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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대체 숲이 어떻게 생각을? / 박성관

1.

컴터에 구글 번역기를 띄우고 영한번역으로 설정한다. 좌측에 “I don’t know how you think him.”을 친다. 그럼 곧장 우측에 한글 번역문이 뜬다. “나는 당신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자, 이제 화면을 그대로 두고 번역 순서만 한영번역으로 변환시킨다. 좌측에는 “나는 당신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가 뜬다. 좌우측을 바꾸기만 한 셈이니 당연하다. 그런데 우측에 당연하지 않은 일이 생긴다. “I don’t know what you think of him.”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2.

컴퓨터가 생각할 수 있냐고? 그렇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방금 소개한 내용에서 내가 컴퓨터를 통해 생각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컴퓨터가 나를 통해 생각한 것이다. 생각이란, 생각함이란 무엇인가? 기호 변환과정이다. 그러니까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는 은유나 비유가 아니다. 그리고 컴퓨터나 숲도 인간처럼, 인간 못지않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만물이 생각하며, 만물은 저마다 그중 일부 과정을 상이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얽히고 엮이고 또 헤어지고 그런다.


3.

벌이나 개들도 인간 못지않게 향기를 맡는, 그런 게 아니다. 벌과 꽃이 진화 과정에서 향기와 꿀을 공진화시킨 거다. 다만, 인간도 (벌과 같은) 동물이고 (꽃과 같은) 생물이므로 그중 일부를 맡을 수 있는 거다. 가장 높이 쳐줘야 인간은 냄새 지각생인 정도다. 곤충도 인간 못지 않게 보는 게 아니다. 인간은 자외선보다 짧고 적외선보다 긴 파장 대역(즉, 가시 광선 대역)밖에 못 보지만 박각시나방 등 다른 많은 생물들은 자외선 대역까지 보기도 한다.

4.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을 교정해야 한다(생각을 교정하는 걸 생각이라고 한다). ‘인간이 하는 게 생각’이 아니고, 이 세상에 전자기파처럼 넘실대며 흘러가는 기호 과정들, 생각 과정들 중 일부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고 이동하는 것이다. 당신이 폰으로, 컴터로 매일 그러듯이 말이다.

5.

콘은 <숲은 생각한다> 초반에 이미 개가 생각하고, 숲이 생각하고, 잘려 뒹굴고 있는 통나무가 생각한다고 써놓았다. 이게 은유나 비유가 아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저자의 이 말을 믿느냐 아니냐가 전혀 아니다. 생각에 대한 나의 기존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꽝이다. 그렇지만 많은 독자들처럼 나도 별로 그러지 못했었다. “숲이 생각한다... 참 좋은 말이야. 그래 다른 존재들도 다 생각한다고 봐야지. 물론 어느 정도는 비유이기도 하고 그런 거겠지만 말이야”하는 심정으로 읽어갔다. 그게 2년 전 겨울이었다. 그리고 좋았던 기억이 있었기에 올해 1월 ‘21세기 인류학’ 강의 시리즈 2탄의 텍스트를 이 책으로 선정하고 4주 동안 강의를 진행했다. 이전의 내 생각은 1강을 앞두고 급! 바뀌었다. 본문 첫 페이지의 두 문장에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다른 부류의 존재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다른 부류의 존재들이 우리를 본다는 사실이 사태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Eduardo Kohn, <comment pensent les forêts>(2017)에 삽입된 사진

6.

2년 전에 읽었을 때는, 이 문장 중 “....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를 우리를 좋게 보는지, 나쁘게 보는지 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부류의 존재가 나를 어떤 존재(what)라고 보게 되는 것은, 그래서 나를 좋은 사람이나 멋진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전에 그 존재가 나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how) 생각한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우리말에서 ‘생각’이 동사도 되고 명사도 된다는 걸 염두에 두자). 그러니까 이런 표현이 가능하겠다. 한국어 사용자들은 이 과정에 주목하면서 “너 그 사람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는 반면, 영어 사용자들은 그 과정의 결과에 집중하면서 “너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What do you think of him)이라 묻는 것이라고. 실질적으로 동일한 질문을 상이한 양상으로 묻는 셈이다.

7.

우리는 주변 상황(가장 크게는 세계)에 대한 이러저러한 해석을 하고 그걸 바탕으로 이런 저런 선택을 한다. 또 여러 선택들을 함으로써 해석에 변화가 오기도 한다. 이게 간단히 말해서 생각함과 행동함이다. 그런데 콘은, 다른 부류의 존재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우리의 세계 해석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재 인간은 오만과 허영 탓에 자신의 협소한 시야 바깥의 세계를 대부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과 극히 일부 영장류들만이 생각하고, 나머지는 식물처럼 아예 생각을 못하거나 아니면 대부분의 동물이 그렇듯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고 믿지 않는가! 동물이 한심하게 행동하면 ‘역시 짐승들은 하등해’라고 생각하고, 인간보다 뛰어나고 복잡하고 심오한 행동을 하면 ‘역시 짐승들의 본능은 대단해’라고 생각한다.(이처럼 어떤 결과에도 경탄하지 않고 자동 분류하는 행위를 생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다윈이 벌들의 집 건축 과정을 󰡔종의 기원󰡕에서 상술했던 것이다. 그들은 제한된 밀납을 최소로 사용하면서(경제적 존재, 효율을 중시한다), 서로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수많은 벌집의 벽들이 찢어지거나 지나치게 두텁지 않도록(그래서 통풍이 잘 되도록) 집을 만들며(사회적 존재, 협동을 중시한다), 그 결과 극도로 튼튼하고도 실용성 넘치는 건축물을 만든다(기하학적 존재, 구조를 중시한다). 벌은 창조된 게 아니라 진화되었으며, 인간보다 하등한 게 아니라 인간과 다른 부류의 동물이라는 사실. 인간이 벌과는 다른 부류의 동물인 것처럼.

