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 배경론에서 연방제까지 흘러간 썰 / 박성관

최종 수정일: 7월 19일

맑스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논하면서, 파리 시민들이 혁명의 어느 단계에서 무기를 정부에 반납한 대목에 주목한 바 있다. 그는 스쳐지나가듯 이렇게 말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근본 모순이고, 따라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혁명의 핵심 과제라는 데 비추어 본다면, 무기라는 인민의 무력을 정부에 양도해버린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정확한 구절은 기억 안 나지만 요점은 대략 그랬다. 아마 미국에서 총기의 폐해가 심각하기 그지없음에도 불구하고, 총기 소유 폐지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국가 내의 크고 작은 공동체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개인에 대해서도 국가가 상전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건국 때부터의 공통 심성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리라.

1. 배경은 병풍이 아니야

회화가 있다. 거기에는 대상들이 있다. 그리고 그 대상들 뒤에는 배경이 있다. 보통은 이 대상들이 주요 관심사고 그러나 못지 않게 배경도 중요하다고들 하는 정도다. 한데 20세기 중반의 어느 비평가에게는 배경이 가장 중요했다. 아니, 배경이야말로 회화라는 장르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그는 맑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서른에 쓴 <아방가르드와 키치>(1939, <빨치산 리뷰>에 게재)라는 글로 잘 알려져 있다.

Clement-Greenberg

그린버그가 말한 배경은 무슨 하늘이나 드넓은 전원, 도시의 빌딩숲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그림이 덧입혀져 있는 화폭(캔버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화폭의 평평함이다. 회화는 기본적으로 2차원 예술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입체감을 살려 대상들을 생생하게 재현하려는 따위의 노력은 회화의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그런 건 회화 말고 다른 장르들이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 짓이다. 이런 발상에서 그는, 회화라는 것이 이 평평함과의 관계 하에서 제작되어야 하고 또 관람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림이 평평함을 모종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 그것이 회화다.

그레이엄 하먼은 2020년작 󰡔Art and Object󰡕에서 그린버그가 배경의 중요성을 예리하게 통찰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반면 배경을 단 하나뿐라고 본 점은 오류라고 비판했다. 배경은 하나일 필요가 없고, 또 그래야 할 근거도 없다. 하먼에 따르면 배경이 여럿이라고 볼 때 작품도, 그 작품에 대한 해석도 더 강력하고 풍부해진다.

2. 배경이야말로 진정한 대상이다!

하먼이 단일 배경론이라며 비판한 타겟에는 그린버그만이 아니라 하이데거와 마셜 매클루언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단일 배경론은 예술, 철학(세계관), 매체론 등에서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담론인 것이다. 이 세 사람에겐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대상(들)보다 그 배경이 훨씬 중요하다. 매클루언을 예로 들자면 텔레비전 드라마나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 있어, 그 프로그램이 좋으냐 아니냐는 부차적이다. 그 프로그램이 실려 나오는 매체, 즉 그것이 TV물이냐, 라디오물이냐가 결정적이다. TV와 라디오는 성격이 상반되는 매체기 때문이다.


Martin Heidegger

하이데거도 비슷한데,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비유로 얘기해보겠다. 가령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신경쓰지 않고 있다. 그건 바로 당신이 지금 처해 있는 바닥이다. 바닥이 없으면 당신은 곧장 바닥 아래로 추락할 것이다. 우리는 당장의 관심사인 전경(前景)에 정신이 팔려,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배경은 보려고도, 의식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든, 전경의 대상들은 바로 그 수수한 배경 위에서 상호 작용하면서 존립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진정 사유해야 할 대상은 가시적인 것들 뒤로 퇴은(退隱)해 있는 하나의 덩어리요 전체다.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이 하나의 의미있는 체계가 될 수 있는 것도 이 배경 덕분이다.

