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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기획자라는 직업은 없다 / 김보슬

최종 수정일: 9월 25일

사람들은 의사, 변호사, 회계사처럼 ‘사師‘ 자가 붙는 직업을 선호한다. 이 직업들은 정년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 일할 수 있는 전문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든 대체로 인기가 높지만 학구열과 사회적 경쟁이 심한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좀 더 그러한 모양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전문직들이 비슷하게 사師로 끝나는 이름을 취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사 자가 들어가는 직업”으로 일컫는다. 그런데 직업 명칭에서 자주 발견되는 글자는 사師 외에도 가家와 자者가 있다.


건축가(建築家), 법률가(法律家), 평론가(評論家), 사업가(事業家), 정치가(政治家)에는 가家가 붙고, 교육자(敎育者), 과학자(科學者), 연구자(硏究者), 연주자(演奏者), 기술자(技術者)에는 자者가 붙는다. 이렇게 몇 가지 예를 늘어놓고 보니, 추상성을 다루는 일에 가家를 붙이고, 구체성을 다루는 일에는 자者를 붙이는가 싶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연구자는 개념을 다룬다. 그리고 연구자 대신 ‘요리연구가(料理硏究家)’라고 할 때처럼 가家와 자者를 혼용하는 사례가 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느낌이 든다. 가家가 붙는 이름은 어쩐지 가문을 걸고 대대로 이을 만한 일생의 업인 데 반해, 자者가 붙는 이름은 그 일을 행하는 자유로운 주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 하지만 어떤 이는 중국에서 “물리학가(物理學家)”라는 표현을 보았다고 한다. ‘물리학자’라는 한국어 단어에 익숙한 우리에게 ‘물리학가‘라는 말은 다소 생경하다. 대체 어떤 기준으로 어디에 가家를, 어디에 자者를 쓰는가?


명확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딘가에서는 원칙을 정해 두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반드시 따라야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그 구분은 아마 여러 가지로 가능하고, 이유도 다양하게 해석될 듯하다. 나도 나름의 구분법을 가지고 있다. 내가 경험한 예술계에서 가家와 자者 사이에는 자의적이나마 독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떠올려 본다. 이 제목은 통사적으로 ‘직업의 관점에서 본 소설가(小說家)’라는 의미를 전하며, 새삼 소설가를 직업의 반열에 올린다. 예술계에서 가家를 포함하는 직업의 명칭으로는 소설가 외에도 안무가, 작곡가, 도예가, 연출가,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작가 또는 예술가라는 말까지 있다. 이 중 상당수는 끝자를 가家에서 자者로 바꾸어 안무자, 작곡자, 연출자처럼 사용하더라도 뜻이 통한다. 그러나 그 반대도 성립할까? 자者를 가家로 바꾼다면? 예술계에서 또 하나의 직업군으로 여겨지는 기획자의 경우, ’기획가’라고 부르는 법이 없다. 제작자, 출연자를 ‘제작가’, ‘출연가’ 따위로 바꾸면 어색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나의 제한된 경험 안에서 이루어진 관찰이다. 물리학가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쓰이고 있었듯 여기에도 반례가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바라본다. 가家는 생애을 관통하는 생업의 측면을 강조하고, 자者는 상황에 따른 유연한 역할의 측면을 강조한다고. 달리 말하면 가家로 끝나는 명칭은 자신의 인생을 건 지속적 정체성을, 자者로 끝나는 명칭은 필요에 의해 택하고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일시적 정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를 안무가라고 부를 때와 안무자라고 부를 때의 태도에는 어딘지 모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안무가는 안무를 자신의 변치 않는 소명으로 여기는 사람, 안무자는 어떤 프로덕션에서 약속된 특정한 기능에 집중하는 사람으로서 서로 다르게 존재하는 듯하다. 자者 자가 가변성과 임시성을 담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무가로 살고 있습니다만 새 작품에는 연기자로 참여하려고 합니다.”

“본업은 작곡가인데, 이 공연에서는 연출자로서 흐름 전반에 관여했습니다.”

“이번에는 제작자의 임무를 맡았지만, 곧 본업인 작가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등의 서술이 가능하다.


자신을 기획자/문화기획자로 소개하는 이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그것이 자신의 영속적인 직업이라는 걸까, 한시적인 역할이라는 걸까? 내 직업은 여러 번 사람들에게 기획자라고 소개되었다. 꺼림칙했다. 그 명칭은 어느 때에만 맞고 어느 때에는 틀려서 내가 하는 일들을 일관되게 지칭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용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공연이나 전시를 진행해 본 경험과 미래에 그럴 가능성을 가진 사람을 그렇게 부르자는 모종의 합의가 있는 것 같아서 굳이 정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상 나를 부를 명칭을 찾기란 막연하다. (나를 기획자라고 부르는 이들로서도 그 막연함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내린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제껏 직업계의 이주자처럼 서로 다른 영역을 오가며 여러 가지 일을 해 왔다. 기획자는 특정한 상황에서 내가 한시적으로 맡는 역할이다. 그래서 그 역할을 맡는 동안에는 “이번 공연의 기획자입니다.”와 같이 소개되어도 무방하지만 일반적으로 기획자라고 불리는 것은 왠지 곤란하다. 그 용어는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기획을 맡는 상황이 연속된다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정체성이 형성된다면 기획자 대신 ’기획가‘로 고쳐 쓰여도 좋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기획이라는 일은 역시 者라는 글자와 만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한 곳에 머물지 말고 ‘기획의 감’을 여기저기로 실어나를 수 있으니까. 때로는 기업에 소속되어 상품과 이벤트를, 때로는 미술관에서 전시를, 그리고 지방정부에서는 공동체를 기획하며, ’큐레이터‘, ’프로듀서‘, ’에디터‘, ’매니저‘, ‘컨설턴트’, ’행정가‘ 등 전혀 다른 타이틀을 가지고 일한다. 기획 역량을 바탕으로 조금씩 다른 역할을 요구받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즈음 각종 단체에서 신규사업을 내놓으며 더 많은 용어를 개발하는 경향이 있다. 퍼실리테이터, 매개자, 협력자, 멘토, 프로바이더 등등이 더해져 수많은 명칭이 다소 무질서하게 난무한다. 기존에 기획자로 활동하던 이들이 낯선 이름으로 섭외될 때면 새로운 이름을 입은 덕분에 자신의 고유한 역할과 방향을 다시 고찰하려 애쓴다. 그러한 노력은 실로 바람직하지만 한편으로는 혼란을 가중한다. 그럴수록 기획자의 정체성이 더욱 오리무중이다.


예술계에서는 상당수의 문화기획자들이 역동적인 지반 위에 존립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능력 계발을 요구받고, 수많은 가능성을 마주하지만 불안하기도 하다. 진정으로 기획을 쉬지 않으며 ‘기획가’로 불릴 만한 이들은 상대적으로 비율이 낮다. 기관 종사자들의 경우 기획 이상으로 홍보, 의전, 행정을 많이 다루어야 하기에 점차 기획자보다는 계획가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묻고 싶다. 기획자는 과연 직업일 수 있을까? 언제까지나 역할이어도 좋지 않을까? 아무래도 기획자는 고정된 직업으로 성립되기 어려우며, 기획이라는 일은 자者라는 글자와 더 어울리지 않는가 말이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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