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이겼을 때만 해도, 비록 기계에 4번을 패했어도 인간 이세돌의 1승을 자축할 수가 있었다. 인공지능이 가진 연산 능력의 거대함 앞에서 인간적으로 작동했던 직감이 허를 찔렀고, 이 신의 한 수를 잘 분석한다면 인공지능 앞에 인간의 지위를 세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전개는 예상과 달랐다. 기계의 1패는 작은 실수에 불과했고, 이를 금세 극복해 과거의 알파고보다 수백 배 강해진 인공지능으로 돌아와 버렸다. 더욱이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게임 자체의 성격을 바꾸어 버렸다. 모든 바둑기사가 인공지능을 통해 수를 훈련하면서 인간계에서는 의미를 알지 못했던 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 기사들의 대결은 실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협업 간의 대결이 되었다. 이는 우리가 기계와 대결하는 것이 일종의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작 중요한 것은 기계가 우리와 어떻게 공모하고, 우리를 바꾸게 되는가이다.
2022년은 거대언어모델과 text to image 모델의 대중화로 인해 인공지능이 대중적으로 확산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특정한 규칙이 있는 바둑 게임의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어를 기계가 거대한 신경망을 통해 집합론과 확률적인 원리에 의해 이해하고 발설한다. 물론 이때 이해는 인간의 이해와 다른 것이다. 기계만의 이해 방식이 있다. 기계는 반복되는 것을 잘 찾아내고 그 안에서 패턴을 파악하는 데 능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반복이 기계에는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넌댄스 댄스>의 연출진은 방대한 유튜브의 공연 영상(주로 무용)을 학습시켜 기계가 공연이라고 판정하는 능력을 얻게 한 뒤, 기계의 판정을 공연 자체에 활용해 보는 방안을 내었다. 이는 두 가지 모순된 의미를 발생시킨다. 첫째, 인공지능이 인간의 춤을 어떻게 학습하는가에 대한 탐구다. 기계를 인간과 대결하는 위치에 놓지 않고, 그것의 탐색 능력을 발아시켜 과연 인간의 몸짓을 담은 영상은 어떤 특징이 있는 지 알려는 시도다. 둘째, 인공지능이 획득한 학습의 결과물 즉 ‘어떤 패턴’을 벗어나는 또 다른 무용을 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시도다. 이는 우리가 몸짓의 한계를 기계의 인식 능력 밖으로 밀어내 다른 무용의 꼴을 얻는 실험이 된다.
언뜻 전자는 기계에 대한 탐구, 후자는 인간에 대한 탐구로 보인다. 하지만 이 양자가 충돌 없이 공존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시도가 기계가 인간의 춤을 정복하고 구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나 인간이 기계보다 여전히 춤을 잘 구상하고 출 수 있느냐는 대결의 구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의 두 가지 질문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기계와 인간의 잠재성을 겨냥하고 있다. 즉 이들은 하나의 자리를 가지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앞서거니 뒤서거니 추월해 보는 놀이를 하는 것이다. 이 놀이의 의미는 경쟁에 있지 않고, 양자가 번갈아 가면서 자리를 양보하며 어느새 훌쩍 다른 곳에 와 버리는 이동의 즐거움에 있다.
<넌댄스 댄스>는 본격적인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면서, 의미 없는 기계의 포획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인간과 기계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꾀해 의미를 찾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공연은 인간 무용수가 인공지능이 판정하는 댄스 판정을 피해 넌댄스 판정받은 동작만을 모아 즉흥으로 춤을 추는 퍼포먼스이다. 기계가 인식하지 못하는 춤은 기계가 이해해야 할 인간의 미지 영역으로서 새로운 목표가 되며, 반대로 인간에겐 알고리듬 밖으로 탈출하는 자유를 선사한다. 양쪽의 일은 인간과 기계의 놀이이다. 앞으로 거대테크기업들은 우리에게 기계와 인간이 벌이는 세기의 대결을 관람하는 쪽을 제안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언제나 도구나 기계와 함께 해 왔던 존재다. 목수가 망치와 싸우지 않듯, 새로운 예술가들은 인공지능과 싸우지 않는다. 오로지 즐거운 창작을 할 뿐이다. <넌댄스 댄스>의 시도가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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