3. 배경의 개수 = 대상의 개수

하먼은 배경이 하나가 아니라는 이색적인 주장을 편다. 하나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모든 대상들은 모두 자신의 배경을 갖는다. 회화에 등장하는 대상들의 수만큼 배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슨 소린가? 우선, 그에게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이 실재한다(여기에는 유럽 연합 같은 군체(群體)도, 󰡔반지의 제왕󰡕이 그려낸 허구의 세계와 존재들도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이 대상들은 우리에게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동식물들, 나아가 무생물들도 자신 앞의 대상들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예컨대 바위 위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 바위와 빗방울은 제한된 방식으로만 서로를 파악한다(apprehend). 이 상황에서 바위에게 빗방울은, 바위 식으로 빗방울이고, 빗방울에게 바위는 빗방울 식으로 바위이다.


Graham Harman

하먼의 표현을 빌자면, 칸트가 말한 물 자체가 인간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세상 만물에게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상관자에게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 것, 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다크한 어떤 것, 그것이 실재적 대상(real object)이다. 혹은 한 대상과 그것의 다크한 배경, 이것이 하나의 대상을 이룬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배경을 진정한 사유 대상으로 본 하이데거와 꽤나 상통하는 생각이다. 양자의 차이는 하먼에게 있어, 하나의 대상 안에 수많은 하부 대상들이 있고, 그 대상들마다 각각의 배경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상들과 배경들 간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반면, 하이데거는 작품의 전면에 가시화되어 있는 피상적인 것에 한눈 팔지 말고, 그 배경, 보이지 않는 하나의 덩어리에 주목하라고 한다.

4.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하먼의 시각에 백퍼 동의하진 않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이런 문장들을 읽을 때 시원한 해방감을 맛본다.

“미술 작품의 요소들은 각각 자신의 깊이를 갖고 있다. 그래서 작품은, 내가 보기에, 그린버그나 심지어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덜 통일되어 있다. 작품은 실제로 수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고, 각 요소마다 자신의 배경이, 자신의 깊이가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사람들이 작품을 창조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이런 저런 요소들을 더했다가 뺐다가 한다. 그 모든 것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작업을 끝낼 수 있는 마술적인 순간 따위는 없다. 나는 이를 카이로에 있는 타흐리르 광장의 그라피티를 보면서도 배울 수 있었다. 그린버그라면 이 작품을 혐오했을 테지만, ( ...... ) 내게는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그라피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추상 공간에서 떠다니는 이산적 대상들의 다발이다. 장대한 파라오들, 이집트 축구 선수들의 이미지, 아라비아 단어들, 상형문자들 등의 짬뽕이다. 이들 모두는 함께 섞여 일종의 비조직화된 공간 속을 떠다닌다. 여기에는 대단히 강력한 뭔가가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라피티의 요소들 각각이 자신의 깊이를 갖고 있고, 이 요소들이 계속, 늘 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 위에 스프레이를 뿌려대고 늘 뭔가 새로운 걸 쳐바른다. (......) 각 작품에는 그린버그나 하이데거가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배경들이 있는 것이다.”(󰡔Artful Objects : Graham Harman of Art and the Business of Speculative Realism󰡕(2021). p.38-39.)


5. 배경이 하나여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이야기를 인물화나 풍경화에 국한시키지 말고 추상화나 더 나아가 설치 미술 같은 것, 아니 세상의 모든 대상으로까지 뻗어가 보자. 우선, 전시장에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는 돌멩이나 뒤샹의 뻔뻔스러운 변기 얘기부터. 이런 ‘작품’에 대해 어떤 작가, 비평가, 관람자라도 그 가시적인 요소들이 전부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비평가들은 대상(들)이 자아내는 어떤 분위기에 대해, 그 작품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이 체험하는 무언가에 대해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다. 대상으로부터 빚어지되 대상들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대상 주위에, 대상과 관람자 사이에 감돈다. 전경의 대상들과 상호작용하면서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 무언가가, 그 대상을 하나의 고유한 작품이게 만든다고. 한다.

