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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 / 오문석

‘그렇게 하지 않고 싶습니다.’ 유명한 바틀비의 테제이다. 바틀비는 허먼 멜빌의 소설 속 주인공이지만, 지금은 소설가보다 더 유명하다. 그것도 이론가들이 더 좋아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마이클 하트, 들뢰즈, 아감벤, 지젝 등 내로라 하는 이론가들이 바틀비의 변호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물론 변호사들은 싫어하겠지만 말이다. 바틀비의 저 유명한 테제가 그를 고용한 변호사에게 멘붕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를 필사하는 필경사로 고용된 바틀비, 그는 출근 3일만에 저 테제를 발설하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처럼) ‘벌레’가 된다. 퇴근도 하지 않고 책도 보지 않고 사무실의 벌레가 된 것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가 ‘벌레’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기계를 조작하기에는 몸통에 달린 손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직립은 불가능하고 냄새는 코를 찌른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고 소통이 불가능하다. 유일한 대답은 언제나 ‘그렇게 하지 않고 싶습니다.’가 전부다.


‘그렇게 하지 않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무위(無爲)’. 원래는 무위도식이었으나, 나중에 경찰이 동원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그는 먹지도 않고 명실상부한 ‘무위’의 상태에 진입한다. 「변신」의 주인공이 곡기를 끊고 죽음을 자초한 것처럼, 우리의 바틀비도 사식을 끊고 죽음을 앞당긴다. 정말로 ‘그렇게 하지 않고 싶습니다.’가 실현된 것이다.

「피로사회」로 유명해진 재독일 학자 한병철은 바틀비의 테제를 ‘성과사회’와 연결짓고 있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그래, 우리는 할 수 있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이니셔티브, 동기부여가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안 돼”가 지배적이었다.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피로사회])

성과사회는 자기규율의 긍정사회다. 외부에서 당위적 명령이 발설되기도 전에 미리 자기규율의 주문을 외우는 사회이다. 자기계발서를 쌓아두고 스스로 채찍을 드는 사회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주문을 외우면서 성과와 실적을 향해 달려야 한다. 그런데 전쟁터와 같은 성과사회에서 바틀비는 돌연 제동을 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싶습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능력은 있지만 실행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왜? 어째서? I can do it. 모두가 자신의 스펙을 과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 그의 깨달음의 경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미국 월가의 한 가운데서 바틀비는 도인처럼 버티고 서 있다. 이 수수께끼같은 교리를 해명하기 위해서 이론계의 도사들이 나선 것이다. 한병철에 따르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한다고 한다. 어쩌면 바틀비의 각오는 우울증 환자도 낙오자도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일 게다. 아니 바틀비식으로 말하자면 우울증 환자나 낙오자가 되지 않고 싶다가 더 정확할 것이다. 긍정의 바다로 뛰어들면 분명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으니, 처음부터 그런 바다에 입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수영은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Wall Street at the corner of Broad Street, 186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가 답답한 변호사는 바틀비를 우울증 환자로 단정짓는다. 질병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눈에 바틀비는 이미 무능력한 낙오자일 뿐이다. 작품 말미에서 마침내 그는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내고야 만다. 소문대로 바틀비의 증상은 어쩌면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을 처리하면서 생겼을지도 모른다. 죽은 자에게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들, 한 번도 개봉되지 않은 수수께끼의 편지들을 소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개봉을 거부하는 편지처럼 말한다. 개봉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인간을 실적과 스펙으로 평가하는 성과사회에서 인간은 다만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더 높은 실적과 더 많은 스펙이 요구되는 사회에서 숨겨진 재능은 무능력과 동의어다. 저마다 타고난 재능을 발굴하고 그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자만이 능력자다. 할 수 있다면 더 크게 과시해야만 한다. 이럴진대 개봉을 거부하는 바틀비의 편지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환자는 바틀비가 아니다. 이 살벌한 성과사회에서는 모두가 우울증 환자이고 모두가 낙오자다. 성과의 기준은 무한을 향해 뻗어갈 것이고 스펙에 추가될 품목은 더 늘어날 것이다. 브레이크가 없는 무한질주의 행렬 한 가운데에 바틀비가 있다. 그는 묻는다. 누가 환자인가. 무한질주, 무한긍정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인간에게도 신비라는 말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 자로 잴 수 없고 돈으로 셀 수 없는 수수께끼도 인간의 자산이라는 것. 어눌하고 모자란 듯 더듬대는 언어가 인간의 위엄을 대변한다는 사실에 대한 망각이다. 아무리 복잡한 계산도 즉석에서 답하는 AI 시대일수록 이제는 더 늦게 도착하는 것이 인간이다. 더 늦게 도착하는 편지, 개봉을 거부하는 편지가 인간인 것이다. 170년 전에 바틀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 어눌함에 이론가들이 달려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문석(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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