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는 자음을 보는 한국인이라면 당장 ‘코리아’를 떠올리지 않을까. K-Pop이나 한류드라마, 혹은 애국심 무한증폭 국뽕을 떠오르게 한다. 듣기만 해도 다양한 반응을 일으키는 ‘K’란 과연 무엇일까. 한국인에게 K는 한국을 상징하는 기호다. 한국을 K라는 기호로 호칭해 써보겠다.
2020년 요즘 ‘K’라 하면 반복적 가사와 중독적 박자로 느닷없는 반응을 얻고 있는 판소리 그룹 ‘이날치’가 떠오른다. 이날치가 신나게 부르는 <범 내려온다>를 또한 돋보이게 하는 것은, 요상한 댄스를 추면서 슬그머니 등장하는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다. 저들의 몸부림은 장르에 얽히지 않은 낯선 댄스로 촌스러운 K옷으로 장식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이날치x앰비규어스’는 2020년에 태어난 K-아트 상품으로 주목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 쓰는 업을 가진 필자는 ‘문학’ 앞에 K를 붙여 본다. 작가들, 가령 김수영은 K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세상을 “이제 나는 바로 보마”(「공자의 생활난」)라며 세상 사물의 본질, 한계와 옳고 그름을 명확히 보려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직시했다.
그는 스스로 “흘러가는 물결처럼/지나인(支那人)의 의복 /나는 또하나의 해협(海峽)을 찾았던 것이 어리석었다”(「아메리카・타임지」)고 고백한다. 그는 흘러가는 물결이었다. 난민(難民)이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고정된 것 없는 흘러가는 물결이었다. 흘러가는 물결처럼 그는 지나(China), 중국인 옷을 입고 가족들이 사는 만주 길림성에서 연극 단원으로 배우 역할도 했다. 그러나 그 연극은 일제 식민지 체제를 찬양하는 듯한 연극으로 그는 다시는 연극을 멀리하기로 한다. 결국 “또하나의 해협(海峽)을 찾았던 것이 어리석었다”고 썼다. 어리석은 가운데도 걷고 또 걸어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아메리카・타임지」)고 토로했다. 그는 흐르는 물처럼, 찾아다니고, 어리석었지만, 걷고 또 걷는다.
그 어리석음은 포로생활을 거친 한국전쟁 이후에 서러움으로 바뀐다. 서러움 속에서도 그는 중심을 잡으려 한다. K의 고통은 곧 김수영 개인이 겪은 K의 설움이었다. K는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 팽이가 돈다”(「달나라의 장난」)며 그는 스스로 돌며 견디어 간다.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팽이처럼 돌기를 원한다. 김수영은 흘러가는 물결처럼, 찾고, 걷고, 돌면서 흐른다. 그의 탐구는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아픈 몸이」)는 견디기다.
대한민국과 김수영이라는 K를 바로 보려는 그의 탐구는 「거대한 뿌리」에서 결론처럼 나타난다. 그가 생각하는 K는 맹목적인 왕조적 전통이 아니요, 국뽕의 K가 아니다. 그렇다고 외국인들에게 이국의 문물이 신기하게 보이는 이그조티즘(異國主義)의 K가 아니다. 그의 K는 서럽고 썩어 문드러졌지만 지금도 이어져 오는 거대한 흐름이다. 그래서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거대한 뿌리」)라고 당차게 쓴다. 흐르듯이 그의 무의식에 자리잡은 진정한 K를 나열한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거대한 뿌리」에서 그는 국가주의가 말하는 전통을 거부하고, 외국인이 보는 코리언주의도 거부한다. 결국 그는 한국 자체적인 거대한 뿌리를 구체적인 사물로 지시한다. 그는 산문 「히프레스 문학론」에서 일본식 ‘총독부 문학’과 미국식 ‘국무성 문학’에 빠져 있는 한국문학사를 지적한다. 한국 작가들은 총독부 문학과 국무성 문학이라는 게토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마치 엉덩이(Hip) 부분만 도려내서(less), 히프를 자랑스럽게 흔들고 다니는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언어의 문화를 주관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이며, 그밖의 문화는 언어의 문화에 따르는 종속적인 것이며, 우리들의 언어가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을 중단했을 때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는 것이다. (김수영, 「히프레스 문학론」)
K문학의 뿌리를 명확히 고정시키지는 않았다. 가령 그가 판소리 문학론이나 민요나 시조 문학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고정시켜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영은 끊임없이 경고하며 “우리들의 언어가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도록 경고하는 임무를 맡으려 했다. 김수영은 고여있지 않는 흐름으로서의 K문화를 찾으려 했다. 그는 ‘흐름’(process)으로서의 K찾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한편 신동엽에게 K는 쇼파의 솜을 고정시키는 고정점처럼 명확했다. 신동엽은 역사의 흐름을 원수성, 차수성, 귀수성으로 설명했다. 원수성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 전 공유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나누었던 나눔의 시대를 뜻한다. 차수성은 극분업화 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극자본주의 시대를 뜻한다. 귀수성은 원수성의 장점을 끌어들여 높은 차원의 인간형을 완성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귀수성을 통해 완성으로 향하는 인간을 신동엽은 전경인(全耕人)이라고 했다.
