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응답: 나무에 대한 찬미 / 김동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나무가 좋다. 그냥 좋다. 여유가 생겨(코로나19가 사회적 대면접촉을 불허하면서 생긴 여유) 그 이유를 찾아보다가, 기억에 각인된 몇 그루의 나무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중 하나는 늘씬한 미루나무다. 유년기 시골집 근처에 있던 어마어마하게 큰 미루나무였다. 나무 꼭대기에 비행기가 걸릴 것만 같아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게 했던 생명체다. 그건 당연히 꼬맹이의 착시 환영일 테다.


하지만 이후 나무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살아 있는 물체, 그래서 수직으로 솟아 하늘과 접속된 경이의 초월대상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어느덧 아빠가 되어 아이들에게 처음 가르쳐 주었던 동요에도 미루나무가 등장한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 놓고 갔어요.” (<흰구름>, 박목월 작사, 1절)

또 당시 내가 살던 마을과 이웃 마을 사이에는 폐가가 한 채가 있었는데 그 집 옆에는 속이 빈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텅 빈 공간에 어린아이 서넛은 족히 들어가고도 남았으니 꽤 큰 허리를 가진 나무라고 할 수 있을 게다. 허리둘레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아마 수령이 몇 백 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 나무는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폐가 옆의 나무는 스산하고 쓸쓸하면서 신령스런 분위기를 연출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그 나무 주변에서 자주 굿판을 벌였다. 그래서인지 나무가 살아 있는 신처럼 느껴졌고, 나무 어딘가에 귀신이 숨어있으리라고 상상했다. 아마 새마을 운동이 끝날 무렵에, 마을 어른들이 보기 흉하다며 그 나무를 잘라냈다. 그때 처음 신의 죽음을 목도했고, 나는 손쉽게 계몽의 정신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보았던 작은 버드나무도 자주 기억나는 나무다. 사실 그렇게 볼품 있는 나무는 아니었다. 당시 내가 거주했던 동네 뒷산에 꽤 유명한 산책로가 있었다. 거의 10km가 넘는 산책로에 잘 자란 나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수십 미터의 곧은 나무들이 숲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그런데 그 숲을 지나서 한참을 가다 보면 작은 언덕이 나오는데 잔디와 풀로 덮힌 언덕 꼭대기에 작은 버드나무 몇 그루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바람에 치렁한 가지들이 흔들리고 있는 언덕 위의 작은 나무를 상상해 보라! 종종 그 나무 밑 그늘 아래에서 단잠을 자곤 했다. 어딜 가나 불편한 이국땅에서 그 나무는 내게 제일 편한 수면과 휴식을 제공해 주었다. 나무에 기대어, 나무 그늘의 비호를 받으며 잠드는 것보다 행복한 것이 있을까? 때로는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기대어 내게 쏟아지는 온갖 무게를 잊고 싶을 때가 있다. 이처럼 나무는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친구다. 말없이 위무해 주는 친구.



기억해달라며 떠오르는 나무들은 많지만, 마지막으로 소개하고픈 친구는 은행나무다. 군대를 제대해 막 대학원 복학하고 한동안 정신없이 보낼 때였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읽곤 했는데, 도서관 건물 사이 사이에 작은 정원이 있었다. 그 정원에는 다섯 그루의 은행나무와 몇 그루의 장미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화초들이 오밀조밀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부족한 독일어 독해 실력으로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씨름하고 있었다. 번역과 해석에 실패하고 자괴감에 잠겨 정원 쪽을 바라보는데 그만 숨이 턱 막혔다. 엄청난 물체, 압도적인 존재가 나를 엄습했던 것이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거대한 물결이 해일이 되어 내게 밀려들었다. 그 짜릿하고 행복한 당혹감이란!


가을날 해질녘이었다. 오층 건물보다 키가 큰 다섯 은행나무가 황금빛 비늘갑옷을 입고 살랑이는 바람에 잔가지를 움직이며 내게 다가왔다. 느낌으론 실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아름다움에 대한 칸트의 사변으로 풀 수 없던 수수께끼였다. 반성적 판단과 취미 판단, 숭고 체험에 대한 칸트의 언급을 모조리 뒤져보아도 시원찮다는 느낌만 남았다. 막 일어났던 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단순한 착시 현상도 아니었고, 요사스런 감정의 폭발도 아니었다. 무엇이었을까? 나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정원에 서 있다.

‘은행나무는 생김새가 피라미드 형으로 둥그런 기둥처럼 생긴 줄기에 가지가 많이 달리지 않으며 키 30m, 지름 2,5m까지 자란다’라는 식물도감에 나오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말 내가 본 은행나무가 이런 것이었던가? 아니다. 나무에 대한 이런 관찰은 피상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턱없이 부족한 설명이다. 그런 설명 방식은 대상을 인식적 편의를 위해서, 그리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안된 분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시인의 말을 경청하는 게 더 낫다. 정현종 시인은 「나무에 깃들여」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나무들은/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깃든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나무는 바람과 새들과 작은 곤충들이 거주하고 노는 곳이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숨쉬는 공기의 제작소이며, 하늘에 닿기 위해 상승하기 위해, 끊임없이 침잠하고 하강하는 생명체이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한다. 나무가 없다면, 온갖 새들과 곤충, 인간 등이 어떻게 깃들어 쉴 수 있겠는가? 쉬지 않고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바람과 구름이, 해와 별마저, 나뭇가지에 잠시 머무르다 간다. 이런 의미로 나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적 신으로 표현했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와 유사하다. 시인의 말처럼 나무는 존재의 ‘집’인 우주(宇宙) 그 자체다.



형이상학적 사변과 시적인 상상에만 의존한 감이 있어서, 고생물학적 접근을 해 본다. 인간은 불을 사용하면서 막대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불에 고기를 구워 이전보다 많은 영양소를 뇌에 공급할 수 있었고, 장작불을 피워 털이 없이도(전신 탈모는 오래달리기를 잘 할 수 있어 사냥의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겨울을 날 수 있었고, 산업혁명기부터는 발전기를 돌려 거대한 에너지를 수족처럼 사용하여 테크놀로지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불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나무를 태워 만들어진 것이다. 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태양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는 대표적인 생명체이며,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불은 나무에 싸여 인간에게 전달된 태양 에너지다. 한때 지구에 과도하게 나무들이 번성했던 적이 있었고(석탄기), 그때 썩지 못한 채 쌓인 나무의 사체들이 화석 원료인 석탄과 석유가 되었다. 결국 현재와 같은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무로부터 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과학적인 맥락에서도 나무 덕에 인간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날 은행나무가 성큼 다가왔던 것을 나무가 내게 말을 건넨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당연히 나무는 침묵의 언어를 구사한다. 이 글은 나무의 과거 발신(發信)들에 대한 응답이다. 너무 뒤늦은 응답이다. 이마저도 코로나19 덕분이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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