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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와 개미: “무한이 어디에 쓸모가 있죠?” / 김동규

최종 수정일: 2023년 6월 5일

어느 날 아침 아파트 놀이터에 나왔다가 까치 한 마리가 부지런히 흙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지렁이나 개미를 잡고 있나 보다. 자그마한 부리로 이곳저곳을 파헤치는 새 한 마리의 부단한 몸짓이 귀엽기만 했다. ‘저 미물도 살겠다며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라는 속담도 떠올랐다. 시쳇말로 바꿔보면, ‘블루오션의 이점’ 즉 다른 경쟁자들이 끼어들기 이전에나 쉽게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뜻이다.


잠시 뒤 나는 작지만 내 눈에 보이는 까치가 아니라,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벌레들에게 빙의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평화롭던 놀이터의 풍경이 처참한 재난의 장소로 돌변했다. 잡아먹히는 벌레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엄청난 대재난의 시간일 것이다. 아침부터 사이즈를 한눈에 조감할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괴물이 출현하여 자신들의 주거지를 파괴하고 무참히 살육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과연 개미에게 까치는 어떤 존재로 보였을까?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 무한한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다시 인간 시선으로 돌아와서) 고작 까치 한 마리를 그렇게 여기다니…


개미는 까치의 전모를 모른다. 개미에게는 까치가 인간에겐 작고 귀여운 새일 뿐임을 알 방법이 없다. 개미의 세계에서 까치 이상의 덩치를 가진 것들은 모두 무시무시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타자로만 여겨질 것이다. 그 모두가 개미에겐 무시무시한 무한자들이다. 개미가 가진 척도로는 도저히 잴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처한 상황도 개미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역시 인간의 척도로는 측량될 수 없는 것들과 항상 인접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걸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은 과연 다행일까 불행일까?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다. 개미는 까치보다는 작고 까치는 인간보다는 작다. 크기 면에서 인간보다 큰 생명체는 많다. 고래, 코끼리, 기린, 곰, 호랑이 등. 생물 세계에서는 대체로 크기가 힘의 우위를 결정한다. 상대를 먹어치울 수 있는 입과 내장의 사이즈가 포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똑한 인간은 어느 새 지배력(controlling power)에 있어서만큼은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보다 압도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무방비 상태로 직접 대면하지 않는 한, 이 거대동물들을 작고 귀엽게 여기고 있다. 테디 베어나 울산 마스코트인 고래처럼 말이다.


사실 이런 상황은 최근에 와서 조성된 것이다. 큰 무리를 짓지 못하고 사냥도구도 변변치 못했던 과거 원시인들에게 위협적인 거대 동물들이 훨씬 많았다. 원시 문화 곳곳에서 호랑이, 곰, 사자 등을 무한한 신으로 숭배하기까지 했던 토테미즘이 쉽게 발견되는 이유다. 그 시절에는 손가락으로 쉽게 셈할 수 있는 수 10을 넘어가면 ‘큰’ 수였다. 100과 1000, 그리고 10000 정도가 되면, ‘헤아릴 수 없는’ ‘한없는’ 무한이 연상되었다. 이런 점에서 무한, 영원, 신 등은 ‘무엇임’을 (알고) 단정지어 지칭하는 단어라기보다는 우리가 가진 척도로 잴 수 없는 것을 뜻하는 말에 더 가깝다.


