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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그 태도에 관하여: 협동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 김병준

1. 융합형 인재, 보이지 않는 유니콘


전국 각지의 인문대학에서 디지털인문학(이하 DH) ‘열풍’이 불면서 디지털인문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채용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하지만 뽑는 사람도 지원하는 사람도 DH를 연구하고 교육할 때 가장 중요한 자질을 오해한다. 특히 뽑는 처지에서는 인문학을 전공했고, 데이터도 알아야 하고, 프로그래밍도 할 줄 알고 인공지능 알고리즘도 만들 줄 아는 융합형 인재를 원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런 존재는 없으며, 있다면 상상 속의 동물 유니콘일 것이다.


DH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디까지 범위를 정해야 할지 아직 논란이 있지만 홍콩대 차주항 (Javier Cha)의 첫 번째 정의를 빌리자면1) DH는 “기존 인쇄 중심인 인문학 자료를 전산화하여 디지털 매체로 정리를 하거나 데이터 사이언스 분석을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으려는 학문”이다. 디지털과 데이터 사이언스가 포함돼 있으나 DH 역시 인문학이며2) 새로운 방법론이 인문학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전가의 보도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여러 대학에서는 DH를 뭔가 특별한 것, 그리고 세부 학문분과로만 보고 DH 담당 연구자를 뽑으면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전통적인 인문학 연구자들이 DH를 특정 도메인 지식(Domain Knowledge)으로만 국한해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DH를 전공 및 연구 분야라고 소개하지만, DH만을 혼자 따로 떼어 공부하지 않으며, 내 연구와 교육은 늘 전통적인 인문학 연구자들과의 협업에서 발현된다.



2. Oxford DH 여름학교에서 느낀 점


나는 지난 2022년 7월에 영국 Oxford 대학교에서 열린 DH 여름학교(Digital Humanities Summer School at Oxford –DHOxSS2022)3)에 참여하였다. DH 여름학교는 2008년 TEI(Text Encoding Initiative) 여름학교로 시작해 벌써 10회가 넘게 매년 여름에 운영 중인 교육 프로그램이다. 5일간 전일제로 운영되는 학교로 DH에 관심이 있는 모든 연구자와 학생, 도서관/박물관 직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다. DH 여름학교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경계가 없는 교육’이다. 여름학교의 공동 책임자인 David De Roure는 컴퓨터 공학자이자 앨런 튜링 연구소의 펠로우이기도 할 정도로 인공지능 전문가이다. 공학을 전공한 교수가 “What is Digital Humanities?”라는 주제로 여름학교의 첫 기조연설을 맡을 정도로 DH는 이미 인문학 연구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4) 또한 여름학교에서 소개하는 여러 연구사례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데이터 과학자를 고용하거나 용역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두 연구 집단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연구를 이해한 상태에서 협동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DH 여름학교가 열린 Oxford Keble College


DH 여름학교 책임자 David De Roure 교수의 키노트

3. 앨런 튜링 연구소


인문학과 데이터 사이언스 연구 그룹


나는 이렇게 인문학자와 데이터 과학자 사이에 적극적인 협동이 이뤄질 수 있는 영국 DH의 원동력이 궁금했다. 경계를 허무는 협동의 배경에는 앨런 튜링 연구소(The Alan Turing Institute)의 <인문학과 데이터 사이언스 그룹(Humanities and data science)>5)이 있었다. DH 여름학교의 David 교수도 참여 중인 이 연구 그룹의 목적은 데이터 기반의 인문학 연구와 교육이다. 해당 연구소 참여 인력이 겪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기반으로 만든 백서가 있는데 해당 백서6)에서 가장 중요한 일곱 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Methodological frameworks and epistemic cultures. 인문학과 데이터 사이언스 사이에 공동의 방법론적 틀을 만들고 연구 성과에 이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2) Best practices in the use and evaluation of computational tools. 실용적으로 연구에 활용할 수 있게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정량적인 분석 도구를 데이터 과학자와 인문학자 사이의 논의를 통해 평가한다.

3) Reproducible and open research. 연구의 재현 가능성 확보와 연구에 활용된 데이터, 코드, 연구 환경 등 모든 요소를 공개한다.

4) Technical infrastructure. 지속 가능한 연구를 위해서는 디지털 자원을 계속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이 필요하다.

5) Funding policy and research assessment. 인문학자와 데이터 과학자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투자하고, 연구 평가는 학제 간 연구의 기준으로 이뤄져야 한다.

6) Training, education, and expertise. 대학의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정량적인 방법론을 교육하고, 반대로 이공계 연구자들은 인문학 연구자들과 협동하며 훈련한다. 이를 위해 학계 및 기업의 인턴십 등 여러 분야의 교육과정이 이뤄져야 한다.

7) Career, development, and teams. 고도의 학제 간 연구라는 맥락에서 학생이나 연구자들에게 다양한 직업 경로와 모델을 권장한다.


4. 협동과 공개


결국 DH 연구와 교육을 위한 일곱 가지 팁을 한마디로 말하면 협동과 공개이다. 주로 단독 연구로만 이뤄지던 인문학 연구를 공동 연구로 바꾸고, 모든 연구 과정을 공개하는 것이다. 이미 자연과학이나 공학 연구에서는 이러한 방향으로 연구가 대형화되고 있으며, 사회과학 연구 역시 이 추세로 흘러가는 중이다. 맨 처음에 언급했던 ‘유니콘’ 같은 융합형 인재가 DH 학계에 등장하더라도, 그 사람 혼자 DH 연구를 절대로 진행할 수 없을 것이다. DH는 존재 자체가 학제 간 연구를 배태하고 있고, 유니콘 혼자 진행한 연구를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인문학자들에게는 어색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DH로의 이행은 이미 시작되었고7), DH 연구와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협동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뿐이다. 협동할 것인가 혹은 협동하지 않고 여기서 멈출 것인가.


1) 차주항.(2020).빅데이터와 인문학의 미래. 문명과 경계, (3), 45쪽.

2) 해당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논문 참고(유인태. (2020). 디지털 인문학은 인문학이다. 인문논총, 77(3), 365-407.)

4) DH 여름학교의 자세한 프로그램 이야기는 필자의 유튜브(<월간 디지털인문학>)에 공개

6) McGillivray, B. et al. (2020). The challenges and prospects of the intersection of humanities and data science: A White Paper from The Alan Turing Institute (Version 5). figshare. https://doi.org/10.6084/m9.figshare .12732164.v5

7) DH가 단순 유행인지 아니면 앞으로 인문학 연구를 바꿀 중요한 분기점이 될지는 논란거리다. 앞으로 이에 관해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할 예정이다.



김병준(디지털인문학자, 카이스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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