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기술 망각에서 기술 공포로 / 박준영

‘망각’에서 시작해 보자. 베르나르 스티글러가 ‘기술 망각’을 말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마치 일련의 우발적 경험인 것처럼 간주했다. 학계는 그를 이단아 취급했다. 일반 독자들은 말해 무엇하랴. 익숙했던 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기술적 객체들이 주변에 그토록 많음에도 한갓 관념적 ‘정의’나 ‘사랑’ 따위를 더 선호했다는 것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셈이다. 당연하게도 불과 20 여년 전까지만 해도 기술적 객체들은 말이 없고, 고분고분했으며, 죽은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그래서 심대한 역전 현상이 발생한다. 억압당해 왔던 것은 다름 아니라 기술적 객체들이고, 이제 그것들이 말을 하고, 명령하며, 우리의 신체적 역능과 감응 능력을 시험한다. 문제는 이러한 지배-피지배 역전 현상의 표면적 진행 과정이 아니다. 일상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불안이나, 어쩌면 연성 스트레스에 해당되는 잔잔한 고통을 느낀다. 내 노트북이, 내 스마트폰이, 내 은행 구좌가, 내 위시리스트는? 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과 X는 무사한가? 예측가능한 성인병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닥치는 부정맥처럼 우리는 이토록 기술적 사건의 우발성에 취약해졌다.  


이것이 망각이다. 이런 일상적인 불확실성과 미결정성은 어떤 국가적이고, 초객체적인 것들의 수작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가 (심지어 자발적으로!) 짊어지고자 한 것이다. 얼마나 친절한가? 유독 우리는 이 망각에 대해서만 그토록 너그러웠다. 이 망각의 지층이 쌓이고 쌓인 것을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인류세’라 부른다. 서울과 대도시의 골목골목에, 뉴욕 스카이라인의 그늘 주변에 쓰레기들이 널부러져 있고, 핵폐기물들이 매년 지하 어딘가에, 해저 어딘가에 묻히더라도 우리는 망각 안에서 무사하다고 믿어 왔다. 그래서 지금 불안한 것이다. 그것이 망각임을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망각을 깨달은 이유는 우리 이해의 임계치를 넘는 사건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인공지능이다. 어떤 이는 이것이 인간의 감각을 증강시키는 것에 기꺼워하지만, 어떤 이는 그러한 증강이 몰고올 행성 전체의 균형 파괴에 더 민감하다. 전자의 입장에서 인공지능은 기술적 진화의 축복이며, 후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새로운 파괴적 권능의 출현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객체의 출현이 인간의 감각 역능과 신체적 활동 범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리라는 기대는 헛되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인간적인 조건들에 어떤 묵시록적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는 예언도 과장이다. 이 둘은 모두 인공지능이 인간지능과 동일해지거나, 또는 인간지능을 넘어서는 사태를 전제한다. 이른바 특이점이다.


하지만 특이점은 오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인간을 단지 지능형 사피엔스로 파악한다면, ‘특이점이 온다’는 명제는 파괴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실존 전체를 판돈으로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로지 사피엔스의 지능만이 행성 전체의 주권을 향유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 행성은 지능의 확장팩인 구글맵의 시선으로 구획되지만은 않는다. 사실상 지능과 구글은 서로 동조하지만 그 동조는 국소적이며 동조의 파동을 애워싸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세상은 그들의 주파수 역대보다 훨씬 풍부하고 심도가 깊다. 둘러보자. 생명체들과 무기물들은 지능이 아니라 코나투스의 욕망, 눈짓과 미소, 서늘한 계절의 바람을 타고 흐르는 신진대사의 파동과 회절로 흘러 넘친다. 지능이란 빈곤하다. 우리의 신체와 감각은 지능 안에 갇혀 있지 않으며 미시적인 진동, 우주적 물질파의 장 안에서 타자와 더불어 넘실댄다. 


그것을 우리는 ‘감응’이라 부른다. 감응은 인공지능의 뛰어난 계산능력을 포용하면서, 계산가능성을 소통시킨다. 예컨대 피지컬 인공지능이 나의 클론 같은 외양을 띄고 있을 때, 나는 하이데거가 말한 ‘기괴함’을 느끼지 않을까? 기괴함은 일종의 감응이다. 그것을 통해 나는 그 사이보그에 반응한다, 얽힌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와 더불어 함께 사이보그 세상의 또 다른 사이보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술적 객체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친밀함의 감응을 가지게 되기까지 오랫동안 내밀한 시간을 같이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응이 있으므로 행성 전체는 가이아의 영성을 전체론적 수준이 아니라, 내재적 수준에서 체현할 것이다. 신진대사 전체는 이 감응의 회전이며, 되먹임 효과다. 감응은 티머시 모턴이 강조하는 것처럼 ‘미학적’(감성적)이기도 하지만, (내가 강조하는 바) ‘사변적’이기도 하다. 미학적 차원에서 감응은 인공지능을 침범하고, 측면에서 파고들어 교란한다. 이른바 할루시네이션은 이 감응적 양상의 하나일 것이다. 사변적 차원에서 감응은 인공지능과 어우러지며 인류세의 지층을 결정한다. 이 두 차원, 미학적 감응과 사변적 감응의 갈마듦이 사피엔스의 지능에 갇힐 이유는 없다. 