오늘날 인간의 지성은 천문학적 수치들로 즐비한 우주를 말한다. 100년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이 대략 137억 년 우주의 나이를 말한다. 나노 단위의 미시 세계를 탐험하는가 하면, 숱한 은하계의 한없는 공간을 모두 시선에 담아 두려고 한다. 측정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측정되던 것들은 모두 볼품없이 작고 유한한 것이 되었다. 과거에 무한이라 불리던 것들까지 유한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신이라 불리던 것들은 당시 인간의 척도를 초과했기에 불거진 환상이라고 진단되었다. 그 환상은 인위적 망상일 뿐이며, 미래에는 결국 유한한 것으로 측정될 것이다. 현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과연 영원 혹은 무한이라는 것이 있을까? 이런 질문은 실증할 수 있거나 논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무릇 증명이란 유한한 것만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물음은 지식이 아닌 믿음의 문제다. 여기에선 (증명과 무관한) 믿음이 관건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영원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지금껏 사람들이 믿어 온 영원한 것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긴 단위의 시간을 만났을 때, 당시의 시간 척도로는 도저히 잴 수 없는 시간적 존재가 출현했을 때 쓰였던 용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유한하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이 견해는 요즘 현대인들이 믿고 있는 신념과 유사하다. 그런데 이 주장, 즉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유한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명제만큼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다고 말해야 한다(아니 은연중에 이미 그렇게 주장한 셈이다). 나는 이 역설을 믿는다. 부조리하지만 믿는다. 그리고 또 하나 믿는 게 있다. 사랑의 영원성이다. 믿음을 떠받치고 있는 게 사랑이기 때문이다(졸저 <철학자의 사랑법> 참조).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존속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

절망은 무한한 정열을 지니고 자기 자신을 어떤 외톨이와 관계할 때에 개입한다. 절망하고 있지 않다면, 무한한 정열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오로지 영원한 것과만 관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을 절망케 하는 것은 불운이 아니라 이것, 즉 그에게는 영원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영원이 결핍되어있다는 것이 곧 절망이다.1)

키에르케고어에 따르면,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우리 인간에게 영원이 결핍되어 생기는 병이다. 인간은 유한자이면서도 무한한 정열을 가진 역설적 존재다. 무한한 유한이자 유한한 무한이다. 무작정 무한함을 강조하면 인간은 오만해지고, 오만이 깨져 왜소한 유한이 드러나면 (영원의 씨앗인) 사랑마저 잃고서 절망에 빠진다. 키에르케고어가 사랑을 잃었을 때 인간은 치명적인 정신질환을 얻는다고 보았다면, 알랭 바디우는 “무한이 어디에 쓸모가 있죠?”라는 질문에 대해 이런 답을 내놓은 적이 있다.

무한은 인간이 죽게 마련인 짧은 삶에 속박되지 않도록 하는 데 쓸모가 있습니다. … 우리는 드물게 무한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세계의 매력을 영위하지만, 생각 속에서, 창작 속에서 무한할 수 있습니다.2)

놀이터에서 만난 까치와 개미도 “무한이 어디에 쓸모가 있죠?”라는 질문을 던질까? 더 나아가 바디우처럼 대답할 수 있을까? 그들과 대화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이런 질문들에 정답을 제시할 수 없다. 그저 관찰자적 시선을 통해 추측할 따름이다. 그런데 대화가 가능한 인간들 가운데에도 무한을 잊고(잃고) 사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덧없는 삶에 속박당하기를 원하는 사람들(키에르케고어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신이 절망에 빠진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알랭 바디우

요즘 절망스러운 일들을 많이 목도한다. 당장의 이권이 부딪히는 정치판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교에서도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자신이 절망에 빠진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 절망마저 무감각한 사람들을 만날 때 특히 절망스럽다. 그럴 때마다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며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영원한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 시인의 노래를 조용히 되뇌며 복잡한 심경을 가라앉혀 본다.

순간순간 절망을 넘어서려고 그러는 거야.

산보

술 한 잔

한숨과 눈물

어떤 꽃

어떤 웃음

무책(無策)을 밀고 나가는 듯한

힘찬 몸짓

무슨 지껄임

뒷모습만 있는 그림자. (「절망의 그림자」)3)


1)쇠얀 키에르케고어, 『사랑의 역사』, 임춘갑 옮김, 치우, 2011. 78-79쪽.

2)알랭 바디우, 『유한과 무한』, 조재룡 옮김, 이숲, 2021. 49-50쪽.

3)정현종, 『견딜 수 없네』, 시와시학사, 2003. 55쪽.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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