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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국가의 새로운 탄생 / 노관범

작성자 사진: 한국연구원한국연구원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국이라 했다. 오늘날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보면 동쪽에 있으니 동국이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옛날에는 중국 대륙에서 바다 건너 동쪽에 있다는 방향 감각이 우세했다. 『반계수록』으로 유명한 조선 지식인 유형원은 『동국지리지』의 총서에서 동국의 위치를 중국의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동쪽으로 나타냈다. 청주와 서주는 대략 선진(先秦) 시기에는 제나라와 오나라, 명청 이후에는 산동성과 강소성이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유비는 도겸에게 서주를 물려받고 한 때 이 지역을 지배했다. 그 때 그는 바다 건너 동쪽 사람들 소식을 들었을까? 후한 말기 사람 유비와 그다지 멀지 않은 전한 말기 사람 양웅은 『방언』을 편찬했다. 이 책은 중국 각 지방의 방언을 기재했는데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조선’과 ‘열수’ 방언도 포함되어 있다. 한대의 군현제 질서를 배경으로 유입된 언어 지리 정보에서 조선 방언과 열수 방언이 구별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양웅이 알고 있는 조선 방언을 유비도 알 수 있었을까?

     

동방의 나라 조선. 우리나라 역사책에서 이런 생각은 낯설지 않았다. 조선 세조의 의지로 착수되어 조선 성종 치세에 간행된 역사서 『동국통감』은 동방과 조선의 관계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나타냈다. 동방에는 본래 임금이 없었는데 신인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자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받들어 나라를 세웠으니 그 임금이 단군이고 그 나라가 조선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구절을 읽으면 단군과 조선에 제일 먼저 눈길이 가겠지만 사실은 단군과 조선보다 더 먼저 나타나는 이름이 동방이다. 처음에 동방 사람들이 살았고 나중에 단군 조선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단군 조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방이다. 동방은 단군 조선 이야기가 생성되기 이전에 시원적으로 존재했던 자아 의식일까, 아니면 단군 조선 이야기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개입한 후대의 서사 질서일까?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문헌이 고려말기 서운관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전해지는 예언 비기이다. 권근이 지은 건원릉의 비문은 조선 개국을 논하면서 이 예언 비기를 소개했는데, 이에 따르면 이 비기 곧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 진단의 아홉 차례 변화를 그린 그림)’에 적힌 ‘건목득자(建木得子)’는 지리산 암석에 새겨진 글씨 ‘목자갱정삼한(木子更定三韓)’과 함께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오래 전부터 예언한 것이었다. 인상적인 점은 권근에게 조선 개국이란 ‘조선이 곧 진단’이라는 수천 년 전설이 드디어 입증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전설에 두 가지 층위의 의식이 결부되어 있을 수 있음을 가리킨다. 하나는 옛 조선을 진단으로 간주했을지 모르는 오랜 의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새 조선을 진단으로 수식하고자 하는 새로운 의식. 진단과 조선의 얽힘은 정확히 언제 일어난 것일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진단'에 대한 설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고려의 비기에 보인다는 ‘진단(震檀)’이 고려 이전의 역사를 향해 얼마나 멀리 소급될 수 있는 개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원종 당시 강화도 삼랑성에 가궐(假闕)을 짓고 도량(道場)을 베풀면 삼한(三韓)이 진단(震旦)으로 변하고 대국이 내조(來朝)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보이는 진단은 글자의 내력이 있다. 이것은 범어(梵語)로 동방이라는 뜻인데 인도에서 중국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조선이 곧 진단(震檀)’이라는 말이나 ‘삼한이 진단(震旦)으로 변한다’라는 말이나 사실 모두 동방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신라 말기 궁예가 세운 나라 이름 마진(摩震)이 곧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줄임말로 마하[大]와 진단[東方]이 결합된 대동방의 뜻을 취하고 있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미 신라 말기에 대동방의 꿈이 피어났다면 그 이전부터 동방이 뚜렷한 관념을 안고 정착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근에는 궁예의 마진은 마니진단(摩尼震旦)의 줄임말이며 마니진단은 동방 정토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논고가 제출되었다.)