하먼이 거론한 그라피티는 사뭇 다르다. 거기서 각 요소들은 전체적인 맥락에 반드시 기여하지 않는다. 모든 요소들이 정교하게 짜여 하나의 고유성을 창출하지도 않는다. 대상들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으며, 전체 맥락이나 통일적인 주제에 의해 각자의 의미를 하사받지도 않는다. 그라피티는 단일한 통일체가 아니며, 설령 어떤 전체성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조차 그것이 모든 요소들을 구속하지 않는다.

6. 하나의 작품

얘기가 여기에 이르고 보니 ‘단일 배경론’의 내실은 ‘단일 작품론’이라는 점이 드러나 버렸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다양한 요소들과 다층적인 관계들을 국가나 세계 같은 단일 범주 안에 구속하고 환원하려는 체제 이데올로기와 같다. 이 이데올로기가 자연과학 분야에서 붕괴되기 시작했을 때, 상대성 이론은 연속체 세계상을 고집하면서 인과 관계의 최후의 보루를 자처했다. 그래봤자 10여년 뒤 양자역학에 의해 세계의 절반이 부서져 버렸지만 말이다. 양자론 혁명은 인과성을 상관성으로, 연속성을 이산성으로 뒤집어버렸다.

“하지만 당신의 주장은 그라피티 같은 예외에만 해당되는 게 아닌가?”라고 반론할 수도 있다. 이를 물리학으로 번역하면 “하지만 양자역학은 미시 세계에만 해당되는 게 아닌가?”가 되겠다. 아인슈타인은 더 통합적인 이론이 등장하면 양자역학의 기괴함(즉, 반(反)합리성)은 자연의 보편성 아래 포섭될 것이라고 믿으며 죽어갔다(아인슈타인의 ‘숨은 변수론’).

한데, 그라피티는 정말 예외인가? ‘한 작가–한 작품’이라는 예술상은 예술사 전체로 볼 때 특정 시대, 특정 장르들의 현상이 아닌가! 굳이 따지자면 이런 예술상이 예외다. 현재 분출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다양한 아트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상승기의 예술관은 온갖 것들을 다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안 되면 자기와 교집합이 무지 많다고 오지랖 떤다. 반면 쇠퇴기의 예술관은 이건 이래서 아니고, 저건 저래서 우리랑 다르다고 한다. 사진이나 영화를 예술 아니라고 했던 예술관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드라마나 통속적인 시, 소설들을 문학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을 보노라면, ‘문학’이란 범주가 ‘문예’ 범주로 얼른 바뀌어졌으면 싶다. ‘문학’은 문자 해독률이 낮았을 때, 글자를 아는 게 학문과 직통했을 때 성립하는 번역어다. 세상이 바뀐지 오래다. 지금 예술이란 개념이 자처하는 포지션도 그와 같다.

7. 지금의 세계

사실 ‘하나의 작품’이라는 관념은 책이나 전시회, 전문가들의 비평 같은 데서나 작동하지, 일반인들의 감상에서는 규제적인 관념이 아니다. 아예 새로 생각해보기 위해, 예술이라는 제도권 범주에 확실히는 포함되지는 않는 대상들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자. 유튜브에 수도 없이 우글거리는 드라마나 영화 요약 채널들, 여러 작품들을 가로지르며 특정 배우의 연기들만 편집한 영상들, 시리즈 드라마 중 코믹 장면이나 액션 장면, 명대사 장면들만 모은 영상들은 많아도 너무 많다. 사실 이런 채널이 등장하기 전부터 사람들은 빨리감기나 건너뛰기 등을 구사하며 작품을 졸이고, 찢고, 이어붙이는 형식으로 감상해왔다. 작품의 단일성이라는 요소, 완성도라는 가치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다. 댄스 그룹의 퍼포먼스를 ‘교차 편집’한 영상들도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현상이다. 한 작품에는 어떤 고유성이나 완성도 같은 게 있고, 이것은 훼손될 수 없으며, 부분을 변형하거나 추가 혹은 제외하면 작품은 생명을 다한다고 하는 믿음. 그런 믿음은 지금 시대에 낡은 유물 취급을 받는다.

