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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앎과 무지의 서사물 / 조대한

영화 기생충 결말부의 뉴스 화면에는 ‘대낮의 고급주택가 칼부림’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 정보값을 근거로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면 그것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악의적인 의도로 사기 행각을 벌였던 일가족 중 한 명이 고급주택에 살고 있던 고용주 박 사장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

이는 틀리지 않은 설명이지만 완전히 맞는 설명이 아니기도 하다. 영화의 서사를 지켜본 관객들이라면 이 명료한 단문에 많은 부분이 소거되어 있다고 느낄 듯싶다.

그렇다고 이 설명이 마냥 과장된 거짓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실제 살인을 저지른 김 씨와 피해자 박 사장 가족 간의 첫 만남은 김 씨의 아들인 기우의 악의적인 거짓말로 시작된다. 기우는 본인뿐만 아니라 여동생 기정까지 그 사기극의 공범으로 합류시킨다. 피자 박스의 조립 불량으로 수당이 깎이고 와이파이의 도용마저 차단당하는 안쓰러운 한 가족의 경제적 활로가 된다는 점에서, 그들의 거짓말은 차후 성립할 미래를 미리 당겨왔을 뿐이라는 낭만적 패기로 포장되거나 또는 문서위조학과라는 해학적 유머로 잠시 그 실체가 가려진다. 하지만 그 서사적 옹호가 그들이 기만과 거짓을 행했다는 사실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김 씨 가족의 윤리성에 더욱 의심을 가지게 되는 지점은 그들이 다른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으면서부터이다. 운전기사로 일하던 윤 기사와 가정부로 고용되어 있던 문광은 성격적으로 미움을 살 만한 여지는 있었으나, 직장을 빼앗겨야 할 정도의 죄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칼부림이라는 비극적 결과까지는 의도치 않았다한들, 김 씨 가족의 행위가 명백히 고의적인 속임수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 사건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가해자임이 분명해 보인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겉으로 대단해보였던 상류층 가족의 무지가 드러나는 장면이나 그들이 별 것 아닌 허위와 교양에 속아 넘어가는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모종의 통쾌함을 선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박 사장네 일원들이 가족 살해의 끔찍한 광경을 눈앞에서 겪어야 할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부와 계급이 이야기의 주제로 선택되는 서사물에서 윤리적 대의는 약자에게 부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부자니까 착하고 구김살이 없다는 김 씨 가족의 진심 어린 농담처럼 이 영화 속에서 박 사장의 가족은 최소한 악의적인 기만으로 누군가를 속이진 않는 평범하고 순수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타인을 속이고라도 살아남아야한다는 생존 경쟁의 논리와 앵글의 집중에 따른 앎과 이해의 비대칭을 잠시 내려놓는다면, 이 신자유주의적 비극에서 박 사장의 가족은 김 씨 가족에게 물질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확고한 우위에 있다.


의도적 접근으로 시작된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김 씨 가족을 옹호할 여지가 전혀 없는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김 씨 가족에게는 관객이 그들의 사정을 더 잘 알고 이해하고 있다는 서사적 몰입의 우위가 있다. 여러 서사적 포인트가 있지만 특히나 영화의 실물감이 급격히 전환되는 폭우 장면을 언급할 수 있겠다. 폭우는 박 사장 가족에게 가족 이벤트로서의 캠핑이 취소되는 정도의 짜증일 뿐이지만, 김 씨 가족에게는 집안 살림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온몸으로 물살을 갈라야 하는 현실의 재난이다. 비가 와서 미세먼지가 사라진 맑은 주말, 박 사장 가족은 막내 다송이의 방수텐트를 중심으로 한 가든파티 무대를 펼친다. 그리고 재난 구호소에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두 명의 과외 교사, 운전기사, 가사도우미 모두를 호출한다.



김 씨 가족이 악용했던 박 사장 가족의 순수함과 앎의 부족은 그렇게 뒤집어진 무지의 폭력이 되어 그들에게 돌아온다. 아이의 깜짝 생일 파티를 위한 고용인으로서 집단 호출된 가족의 비참한 처지, 흉기에 찔려 죽어가는 딸 기정의 모습, 차례차례 누적된 냄새의 서사들은 점차 붉어지는 김 씨의 임계점을 초과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박 사장을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이 영화를 지켜본 이들은 그들 사이에 한 가족이 더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이 서사는 비 오는 날 갑작스레 재등장한 가정부 문광과 그녀의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비극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았을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 씨 가족은 자신들의 실체를 들키지 않으려는 다툼 과정에서 문광의 목숨을 앗아갔다. 가족의 일원을 죽이고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찬탈한 이들을 향한 응분의 복수를 행사했다는 점에서, 문광의 가족 또한 사라진 피해자이자 정당화될 수 없는 가해자인 셈이다. 지하에 억눌러져 가까스로 유지되던 산뜻한 일상의 무지는 대낮에 흉기를 들고 나타난 이의 난동과 보복으로 인해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고전적인 비극이 계획된 신탁의 진의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의 추락 과정을 그려낸다고 말할 수 있다면, 봉준호의 이 현대판 비극은 앎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던 인물들이 맞이해야 했던 계획되지 않은 우연의 폭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비를 이룬다.


지금까지의 짧은 논의를 돌이켜볼 때, 이 영화는 ‘대낮의 고급주택가 칼부림’이라는 단문의 행간을 채우는 서사적 과정에 가까울 터이다. 한데 그 서사의 종결 이후 해당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이해가 이전보다 명료해졌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속이기 위한 이들과 들키지 않으려는 이들 사이의 생존을 건 아귀다툼이 있었고 암묵적인 방치에 가까운 누군가의 무지가 있었다. 각자의 책임 소재와 응분의 복수들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그만큼의 피해를 입을 정도의 잘못은 누구도 저지르지 않았기에 마음은 더욱 찜찜해진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해보자. 앎과 실체가 전부 밝혀진 이 서사가 명백한 가해자의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꾼다거나, 모든 등장인물의 죄과를 용서하게 만드는 건 분명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적된 누군가의 시간과 이야기는 그 서사를 지켜본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을 바라보기 이전의 명료한 단문의 세계로, 다시 말해 어떤 불편함을 알게 되기 이전의 산뜻하고 홀가분한 무지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조대한(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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