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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도시는 나무가 아니다 - 한국 지방도시 인테리어에 부쳐 - / 김보슬

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는 근대도시의 인공성, 몰개성과 대비되는 고대도시의 자연발생적 특징들에 주목했다. 그리고 긴 시간을 두고 쌓아온 내적인 본질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갓 그 외형만을 따라 하려는 근대도시들에 그는 비판적이었다.


오랫동안 같은 장소에서 생활하면서 공유된 문화‧역사‧생각‧가치 등이 혈통과 유사하게 계승되는 속성을 공간유전자라고 한다. 지역마다 다를 수 밖에 없는 공간유전자는 공간에 특질을 부여하고 그것의 고유한 이점을 극대화한다. 그리하여 특정 장소에서 거주자가 독특한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것을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장소성이라 보았다. 반대로 어떤 장소가 일정한 활동과 기능만을 허용할 때, 그 폐쇄성은 단조로움을, 더 나아가 장소 상실을 유발한다.


나는 일주일의 절반 가량을 지방 소도시에서, 나머지는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2년 동안의 일터가 집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오도이촌(五都二村)’이라던가. 일주일의 닷새는 도시에서, 이틀은 시골에서 보내는 삶을 선망하는 것이 요즘의 풍조인가 보다. 그러면 나는 삼도사촌(三都四村)쯤 되겠지. 직장 근처에 마련한 출퇴근용 거처는 엄연한 ‘세컨드하우스’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흑해변 휴양지에 다차(дача, 주말 별장)를 둔 삶을 부러워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남불(南佛) 프로방스에서의 여름 휴가를 그리워하며, 이탈리아 사람들은 시칠리아섬에 가지 못해서 안달이다. 같은 이치라면 대한민국은 남도다. 그곳에 세컨드하우스를 가진 나의 삶은 얼마나 호화로운가.


크기가 문제겠는가. 건축가 정기용은 서울 명륜동의 아담한 집에 살면서 일대 궁궐 후원, 명륜당 앞마당, 고목과 낙산과 한옥이 이루는 풍경까지 살뜰하게 즐겼다. 집 안뿐 아니라 집 밖에서도 거주하는 법을 익혔다고 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사는 곳이 집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나의 방’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나의 집은 공용면적을 포함해서 임대 계약상 31평이 아니라 50~100만 평이 넘기 때문이다. 나의 방이 있듯 나는 나만의 정원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은 내 방에서 역시 10분을 걸어가야만 한다. 그곳은 다름이 아닌 성균관, 즉 문묘인 명륜당 앞마당이다. 500년 묵은 은행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 마로니에와 단풍나무가 몇 그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명륜당은 사계절 나의 벗이기도 하다.”(「나의 집은 백만 평」(정기용) 중, 『건축가는 어떤 집에서 살까』, 2005, 서울포럼)

그러니 서울과 지방에 ‘나의 방’을 두 곳이나 두고, 그 사이에 놓인 전 국토를 두루 누리는/누비는 나야말로 아주 큰 집을 가진 셈 아닌가?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해 보려고 애쓰지만 솔직한 사정이 그렇지는 않다. 남도의 처소를 서울의 집만큼이나 어여삐 여기지 못하고 언제나 마음이 한쪽으로만 치우친다. 나는 서울에 두고 온 보금자리로 돌아갈 것을 기다리는, 장소를 상실한 난민으로 남도 일상을 버텨낸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내가 왜 한 주도 어김없이 서울에 돌아가는지 의아해한다. 몸도 피곤하고 비용도 많이 들 텐데 대체 무슨 연유로 꼬박꼬박 그러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여기선 이상하게 내 집에서 자는 것 같지가 않아요. 공사장에서 자는 것 같고…. 정서적 안정을 취하러 올라가게 되네요.”