8.

대형서점 매장에서 ‘숲이 생각한다’는 책이 눈에 띄면 대부분은 곧장 시선을 다른 쪽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매우 소수는 ‘어! 저거 무슨 책이지? 흠... 과연 ‘숲도 생각할 수 있다’고 상상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를까’ 하며 흥미를 품으며 표지와 목차 정도는 훑어본다. 후자는 물론 보기 드물고 귀한 태도다. 허나 인간중심주의에서 멀리 벗어난 생각은 못 된다. 흑인들도 생각할 수 있을까 라고 가끔 생각했던 몇 백년 전 백인들과 많이 다른가? 아시아인이나 태평양 제도의 원주민들에게도 과연 종교라는 게, 진리라는 개념이 있을까 의심했던 백인들과는 어떨까? 한편, 여자들은 감성이고 자연이며 남자들은 이성이야, 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남자들도 생물이고 동물인 이상 감성은 기본값이므로, 결국 여자는 감성뿐이고 남자는 ‘감성+이성’이라는 소리다)?

9.

책 앞 부분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잠깐! 숲이 생각한다고?!! 어떻게 그런 걸 주장씩이나 할 수 있냐고? [성실한 인류학자라면] 에콰도르에 사는 현지 부족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숲이 생각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생각은 어떤 것인지, 바로 이 지점까지만 물어야 하지 않냐고? 그와 관련하여 현지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기술하는 선에만 그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도리어 나는 이 책에서 이렇게 도발하겠다. 우리가 숲이 생각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건, 기묘하게 들리겠지만, 숲이 생각한다는 사실의 산물이다. ... 우리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 인간적인 것을 넘어 확장되기 때문이다.”

10.

어!? 여기까지밖에 애기 못했는데, 벌써 글을 끝내야 할 시점이네. 그럼 잠깐 다른 얘기 한 자락 깔고 황급히 마치자.

20여년 전 푸코의 󰡔말과 사물󰡕 세미나에 참가했었는데, 거의 이해를 못하고 그래도 반년인가에 걸쳐 끝까지 읽긴 했다. 인간이 ‘노동+생명+언어’라는 유한성의 존재라는 다이제스트 지식과 몇몇 부스러기 지식들 이외에 무얼 얻었는지조차 불분명한 채. 그러다 5, 6년 전인가, 󰡔말과 사물󰡕 세미나에 또 참가했다. 그때 세세히, 치열하게 읽으면서 그 내용에 놀라고 또 놀랐는데, 마지막 세미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깨달았다, 내가 너무 나무만 보느라(아니 그 밑의 잔풀들을 파고드느라) 책 전체가 까맣게 안 보인다는 걸. 이럴루가! 그래서 그 밤에 곧장 셈나 멤버 중 한 분께 메일을 보냈다. 미친 제안 하나 해볼게요, 제가 이러이러한 처지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는데, 우리 담주부터 이 책 다시 한번 숙독해보면 어떨까요. 그랬더니 그 분 답장이 ‘함께 미쳐보죠, 뭐’였다. 그렇게 재개된 몇 개월 간의 세미나를 통해, 󰡔말과 사물󰡕이 인간의 등장 과정을 그린 서사시만이 아니라 존재론과 인식론을 깊이, 넓게, 지독하게 파고 들어간 작품이라는 걸 사무치게 알았다. 다 읽고 󰡔말과 사물󰡕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지만, 그럼 죽을 거 같았다. 지금도 근처에 안 가려고 늘 조심한다.


Liza Lim: "How Forests Think" (2016) Ensemble Evolution at the Banff Centre for Arts and Creativity


11.

󰡔숲은 생각한다󰡕(원제는 How Forests Think)는 인류학의 에스노그라피 형식을 통해 정신분석학, 인류사 전체, 시를 포함한 문학, 인식론과 존재론 등을 모두, 전부, 깡그리 새롭게 구축한 장대한 책이다(󰡔말과 사물󰡕이 깊이 의거하고 있는 구조주의와 소쉬르 언어학을 강력 비판한다). 󰡔말과 사물󰡕 탐구 때를 뛰어넘는 체험을 내게 안겨주었다. 이 글에서 내가 쓴 것은 그러니까 책의 출발점일 뿐이고 여기서부터 엄청난 이야기들이 도도하게 중층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2년 전에 그랬듯이, 환상 동화집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렇게 읽는다고 해서 오류거나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 독서 체험이 숲의 생각 중 일부일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을 무시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럿이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함께 나누면서 읽는다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럴 때, 숲은 당신들을 통해 생각할 것이고, 당신은 숲의 생각을 당신스럽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게 ‘나’의 생각이고 기호과정이고 체험이고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숲과 더불어.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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