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는 눈, 샤일록과 포셔의 불의 / 김동규

최종 수정일: 3월 9일

어린 시절 즐겨보던 사극이나 무협지에는 복수에 목숨 건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판에 박힌 복수 서사가 ‘눈물 나도록’(하품 때문인데, 요즘 학생들의 표현으로는 ‘토 나도록’) 지겨울 정도였다. 사랑하는 이를 죽인 원수에 대해 복수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그런데 시간이 오래 지나고 새로운 연인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생의 나머지를 복수에 바치는 것은 왠지 어색하고 불합리해 보였다. 굳이 저렇게까지 복수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사법 시스템이 부재했던 시절에 복수가 원시적인 정의(justice)로서 기능했다지만, 너무 과장되게 보였던 게 사실이다. 심지어 극 속의 주인공이 정신병 환자처럼 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은 <함무라비 법전>에 실려있다는 유명한 글귀다. 죄에 상응한 만큼의 벌로 보복한다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 중 가장 유명한 글귀라고 한다. 이것은 복수가 원초적 정의였던 시절의 낡은 법조문처럼 들린다. 세련된 성문법이라지만, 여전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간직한 듯 보인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문명의 시초에 있었던 원시적 형태의 법조문이라고 저 말을 기억할 것이다.


‘동태’ 복수법이라고 하지만, 실제 법 적용은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법 앞에서의 평등은 한갓 이념뿐일지도 모르겠다. 저 법은 귀족이 같은 귀족의 눈을 멀게 했을 때만 적용되었다고 한다. 귀족이 평민의 눈을 멀게 할 때는 돈으로 지불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귀족이 노예의 눈을 멀게 할 때는 평민에게 지불해야 했던 돈의 절반만 지불했다고 한다. 오로지 계급적 동급의 신체만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보았기에, 동태복수법을 적용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는 동태복수법과 유사한 것이 등장한다. 그것을 살펴보기 이전에, 한 가지를 언급해 두자. 이 책에는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어려울 정도로 반유대주의적 발언이 넘쳐난다. 이런 반유대주의적 정서가 20세기 나치의 출현을 낳았던 케케묵은 바닥 정념이다. 나치 이전에 활동했던 독일 지식인들의 문헌에서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유럽 전역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 정서를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기독교도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흉악한 계략을 세운다. 약속 불이행 시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도려낸다는 문구를 계약서에 넣은 것이다. 그런데 판사 역할을 한 포셔는 떼어낸 살점에 피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결한다.

포셔: 상인의 살 1파운드는 당신 소유요. 법정이 수여하고 법이 주는 거요.
샤일록: 대단히 올바른 재판관이다!
포셔: 당신은 그 사람의 가슴에서 살을 떼내오. 법이 허락하고 법정이 수여하오.
샤일록: 유식한 재판관! 명판결이다! 자, 준비해라!
포셔: 잠깐만. 할 말이 있소. 계약서에 의하면 당신에게 피는 조금도 준다고 하지 않았소. 명확히 ‘살 1파운드’라 되어 있소. 그러면 계약대로 하시오. 당신의 소유물인 살 1파운드를 베어내시오. 그러나 자를 때 기독교인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베니스 법에 따라 당신의 토지와 기물은 베니스 국가에 몰수되는 것이오.

포셔의 판결은 계약서에 있는 그대로만 이행해야지 그 이상의 복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태복수법은 야만적인 법이 아니라, 한계를 모르는 야만적인 복수를 피하려고 만들어진 지극히 문명화된 법이다.


‘너로 인해 내 눈이 멀게 되었고 네 눈을 멀게 한들, 아니 더한 보복을 하더라도 내 눈이 떠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결코 너는 네 행위에 책임질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무절제한 복수심이 날뛰는 걸 자제할 것이며, 오직 네 눈만을 멀게 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기로 한다’는 것이 이 법의 기본 취지다.


누군가 나를 실명케 했다.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책임질 수 없다. 가해자의 눈을 멀게 해도 내 눈이 떠지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를 죽여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로 복수하다 보면, 결국 복수는 한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 요컨대 동태복수법은 복수를 최소한도로 줄여보자는 목적으로 (용서의 이념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이 점에서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포셔의 판결도 같은 취지다. 계약불이행으로 복수의 권리를 가진 샤일록에게 최소한의 복수만을 허용한다. 피 없는 살만을 떼어내라고 말이다.


그런데 실상 이 판결에는 문제가 있다. 피는 살의 일부가 아닌가? 피 없는 살은 존재할 수 없다. 살과 피는 오직 개념상으로만 구분된다. 정의와 용서도 마찬가지다. 둘은 개념상으로는 구분되지만 현실에서는 따로 구분될 수 없다. 삼투되어 있다. 정의 없는 용서는 비굴함이고, 용서 없는 정의는 냉혹함일 뿐이다. 정의 속에 녹아 있는 용서, 용서 안에 녹아 있는 정의만이 현실적일 수 있으며, 그것만이 진짜 정의이고 용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포셔의 판결도 샤일록의 주장도 모두 용서가 없는 냉혹한 불의(不義)일 뿐이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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