꾸밈없으려 노력한 이 답변이 아주 정확한 것은 못 된다. 내가 남도에서 장소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해야 타당할 것이다. 과거 이곳을 여행지로만 경험하던 때에는 더없이 낭만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 느꼈던 장소성을 일상 공간으로서의 이곳에 불러들일 수가 없다. 밥을 버는 곳이란 ‘힘들어도 견뎌야만 하는’ 용기와 끈기를 요구하므로, 매일 여행하는 마음으로 지낼 수도, 그렇게 지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일상의 착근지로서의 새로운 장소성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


남도로 돌아온 월요일. 퇴근 후 이발을 위해 어제 들어갔던 미용실은 오직 그 샵의 파사드(façade) 때문에 고른 곳이었다. ‘모던하고 심플하면서 엣지 있는’—디자인 묘사를 위한 흔한 외국어 남용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외관이 유독 눈에 뜨여서 들어가 안쪽도 보고 싶었다. 머리를 맡기고, 원하는 머리 모양을 견본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샵 디자인이 독특한데 혹시 직접 꾸민 것이냐, 묻는 것에서 대화가 시작됐다. 원래 다니는 미용실은 서울에 있다고 했다가, 사실은 외지인이라는 얘기까지 꺼냈다. 미용사는 본인도 서울 출신인데 작년에 결혼하면서 남편 따라 이사를 왔다고. 그 전 10년 동안 홍대 앞에서 미용실을 운영했다고 했다. 또한 내가 요구한 머리 모양을 주문받아서 무척 즐겁다고도 했다.


“이 동네에선 아까 보여주셨던 사진에 곤란해하는 곳도 있을 거예요. 저야 서울에서도 홍대 앞에서 일했으니까, 어땠겠어요? 무수히 다양한 손님들이 다녀갔어요. 여기서는 주문이 늘 엇비슷하다 보니 지루할 때도 있어요. 오히려 오늘처럼 색다른 걸 하게 되면 저도 신나는걸요.”


나는 다른 영역에서 유사한 느낌을 받고 있던 터라, 짐짓 놀랐다. 지방 도시의 인테리어가 어딜 가나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상업공간, 업무공간, 주거공간 할 것 없이 고작 두서너 가지 타입의 유행하는 조명기, 전구, 문틀, 문고리들, 재료와 기법 때문에 어디를 가도 쉽게 질리고, 키치하다는 인상이 들기 일쑤였다. 그리고—나의 다른 글에서도 주장한 대로—도시의 얼굴은 거리 경관이 만들고, 거리 경관은 건물의 표정이 만든다. 건물의 표정은 창문과 문, 문틀과 문고리, 간판 그리고 창문 안으로부터 스며나오는 조명이 만든다. 그러니 작은 단위의 공간 계획인 실내환경디자인은 큰 단위의 공간 계획인 도시디자인이나 지리적 맥락에서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 획일화된 실내공간은 장소성에 기여하지 못하고, 도리어 장소 상실을 가져온다.


그렇지만 지방의 실내환경디자인이 서울에 비해 미진한 탓을 지역의 디자이너와 시공업자들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그들의 미적 안목이 뒤떨어지기 때문이라고만 단순화시킬 수도, 일반화시킬 수도 없다는 것은 약간의 주의만 기울여도 알 수 있다. 멀리까지 가는 유통망을 관리하는 데에는 당연히 높은 비용이 발생한다. 때문에 개성이나 고급화에 요구되는 소수의 부품 수요가 가격경쟁에서 쉽게 밀린다. 외식업을 필두로 하는 프랜차이즈 업계, 그리고 역시 프랜차이즈화된 시공업체들이 유도하는 자재 공급망이 저렴한 단가 유지에서 단연 유리하며, 수요도 공급도 평준화되는 이유는 개인의 안목과 같은 단일한 이유만을 가지지 않는다. 복합적인 이유에서 디자인의 다양성이 제한된다. 헤어디자인을 하는 이 역시 그만의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니, 이해할 만했다. 그도 나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설계 업체에 맡기는 비용을 아끼고 싶어서 샵 디자인을 직접 해 보았는데, 제 생각을 구현하는 재료와 기술자 찾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 저 간판 만드느라 애먹었죠. 기사님이 대체 요새 누가 저런 간판을 하냐고, 이 동네에서 본 적 있냐고 불평을 하시길래, “아무도 안 하는 그 간판, 제가 한 번 해 볼게요.” 하면서까지 유난을 떨어야 했어요. 그리고 지방 도시가 점점 노령화되잖아요. 젊은이들이 오기를 바라고 낸 가게더라도 정작 여기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들이면, 결국은 거기에 맞게, 오는 사람들한테 익숙한 쪽으로 (공간연출이) 재조정되곤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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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공간은 공존의 질서, 즉, 사물이 서로 맺는 관계의 질서다. 공간은 절대적인 대신 관계들의 질서에 배치돼 있다. 마트에서 마주친 담임교사는 친절한 이웃인데 학교에서는 근엄한 지도자인 것처럼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다. 특수한 관계적 질서는 끊임없이 재배치되고 있으며, 이러한 무한변용을 공간의 본질로도 볼 수 있다는 라이프니츠의 혁명적 사고는 르페브르 등의 철학자에게로 계승되다가, 들뢰즈에게서는 주름(le pli) 개념으로 제시됐다. 외적 형태의 존재론적 이면을 주름의 이미지로 개념화한 그는 유기체가 주름적 사고방식에서 끊임없이 변형돼 나감을 조명했다.