물론 간단히 쓴 것처럼 신동엽의 세상 인식이 도식적이지는 않다. 그는 닫혀 있는 장르가 아니라, 귀수성을 향한 새로운 창작을 시도했다. 신동엽은 당대 최고의 신선한 새로운 시도를 하려 했다. 오페레타 <석가탑>을 만들 때, 당시 최고의 아방가르드 작품을 보여준 신예 작곡가 백병동 선생(현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에게 의뢰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2020년 12월 30일 눈이 매울 정도로 찬 바람이 부는 날, 나는 상도동 고개 넘어에 있는 백병동 선생님 작업실을 찾았다. 그때 일을 물으니 팔십 대 중반의 흰머리 백 교수는 편하게 답했다.
“그때는 이렇다 할 우리식 오페레타가 없던 시대였어요. 빈천한 시대였지요. 신동엽 시인이나 나나 고등학교 교사였고 한번 의미있는 걸 만들어 보자 했지요.”
내가 머슴으로 있는 신동엽학회에서 <석가탑> 악보집을 복원하면서 조금 사례를 드리려 했더니,
“그때 한 푼 받지 않고 노래를 지었고, 그걸로 기뻤지요. 학회에 돈이 없을텐데.”
쉽게 지었다고 말했으나 악보집에는 노래 36곡이 있고, 150여 페이지에 이른다. 1960년대의 예술가들은 궁핍하면서도 K아트를 만들고자 한 푼 없어도 기쁨으로 작곡하고 시를 썼다.
김수영은 신동엽 시가 품고 있는 K를 어떻게 보았을까. 신동엽 시에 쇼비니즘이 우려된다고 했지만, 반대로 신동엽 시에 있는 거대한 전통을 김수영은 예이츠의 ‘비잔티움’에 비유하기도 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평가한 김수영의 글을 보자.
제2연에 가서는 ‘4월’ 대신에 ‘동학 곰나루’가 들어앉는다. 이런 연결은 그의 특기이다. ‘동학’, ‘후고구려’, ‘삼한’ 같은 그의 고대에의 귀의는 예이츠의 ‘비잔티움’을 연상시키는 어떤 민족의 정신적 박명(薄明) 같은 것을 암시한다. (김수영, 「참여시의 정리-1960년대의 시인을 중심으로」)
김수영은 신동엽이 K역사에 어떤 ‘정신적 박명’의 순간, 에피파니의 순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직시했다. 정확한 직감이다.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에 나오듯, 신동엽은 K역사에서 에피파니의 순간을, 원수성시대, 동학농민혁명, 3.1운동, 4.19 학생의거의 순간으로 잇고 있었다. 60년대 당시 K역사에서 에피파니의 고정점을 정한 역사가는 거의 없었다.
신동엽이 고정점으로서 K를 보았다면, 김수영은 흐름[과정, process]으로서 K를 보았다. 김수영이 말하는 ‘흐름-K’, 신동엽이 말하는 ‘고정점-K’, 모두 의미가 있다. 흐름과 고정점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반복하여 일으킨다.
다시 김수영의 K를 생각하면서 다시 ‘이날치x앰비규어스’의 음악과 안무를 떠올려 본다.
거칠게 쓰자면, 판소리의 핵심은 그대로 지키면서 약간의 박자 변화를 통해 새로운 얼터너티 판소리를 보여준 ‘이날치’는 신동엽 시도와 비슷하게 보인다. 한편 서구에 유학 다녀온 안무가이자 감독인 김보람을 중심으로 장르를 파괴하고 고전발레와 현대무용과 전통무용을 융합한 21세기의 조선 도깨비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춤사위는 김수영의 시도와 유사하다.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는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K아트를 깊고 널리 알리고 있다. 신동엽과 김수영도 한국 문학에서 K의 문제를 깊이 천착하게 하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물결이다.
앰비규어스(ambiguous)는 ‘정해지지 않은’이라는 뜻이다. 붉은 정장에서 장군모를 쓰거나, 아디다스 츄리링에 붉은 갓을 쓰고, 반바지에 보부상 패랭이까지, 그들의 복장은 전통을 약간 비틀어 낯설게 하면서도, 천박할 거 같은데 이상하게 친밀하기만 하다. 저들의 팔다리는 유연하고 길고 무엇보다도 명랑하다. 거침없는 동작에서 압도적인 춤선이 뿜어나온다. 그들은 전통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김수영 시론의 핵심인 ‘반시론’도 앰비규어스 하다. 정해진 것은 없다. 끊임없이 반시(反詩)하며 새로운 지경을 겨냥하는 것이 김수영 시론의 핵심이다. 김수영의 K는 정해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흐른다. 앰비규어스를 보면 김수영이 생각난다. 유연하고 길고, 무엇보다도 명랑하기에, 거침없고 압도적으로 뿜어나오는 저 시혼(詩魂)!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무수한 반동들을 사랑하는 마음!
Comentar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