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강연을 듣고, 발끝에 부딪힌 길바닥의 돌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와 이 돌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똑같단다. 그렇다! 새삼스런 진리다. 물리의 측면에서 보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원자라는 최소구성단위, 공통분모만 도드라지게 되면, 나와 이 돌이라는 개체는 사라져버린다. 엄연히 존재했던 둘의 차이도 제거된다. 원자라는 보편자가 전면에 나서면서, 나와 돌 같은 개별자는 그 보편자에 완전히 종속된다. 나와 돌은 그저 원자들의 배열과 합성 방식이 빚어낸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 진짜 있는 것은 원자요, 나와 돌은 진짜에서 파생된 반쪽이일 뿐이다.
우연히 나희덕의 시집『가능주의자』(문학동네, 2021)를 펼쳤다가 빙그레 미소 짓게 하는 시를 발견했다.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라는 시다. 거기 보면 은근슬쩍 선배 시인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해 가볍게 디스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오래전부터 교과서에 실려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한 「꽃」을 떠올려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에서는 언어를 발화하는 능동적 주체가 부각된다. 시적 화자에 따르면 자연적 ‘몸짓’에다가 인간이 이름을 명명함으로써, 한갓 물리적 대상이었던 사물이 아름다운 꽃, 즉 심미적인 의미체로 변신한다. 영원의 ‘눈짓’이 된다. 여기서 존재의 결정권한(꽃이 ‘있다/이다’)은 언어를 발화하는 주체인 인간에게 주어진다.
아까의 그 물리학자는 이 시를 어떻게 감상했을까? 경험데이터와 수식이 등장하는 과학적 언어에 견주었을 때, 지극히 주관적인 상상, 혹은 객관적이지 못한 감성 언어라고 평가했을 것만 같다. 맥락은 다르지만, 나의 감상도 그와 유사하다. 김춘수의 꽃은 인간, 정확히는 근대적 주체의 관념적(이념적) 투사물에 가깝다. 인간의 능동적 창조성에 지나치게 비중을 둔 인간중심적 지적 토양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꽃이 시들거나 썩는 리얼한 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항상 예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플라스틱 조화(造花)임을 면치 못한다. 내가 내 눈을 볼 수 없듯이, 꽃(내가 만든 내 분신)은 나를 직접 응시하지 못한다. 내게 눈짓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죽음과 부패에 저항하는,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것으로 남고픈 부질없는 욕망의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나희덕 시인의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의 일부를 감상해 보자.
산책길에 조약돌을 주워 왔다
수많은 돌 중에
왜 하필 그 돌을 주머니에 넣었을까
내가 돌을 보는 게 아니라
돌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고 느낄 때
돌을 집어드는 것은
돌의 시선을 피하는 방식인지도 모르지
특별할 것 없는 그 돌은
나에게로 와서 비로소 돌이 되었다
이름을 붙이거나 부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중략)
나의 돌이 아니라 그냥 돌이 될 때까지
나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을 때까지
그때까지만 곁에 두기로 한다
방생의 순간까지
조약돌은 날개나 지느러미를 잃은 듯 거기 놓여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선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다. 돌이 본다. 아니, 돌이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돌이 본다고 느꼈을 뿐이다. 그럼 이건 시인의 환각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시인을 너무 간편하게, 과민한 신경증 환자나 감상에 젖은 철부지 순진둥이로 만들지는 말자. 시인의 진솔한 감각을 믿고(미학의 제1전제) 시선의 주체를 찾아보자.
나는 ‘그 돌’을 있게 한 어떤 ‘존재’가 시인을 응시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 소위 존재의 응시다. ‘돌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고 느낄 때’, 시인은 타자적 존재의 응시를 감지한 것이다. 분명 있기는 하지만 도저히 뭐라 말할 수 없는 거시기(철학자 박동환의 X라거나 정신분석학적 Es, 혹은 하이데거의 X 표시로 말소시킨 Sein과 유사한 거시기)가 날 응시하는 경험, 이게 바로 존재경험이다. 그리고 존재와의 만남은 (마주한 대상은 물론이거니와) 나를 특별한 나로 만들어 준다.
내가 있다. 조약돌 하나가 있다. 나와 조약돌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원자로 되어있다는 점에서 똑같은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그 이상이다. 원자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나와 돌의 특이성은 사라지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둘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돌은 돌대로 남아있다. 둘의 차이 역시 그대로 남는다. 왜 그럴까? 원자와는 달리 존재는 ‘어떤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빛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지만 정작 자신은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쪼개지지 않는 원자(atom)는 물질적 최소구성단위로 가정된 무엇이다. 무엇의 내용은 계속 바뀔 수 있다(쿼크/끈…). 아무리 객관적 외관을 뽐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대 ‘인간 이성’의 이론적 구성물임을 면치 못한다. 그것의 보편자적 위상은 지적 편의와 세계장악력을 위해 개체를 포섭하는 인간의 인식틀이라는 점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도 조약돌도 그런 보편자에게 자기의 전 존재를 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외친다. 나는 원자가 아니다. 나는 돌이 아니다. 나는 나다.
아마 인간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조약돌도 외칠지 모른다. 그 무언의 외침을 듣는 자가 (사랑의 언어에 능통한) 시인이다. 나희덕 시인은 돌의 시선을, 정확히는 ‘존재의 시선’을 감지한다. 때로 이 시선은 경악스러울 수도 있고, 구역질 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시선이 너무 낯설고 갑작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선을 피할 때가 많다. 그러나 시선으로 인해 나만의 행동을 하게 된다면(시인의 경우 손으로 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은 것), 그리고 ‘하필’ 수많은 돌중에 그 돌만이 특별한 돌이 된다면, 그 시선은 사랑의 시선일 공산이 크다. 사랑을 통해서만 나와 너의 각별(各別)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와 ‘그 조약돌’은 원자가 아닌 존재의 빛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된다. 그리고 빛의 정체는 아마 사랑일 것이다. 여기에서의 사랑이란 인간 종족 남녀 간의 사랑에 국한된 게 아니라, 엠페도클레스적 스케일의 사랑, 곧 (우주적 무한이 응축된) 고유한 개체의 절대적 가치와 관계된 존재의 사랑일 것이다. 이 사랑은 부단히 자신의 현존을 알리지만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완벽한 인식이 불가능하기에 종종 존재마저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알 수 없는 그 사랑은 돌을 ‘나의 돌’로 만들지 않는다. 사랑은 소유가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각별한 있음’을 확인한 다음, 사랑은 서로를 서로에게로부터 자유롭게 ‘방생(放生)’한다. 몸짓들에게 생명을 준다. 참된 눈짓이게끔 한다.
팩트만 허용되는 세계에서 예외적으로 당위 하나가 허락된다면, 그리고 ‘사실과 당위는 구별되어야만 한다’는 당위보다 앞선 당위가 있다면, 그건 앞서 언급했던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속 시원히 풀어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 불가능성에 지식(팩트)의 판돈을 몽땅 걸 만큼 소중한 이 사랑이야말로 시원(始原)의 당위 형식에 담길만한 내용이다. 본래 당위란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향한 사랑에의 믿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가능주의자’, 곧 “불가능의 가능성을 믿어보려”는 자가 사랑 당위의 실천가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나도 거기에 끼고 싶다. 철학자라면 ‘~주의자’이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을 깨고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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