 바른 저속함이 보인다고 혹평했다. 조선인 집주인은 자신을 방문한 서양인에게 외국산 시가를 피우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비숍은 그에게 시가를 한국의 긴 담뱃대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비숍이 조선의 호화주택에서 보고 싶어 한 것은 서양인의 상상 속에 있는 동양의 이국적 모습이었다. 조선은 그들이 설정해 놓은 틀 속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비숍을 둘러싼 현지 여성들은 문명인의 매너를 갖추지 못한 야만의 존재여야 했다. 당대 조선 상류층이 유연한 태도로 받아들였던 서양의 물품은 돈으로 처바른 천박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유럽인이 찍은 사진의 프레임에는 그들에게 지극히 이국적인 것, 즉 조선의 전통 물건을 두른 조선인이 들어있어야 했다. 그렇게 서양인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조선을 조각하고 있었다.
편견의 공고한 틀도 직접 본 것의 강렬함을 이길 수는 없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시대, 스스로를 ‘문명’으로 규정한 서양은 조선을 ‘야만’으로 설정했다.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도 그 편견의 공고한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들의 기본 인식에서 조선은 ‘미개’와 ‘야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 그 서양인들이 우리를 기록한 모습이 모두 틀렸을까? 그 시절 많은 서양인이 각기 다른 시점, 다른 배경을 바탕으로 조선을 경험했지만 그들의 기록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기존의 편견과 직접 경험한 것의 차이가 낳은 서술의 모순이다.
서양인들은 조선인을 게으른 야만인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왜 조선인이 게으를 수 있었는지 그 문화적 이유에 대해서도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들은 서로 필요가 있을 땐 언제든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상부상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농사를 지을 때는 농기구라든가 일손을 빌려주고, 화재나 홍수 피해를 입었을 경우엔 재물을 보조해 주며, 결혼이라든가 잔치, 장례식이 있을 때는 종류를 가리지 않는 지원을 서로가 경쟁적으로 해준다. 이러한 관습은 조선인 전체를 대단한 결속력으로 뭉치게 해주고, 마치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가족처럼 보이게 만들어준다.”
[샤를 바라, Deux Voyage en Corée (성귀수 역, 『조선기행』, 2001, 눈빛)]
그들은 조선에서 필요할 때는 함께 돕고 도움받을 수 있는 사회구조가 탄탄하게 마련되어 있었음을 증언했다. 누구나 공동체의 강고한 일원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때로는 느긋한 일상을 즐기더라도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았던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조선 사회의 강력한 도덕성, 그리고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특성을 정확히 간파했다.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1901~1978)는 인류 문명의 첫 증거로 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있는 인간의 넓적다리뼈를 들었다. 야만의 세계였다면 생존하기 어려웠을 낙오된 존재를 돌봐준 흔적, 그것을 문명의 시작으로 본 것이다. 조선은 그들의 시각으로도 문명을 이미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 그 서양인들의 기록은 조선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만 곳곳에는 조선이 이룩한 문명의 실체 또한 강하게 묻어 있었다.
그들이 발견한 우리, 그 오해 속 진실
19세기 서양인의 기록은 흥미롭다. 그들의 기록을 읽다 보면 때로는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 어이없어 실소가 나온다. 또, 어떤 대목에서는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에 놀라기도 한다. 그런데 그때 그들의 시각이 지금 우리가 19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잠시 멍해진다. 우리 사회가 아주 오랫동안 서양인의 잣대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지나친 걸까?
어쨌든 제국주의 시대 서양인들은 그 강고한 편견의 틈에서도 우리의 진짜 모습을 한 토막씩은 발견해 냈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의 시각에서 우리 문명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찾아내 볼 시점이 되었다. 그러한 노력이 쌓인 후 발견될 우리 문명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한보람(대전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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