그렇다 해도 우리의 세상이 현재 감각의 새로운 분할을 실험하는 중인 것은 분명하다.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적 객체가 가지는 가장 큰 힘은 이 감각과 신체적 역능의 새로운 분할 혹은 배치에 있지 않을까? 분할과 배치는 양방향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것은 트랜스휴머니즘적인 낙관론 안에서 감각과 신체의 확장에 골몰한다. 반면에 감각은 새로운 경험적 데이터의 누적이 없이 동일한 정보들의 반복과 알고리즘 안에 갇혀 메말라 간다. 


확장의 감각은 인공지능이 보다 잘 길들여지고, 완벽한 보철물처럼 우리 신체와 감응하면서 그간의 기술적 성과들에 소급되는 과정을 수반한다. 사실상 중요한 것은 이 소급적 확장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확장 안에서 그간 대개의 기술적 객체들이 가졌던 감응의 양상이 대체되거나 전면 수정된다. 스마트폰 안의 인공지능은 우리가 어떤 작업을 위해 필요로 했던 여러 과정들을 생략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도서관을 가지 않아도 되며, 서점에서 한참 동안 서가를 탐색하지 않아도 된다. 업무환경은 더욱 즉각적으로 변하고 속도는 빨라진다. 


다른 한편, 신체적 경험은 축소된다. 여기서 ‘신체적 경험’이란 단순 감각 경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재현적 차원의 경험만이 아니다. 그것은 재현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무의식적 경험까지 포괄한다. 단순 감각 경험은 감응의 신진대사 안에서 관계의 실재성을 요구하지만, 무의식적 경험은 그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감각 경험의 단순한 되먹임을 넘어선 창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축소되는 것은 주로 이 무의식적 경험의 영역이다. 그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재현적 경험도 늘 축소의 위협에 시달린다.


인공지능이 달성하는 신체적 경험의 재배치는 보철물의 확장과 경험의 빈곤화를 동시에 수행한다. 여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도의 공포와 불안이 놓인다. 확장이 가져오는 쾌감과 빈곤이 암시하는 창발성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나란히 붙어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과 이제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절망이 새로운 신체적 배치의 효과다. 양극단 간을 오가는 감응의 양상이 초래하는 것은 전쟁의 게임화(이란 전쟁에서 클로드의 활용을 보라)와 게임이 점점 더 현실과 구분불가능해 지는 것으로 수렴된다. 이런 경우 타자에 대한 실제적 감수성의 약화는 필연적이다. 게다가 창발성이 사라지는 상황이므로 어떤 획기적인 해결책도 나오지 않는다. 더 나아가 자본과 국가는 이 찢어진 감응의 양상 주위로 참호를 파고 권력과 화폐의 궁지 안으로 모든 행성적 자원들을 몰아 간다. 


새로운 인류의 망각과 붕괴. 프롬프트: 오영진. 미드저니 봇.
새로운 인류의 망각과 붕괴. 프롬프트: 오영진. 미드저니 봇.

사태는 이러하다. 우리는 기술망각의 상태에서 깨어나자 마자, 기술적 절망과 쾌락 사이를 오가는 불행한 신체, 우울증적 신체가 되었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과 지식으로 일상적 판단에서 주식투자, 그리고 핵전쟁에 이르기까지 기획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허약하다. 이제 그 누가 그러한 기획으로부터 우발적인 파괴, 전면적인 금융공황, 더 나아가 코로나 19와 같은 생물학적이고 인류학적인 사태가 발생지 않으리라고 보겠는가? 우리는 그 파괴적 사건이 도래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 왔으나, 이제 그것은 불가능해졌다. 허무주의에 직면한 것이다. 


그런데 브뤼노 라투르와 육후이 그리고 티머시 모턴과 같은 최근의 철학자들은 상황의 전개가 점점 서구-유럽 중심성에서 나온 개념들로 설명하기 힘들어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의 개념과 사유가 국지적인 서구적 사유라고 말한다. 허무주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행성적 행위자로서 인간이 대지적 맥락에서 ‘완전히’ 추방되는 사태에 대한 예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추방 혹은 멸종은 감응의 신진대사 안에서 중차대한 사건이지만, 우주적 과정 안에서 필연적이며, 어떻게 보면 사소하다. 중요하지만 사소한 것, 역설. 허무주의를 건너가는 길은 여기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금의 신체적 배치가 은밀하게 도모하는 죽음의 탈주선을 타자와 더불어 함께 살아 가는 에로스의 탈주선으로 만드는 것은 서구적 관념을 넘어 다른 국지적 개념으로 사유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유’를 준비하자. 인공지능이 자신을 학습할 때 깊숙히 연루된 서구-유럽적 지식이 아니라, 이질적이고, 기괴한 사유, 우리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야생적 사유를 길어 올리자. 이렇게 해서 감응의 신진대사는 인공지능이 초래하는 새로운 감각적, 신체적 배치를 죽음에 맞서는 전사, 알고리즘에 길들여지지 않는 투사를 양산하는 마중물로 활용할 것이다. 그들은 예술가-혁명가-철학자-이주민-비정규직-소수자-기술자 ... , 우리 자신들이다.



박준영(철학자, 수유너머 파랑 회원, nomadia@naver.com)
박준영(철학자, 수유너머 파랑 회원, nomadia@naver.com)



   

 

Comments


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Thanks for submitting!

  • White Facebook Icon
  • 화이트 트위터 아이콘

© 2019. RIKS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