이 주름을 장소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영어 번역인 'fold'를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주름'이라는 우리말 번역으로 인해 흔히 피부의 주름이나 헝겁의 드레이프(drape)로부터 실마리를 찾으려 하기 쉬우나, 오히려 ‘종이 접힘’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 유용하지 않을까. 마치 반듯한 도화지가 절반으로, 거기서 다시 절반으로 접혀들어갈 때 일정한 가로‧세로 비율을 유지하면서 다만 그 크기와 두께, 뉘앙스를 달리하는 것처럼 주름을 공간 존재들의 질서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fold'는 네모 반듯한 건물들을 짓더라도 어느 방향에서 보나 뻔한 공간이라기보다 상황에 따라서 용도도, 모양도 다르고, 사람과의 상호작용 차이를 통한 반복이며, 포용이 가능한 접힘일 것이다. 그러한 접힘이 펼쳐지거나 포개지는 모듈들로부터 새로운 조형력과 색다른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유사한 발견을 나뭇가지에서 이끌어냈다. 기술에 의해 무한히 복제되는 도시의 외형 안에서도 한 장소에서 발하는 고유한 상호작용에 주의를 환기시킨 그는 나무의 몸통과 가지가 위계구조로 연결돼 있고, 가지들 간에는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것에서 인공 도시와의 유사성을 도출했다. 그리고 그와는 달리 오랜 시간을 거쳐 유기적으로 발달된 도시에서의 서로 중첩되는 연결의 풍부한 그물망을 '격자구조(semi-lattice)'로 명명했다.




나뭇가지와 격자구조의 차이는 위 그림과 같다. 나뭇가지 구조(b)는 한 점에서 다음 점들로 일방성을 이루며 계속 분기돼 나아가는 동안 시작점에서부터 멀어지기만 한다. 왔던 길을 거슬러 가는 것이 아니라면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격자구조(a)는 어느 점에서도 다방향성을 갖추고 있어서 다양한 경로를 그리며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또 다른 교차점으로 이동할 수 있다. 여러 방향으로의 소통과 연결이 중첩된다. 1965년 에세이 『A City Is Not a Tree』를 발표한 알렉산더는 제목 그대로 도시는 나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시의 격자구조가 어떻게 풍부하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사무실 바깥 약국 앞 신문가판대를 예로 들었다. 그 가판대는 명목상으로는 약국의 일부이지만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필수적인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격자구조는 거주민의 참여를 거치며 수많은 사적 의미를 발생시키는 의미망으로도, 외관상 같지만 제각기 다른 추억과 기대를 만들어내며 무한변용을 일으키는 내적 원리의 접힘으로도 볼 수도 있다. 장소성이란 명목상으로 뻔한 보도블록이 나에게 필수적인 한 순간과 특별한 소속감을 가져다 주는 일임을 이렇게 이해해 본다.


도시는 나무가 아니어야 한다. 내가 집과 타지를 오가는 것도 공간유전자가 회복되는 한, 기계적 왕복인 대신 양극단의 장점을 찾는 방식일 수 있다. 우리네 지방 도시들은, 혹은 당신의 서식지는 어떻게 접혀들어감으로써 장소성을 펼쳐낼 수 있을까?



이 글에 인용된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 관련 내용은 『스마트시티, 더 나은 도시를 만들다』(앤서니 타운센드 저, 도시이론연구모임 역, 2018, 엠아이디)를 일부 참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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