     

진단과 함께 한국사의 동방 개념을 읽어낼 중요한 키워드로 ‘해동’(海東)이 있다. 해동은 백제 국왕 의자왕에게 ‘해동증자’의 칭호가 있었고 고려 유학자 최충에게 ‘해동공자’의 칭호가 있었음에서 보듯 오랜 역사를 지닌 말이었다. 발해 선왕이 국가를 중흥하여 ‘해동성국’의 칭호를 듣게 했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고려시대에는 임금도 ‘해동천자’, 화폐도 ‘해동통보’, 이런 식으로 국가 상징성에 관한 어휘에서 해동에 대한 친근감이 강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부식이 고려 인종에게 『삼국사기』를 찬진하는 표문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를 ‘해동 삼국’, 그것도 지시어 이[此]를 사용해서 ‘이 해동삼국’이라 칭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삼국이 단순한 세 나라가 아니라 이미 ‘이 해동삼국’의 동류성을 획득한 상태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해동삼국’은 일찍이 백제 의자왕에게 보낸 당나라 고종의 국서에서도 보이는 표현인데 삼국시대 말기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이미 해동의 삼국으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김부식은 ‘삼국사기’ 대신 ‘해동사기’라는 이름도 생각해 보았을까? 삼국사기가 인용한 역사 기록에는 ‘해동고기(海東古記)’가 있었다.

     

‘해동삼국’의 단계에서 ‘해동’은 일국의 강역을 넘어서는 넓은 동방 세계를 가리킨다. 이것은 국가 개념이 아니라 세계 개념이었고 따라서 그 자체로 국가의 범주에 속하는 동국과는 성격이 다른 어휘였다. 그렇게 볼 때 해동에서 동국으로, 곧 동방 세계에서 동방 국가로의 전환은 한국사에서 흥미로운 연구 주제이다. 전술했지만 신라 말기, 고려 후기, 조선 초기에 보이는 진단이 동방 국가의 개념 형성에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신라 말기 궁예는 처음 신라의 강역 안에서 진단을 표방하는 나라 마진을 세웠고 고려 후기 원종은 궁궐을 새로 영건하면 고려가 진단으로 변화하리라는 예언을 들었으며 조선 초기 권근은 이성계의 건국으로 조선이 곧 진단이라는 수천 년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기록했다. 이런 식으로 한국사의 특정한 국가와 진단이 결부되는 현상이 곧 한국 사상사에서 동방 국가에 관한 의식의 흐름을 설명하는 어떤 열쇠가 아닐까?

     

권근이 말한 ‘조선이 곧 진단’이란 동방 국가 개념의 전개 과정에서 조선의 건국이 중요한 역사적 국면이었을 가능성을 상정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동방에는 처음 임금이 없었는데 단군이 조선을 세웠다는 것. 그리고 조선이 곧 동방이라는 수천 년 예언이 내려오다가 이성계가 다시 조선을 세웠다는 것. 이런 맥락에서 단군은 민족사의 출발보다는 동방사의 시원으로 감각된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지 않을까? 고려 말기 난세에 일어난 조선의 개국은 이제 단군 이후 오래 기다린 동방 국가의 등장으로 기려진다. 동방 국가는 곧 동국이다. 조선 성종 치세에 편찬된 대표적인 국고 문헌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에서 보듯 동국은 국가의 역사와 지리를 표상하는 핵심 개념이다.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면 동방 세계에서 동방 국가로의 여정 속에서 보이는 고려와 조선의 차이점이다. 고려 후기의 예언대로라면 고려는 아직 삼한에 머물러 있고 따라서 아직은 진단 이전의 세상이다. 반면 조선 초기의 기록대로라면 조선이 곧 진단이라는 예언은 이제 실현되었고 따라서 이제는 진단 이후의 세상이다.

     

한국사에서 조선의 개창은 동방 국가의 새로운 탄생이었다. 고려가 삼한을 통합한 국가였다면 조선은 진단을 이룩한 국가였다. ‘조선 즉 진단’의 수천 년 전설에서 본다면 단군 조선 이후 비로소 동방 국가가 수립된 것이었다. 이것은 동국에 해동의 공간적 차원과 함께 진단의 시간적 차원이 있음을 의미한다. 먼훗날 대한매일신보 주필 신채호는 민족 국가의 통시적인 이름으로 동국을 제안했다. 그는 동국의 시간적 차원을 인식했던 역사학자였다.


노관범(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노관범(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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