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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누가 바이러스인가? / 오문석

비유는 힘이 세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체험하기는 어렵지 않다. 예컨대 바이러스가 그러하다. 바이러스의 비유라니, 짐작이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물으면 된다. 누가 바이러스인가? 호주에서는 한국계 유학생을 대학의 기숙사에서 퇴거시켰다 한다. 그들에게는 한국계 유학생이 잠재적 바이러스다. 그러한 발상은 중국과 한국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계 유학생을 모두 동일성의 테두리에 감금하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격리된 동양인의 정체성에 잠재적 바이러스라는 비유가 뿌리를 내린다.


출처: 비디오머그 https://youtu.be/4HbLYvg3p_A

물론 사람은 바이러스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비유적 의미는 사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비유는 사실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유는 사실에 구멍을 내고,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길어낸다. 비유는 팩트 체크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가짜 뉴스의 발원지인 것이다. 그것도 무궁무진한 의미의 화수분(貨水盆)이라 할 만하다.


사실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구멍, 그 어두운 구멍은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심연이기도 하다. 그 어두운 구멍이 비유가 뿌리를 내리는 통로이다. 비유가 의식과 무의식에 동시에 걸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비유가 무의식의 언어라고 말한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속 시원하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은유와 환유의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돌려서 말할 뿐이다. 그래서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비유적 의미의 발원지, 그 뿌리를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 검은 구멍을 의식은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구멍에서부터 가령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실이 아닌 줄은 알지만, 왠지 동양인은 바이러스’라고. 그리고 그 어둠의 목소리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비유의 지배력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유명한 에세이스트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질병에 들러붙는 은유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그것을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저서에 담았다. 예컨대 그녀는 결핵, 에이즈, 암과 같은 질병에 들러붙어 있는 은유들을 분석한다. 우리도 경험한 바이지만, 식민지 시대에 결핵은 지식인의 질병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아름답고 숭고한 질병으로 낭만화되었다.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결핵을 미화하였다. 반면에 매독과 에이즈는 사람들을 전염의 공포에 빠지게 만든다. 추악하고 혐오스런 질병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른바 ‘질병의 은유들’에 대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에이즈, 또는 사람들에게 자책감이나 수치심을 끌어내는 특정 질병에 관한 한, 해당 질병 자체에서 이런 의미와 은유들을 떼어내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고, 우리에게 위안을 줄 것이다. …(중략)… 우리는 은유를 폭로하고, 비판하고, 물고 늘어져, 완전히 쓸모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녀는 마침내 “질병을 은유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질병의 은유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저 어두운 구멍을 틀어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궁무진한 의미가 끝없이 솟아오르는 저 샘물을 어떻게 봉쇄할 것인가? 그것을 틀어막고 봉쇄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봉쇄된 무의식은 언젠가는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이 입증한 사실이 아니던가?


증상은 억압된 무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비유적 언어이다. 그래서 증상은 해석의 대상이다. 신체적인 증상과 유사한 것으로 자연적 징조라는 것이 있다. 자연이 보내는 신호라고도 할 수 있는 징조도 해석의 대상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대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를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페스트]는 이렇게 기록한다.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신의 진료실에서 나오다가 계단참 한복판에서 죽은 쥐 한 마리에 발이 부딪쳤다. 그 순간 그는 별생각 없이 죽은 짐승을 옆으로 걷어치우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나 길로 나오자 그 쥐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고, 수위에게 알리고자 발걸음을 돌렸다. 미셸 노인의 반응을 대하자, 그는 자신의 발견에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점이 있음을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죽은 쥐가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그저 이상하게 보였던 반면, 수위에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사건에 해당했던 것이다. 더욱이 수위의 입장은 단호했다. 건물에는 쥐가 없다는 것이었다. 건물 2층의 계단참에, 그것도 죽은 것이 분명한 쥐 한 마리가 있었다고 그에게 아무리 말을 해보았자 별 소용이 없었다. 미셸 씨의 신념은 확고했다. 건물에는 쥐가 없으며, 따라서 누군가 밖에서 가져다 놓았음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여러 말 할 필요 없이 장난이라는 얘기였다.

2층 계단참에 죽어 있는 쥐를 둘러싸고 의사인 리유와 수위인 미셸의 해석은 대립한다. 의사는 그 쥐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었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지만, 수위는 그 쥐가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단정한다. 건물 안에는 쥐가 없다는 것이 수위의 확신이다. 건물 내부에 “죽은 쥐”가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사건”일 뿐이다. 의사에게 그것은 비정상성의 징후였지만, 수위에게 그것은 직무태만의 증거였던 것이다. 그러나 “죽은 쥐”의 숫자는 늘게 되고, 수위도 결국 사망한다. 마침내 도시는 “건강하던 사람이 고혈압으로 갑자기 쓰러지듯이 여태껏 그렇게도 조용하다가 며칠 사이 발칵 뒤집혀 혼미상태”에 빠지게 된다. 쥐떼들의 죽음은 그 모든 재난의 징조였던 것이다. 조용한 도시의 한 가운데에, 일상의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이다.



이제 그 도시는 고립될 것이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독자가 그 낯선 도시의 심연으로 들어설 것을 요구한다. 독자도 그 도시에 격리되어, 그 어두운 구멍까지 들여다볼 것을 요구한다. 그 구멍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비유적 의미들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때 재난은 그저 단순한 재난이 아니다. 재난은 이미 구멍을 통해서 비유적 의미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가 만들어낸 통로를 따라서 독자는 도시의 시궁창을, 그 무의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도 알지 못했던 평범한 일상의 얼굴이 그 뒤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쥐띠 해를 맞이해서 중국의 우한시에 구멍이 뚫렸다. 우리는 그 구멍에서 샘솟는 비유적 의미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과연 누가 바이러스인가?


오문석(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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