한데, 지금까지의 내 얘기와는 일견 어긋나게도, 드라마나 영화들을 이리저리 뜯어내 재구성하는 걸 부정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별로 없다. 현대 음악과 미술에서도 그런 사례들은 차고 넘친다. 모방과 변형과 콜라주가 없는 것은 현대 예술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다. 잡종성이나 혼종성 등의 개념을 동원하며 찬양하기도 한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같은 책이야말로 자신이 짓고 싶은 꿈의 책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다.

8. 보수 이데올로기

그럼에도 단일 작품론은 죽지 않았다. 기존 작품들이나 현상들을 아무리 심하게 찢고 이어붙이고 훼손시켜도, 그를 통해 출현한 결과물이 하나의 고유성, 하나의 의미를 창출해야 한다는 전제가 늘 따라붙는 것이다. 나는 이 전제가 싫다. 그걸 전제할 경우, 여러 요소들은 제각각 놀아서는 안 되고 정교하게 맞물리며 단일한 고유성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각 요소들은 전체성으로부터 나름의 의미를 하사받거나, 결국 같은 말이지만 하나의 의미 전체를 구성하는 데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 부담스러워. 나는 가족, 직장, 국가에 속해 있는데,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전체의 맥락에서만 의미를 가져야 한다면, 그 의미에 복무해야만 한다면 어떨까? 만일 내가 속한 집단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집단에서 떠나보내거나 그게 힘들면 그 집단을 떠나고 싶다.

하나의 작품을 말하는 것도 좋다. 거기에 어떤 통일성이나 고유성이 있다는 것도 좋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건, 모름지기 작품은 그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다, 아니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갑갑한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먼이 배경은 하나뿐이 아니라고 했을 때 시원한 해방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기할 정도다, 대체 왜 ‘하나의’ 작품이라는 관념이 이렇게까지 중요해야 하는 걸까? 사실 내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자명해서 따로 논거를 대기도 힘들다.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어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니라, 언젠가부터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런 세계상을 갖게 되었지? 요즘 이런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그러다 문득 얻어걸린 게 연방제의 기억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9. 연방제

연방제 국가들은 의외로 많다. 러시아, 캐나다, 미국, 브라질, 호주, 인도, 아르헨티나 등 영토가 넓은 나라들이 많지만 벨기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같은 국가들도 연방제다. 남북 통일의 정치 체제로 연방제가 제시된 것도 이미 오래 전이다. 그러니 연방제에는 무지 다양한 유형이 실존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인 모습에 구애받지 말고, 연방제라는 발상에 대해 얘기해보자. 우선 연방제와 맞대응되는 말은 단일 국가다. 연방제에는 단일 국가보다 위상이 낮지 않은 여러 자치 정부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교나 국방 같은 전체적인 문제 혹은 비상 상황을 집중적으로 관장하는 연방 정부가 있다. 상시적으로는 연방 정부가 자치 정부들 위에 군림할 수가 없다. 연방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다.

내가 연방정부 혹은 연방제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건 크로포트킨의 에세이집 󰡔<아나키즘>(충북대학교 출판부, 2011) 󰡕에서였다. 아나키즘은 흔히 모든 전체에 대해 깡그리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골수 아나키스트가 버젓이 연방제를 주장했다니 신기했다.

국가라는 하나의 전체가 현존하며, 시기에 따라 하나의 전체로 작동할 필요가 있다. 그의 연방제는 그런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각 요소들을 그 전체로 환원하지 못하게 하려는 유력한 장치다. 하나의 전체로 작동할 때와 방식도 당연히 자치 정부들이 결정한다. 그래서 아나키즘의 정치 체제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국가만이 아니다. 크로포트킨은 크고 작은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면, 여러 공동체들이 같은 지역에, 통합하지 않은 채, 함께 있으라고 권한다. 그래야 공동체에서 힘들어 하거나 불만 있는 사람들이 언제고 옆 공동체로 옮겨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불가피하게 조성되기 마련인) 중앙 권력이 절대화하지 못하게 하는 매커니즘이다. 국가가 감히 시민 하나하나에 대해 상전으로 군림하지 못하게 하려는 아나키즘 정치체제. 리버럴 아나키즘이다.

10. 국가의 형상이 아닌 예술, 삶, 과학

하나의 국가는 하나의 전체고 그에 상응하는 것이 연방 정부다. 그렇지만 연방 정부가 서열상 자치 정부들의 상전은 아니다. 지배자도 아니고 더 높은 권력도 아니다. 이런저런 상호 작용 속에서 ‘전체’라는 측면을 대리하는 하나의 부분으로 참여할 뿐이다.

세계든, 국가나 크고 작은 공동체든 다 마찬가지다. 각 요소들의 의미를 전체의 맥락에서만 부여하려 해선 안 된다. 정반대로 어떤 전체도 죄다 배제하려는 것은 무력할 때가 있고, 그 자체가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전체라는 것이 하나의 요소로 참가하는 체제가 자연스러우면서도 바람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럴 때 우리의 예술상은 어떻게 바뀔까? 아니, 질문을 좀 더 좋게 바꾸자. 우리가 그런 예술을 제작하고 감상할 때,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11. 다음 질문

현재 예술의 자율성은 왜 이토록,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강조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자연과학도 마찬가지네. 만일 예술이 자율적이라고 하려면 작품 자체가 어떤 유니크함이 있는, 하나의 통일체여야 한다. 그래선지 예술과 과학에는 국가나 종교, 관습 등 제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활동이라는, 그래야 바람직한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실제로 그것을 생명처럼 여기는 예술가와 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허나 그보다 더 압도적인 현실은 예술과 과학이 자본이나 국가의 종속물이고 시혜를 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양자는 어떻게 지배 권력으로부터 이토록 이쁨을 받을 수 있는 걸까? 흔히들 그걸 예술이나 과학의 타락이라고 개탄하지만, 역으로 양자의 본성이 그런 것이라면?

작품의 일관성이나 통일성의 중시를 문학사에서는 개성적 개인의 탄생과 연관지을 터인데, 가령 <겐지 이야기>나 <수호지> 등, 근대 이전의 많은 작품들에 작품의 단일성을 핵심 잣대로 대어보면 그 허망항을 금세 알 수 있다. 여기에 개인과 중앙집권 국가가 사회의 양극으로 동시 탄생했다는 걸 연결시켜보자. 그러면 ‘단일한 작품’이라는 것은 국가와 개인이 완벽히 합체된 형상이 된다. 그런 점에서 예술과 과학은, 단일 권력체인 중앙집권 국가 안에 존재하는 국가의 형상물들이다. 작품이라는 소국가의 탄생! 이걸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과연 이게 말이 되는 소릴까? 그렇다면 우리의 예술과 과학은 어떻게 환골탈태해야 할까?

12. 이 글 전체에 덧붙이는 글

이 글에서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단일성의 신화는 과학과 예술 분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말과 사물󰡕에서 시대를 지배하는 판인 에피스테메는 시대마다 단 하나뿐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다양한 대항물이나 일탈적인 사건들이 출몰해도 그 단일성에는 조금의 균열도 가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푸코가 갖은 애를 다 썼다는 점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또 하나, 이 글이 전체성에 대한 부정 혹은 전체성으로부터 일탈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문제 상황을 지적해둔다. 잘 아다시피 현대의 예술이나 철학은 특정 영역이나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단일 구조를 상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사건이나 현상들을 찾아내어 표현해왔다. 가히 분투라고까지 할 수 있는 그 다양한 시도들은 한편으로 단일성에 균열을 내지만, 다른 한편 반드시 벗어나야만 하는 단일 구조가 엄존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는 역효과를 언제나 동반한다. 요컨대 이런 시도들에는, 성공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실패하는 매커니즘이 내장되어 있다.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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