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와 기계주의
근대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것은 기술들이 인간행위의 보조기구로 그치지 않고, 스스로 그 행위와 의미를 생성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는 것이었다. 어떤 기계가 현장에서 사용되면 일의 방식과 속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에 접근하는 생각의 방식도 바뀌게 된다. 일찍이 장자가 機事와 機心을 구분하고, 기사가 기심을 낳는다고 했을 때1), 통찰 한 것이 이 지점일 것이다. 기계에 대한 의존증이나 게으름을 품는 등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기계적 사고방식이 곧 하나의 언어로서 작동하고, 이러한 언어의 지배 속에 놓이게 되는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엥겔스는 인간이 과학과 기술에 연루되어 있는 방식 자체에 불가피한 권위주의가 깊이 뿌리내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그의 지식과 발명의 재능을 가지고 자연의 힘들을 굴복시켰다면, 그 자연의 힘들은 인간에게 이용되는 대신 인간을 모든 사회조직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타당한 독재에 굴복시키는 것을 통해 복수한다.”2) 즉 근대의 기계는 기계의 위력과 별개로 엄격한 위계를 따르는 복종의 마음 즉 근대적 기계주의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이는 기술의 발전을 인류가 최초에는 인간의 유기적 신체에 종속되어 있었던 목적합리적 행위의 기능 범위의 기초적 구성부분들을 차례차례로 기술적 수단의 영역으로 투사하고 자신은 해당의 기능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때, 더욱 아이러니한 결과처럼 보인다. 즉 인간은 자신 내부의 것을 기술적 형태로 외부화하고, 이것의 효과가 언어와 이데올로기로서 다시 주조되어 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인간과 기술의 관계맺음의 전부라면 우리는 기계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되돌려 받은 것에 가깝다. 기술에 대한 열망과 그에 대한 비관 모두 이러한 관점에서 주조된다.
반면, 시몽동은 이러한 기계주의의 악순환은 인간과 기계의 개체 간 짝짓기가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3) 그 역인 짝짓기의 성공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의 관점에서 인간은 기계를 조종하거나 활용하는 존재자가 아니라 본래부터 기계의 조절에 참여하는 존재자로서 있었온 것이기에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노동과 생산력의 목적지향적 관계로 보기만 해서는 그 관계의 본질을 잊기 쉽다고 본다. 실제로 공장 안의 노동자라 할지라도 계획된 컨베이어 밸트의 흐름 속에 단지 끌려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 구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기계들을 제어하고 이를 자기 역량으로 재흡수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약 노동자의 소외가 발생한다면, 그 소외는 생산력 앞의 소외가 아니라 조작적 관계맺음의 실패로서 소외인 것이다. 소외의 정의를 달리 내리는 이유는 “기술성이 노동의 위상인 것이 아니라 노동이야말로 기술성의 위상에서 인식되어야만 한다.”4)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관리방침이 아니라 작동 중에 있는 앙상블의 ‘자기-조절’을 담당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증명하곤 한다. 여기서 ‘조작’, ‘조절’ 등의 개념은 기계에 대한 인간의 명령과 그에 대한 이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기계의 앙상블이 프로그래밍을 벗어난 우발성들을 받아들이고 재조정한다는 의미에서 감응적 관계를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은 기계-인간의 센서이며, 자신의 신체를 센서로 변용하여 새로운 역량을 획득한다.
시몽동은 근대의 자동화된 기계보다 망치를 든 장인이 기술성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망치를 든 인간은 자신의 근력을 동력으로 사용해 무엇인가 내리친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속도와 자세를 변화하는 작업상황에 맞추어 끊임없이 변경할 수 있다. 숙련됨이란 노동행위를 둘러싼 종합적인 상황을 한 순간에 판단하고 조정하여 적당한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의 획득을 뜻한다. 이렇게 구현된 망치-인간은 자기조절이 가능한 자동기계다.
반면 소위 자동기계들이야말로 센서의 부족과 조절기능의 미비로 인해 되려 손이 많이 가는 기계로서 실은 자동기계가 아니다. 여기서 기술성은 기계의 능력의 정도가 아니라 새롭게 입수되는 정보를 형태로 재구성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기계의 기술성은 ‘후험적인 것을 선험적인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증대된다.
박경근의 작품 <1.6초>(비디오, 2016)는 자동차 조립공장에서 생산라인의 로봇속도를 1.6초 높이려는 사측과 기존 작업속도를 유지하려는 노동자의 실제 싸움을 소재로 하고 있다. 당겨진 1.6초는 우리 시대 자본의 속도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지 빠르다는 문제뿐 아니라 생산성 분석에 맞춰 미세하게 조정된 수치에 대한 신뢰, 노동자의 몸을 기꺼이 기계에 맞춰야 한다는 믿음이 문제가 된다. 달려오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쩔쩔매던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은 이제 인간적 신체의 한계 너머 밀리초 단위로 분절되고 시험당한다. 결국은 사측이 밀어부친 결과 생산라인의 속도는 전보다 빨라진다.
그런데 이 작품의 아이러니는 아무도 없는 공장에서 1.6초 빨라진 생산라인이 마치 제 스스로의 리듬을 되찾은 듯, 전보다 더 활기차게 보인다는 점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생산력을 둘러싼 싸움의 프레임으로만 보면 자본가의 승리를 자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기계가 자본가와 노동자 양자 사이를 매끈하게 빠져나가는 장면이다. 기계는 관객 앞에 단지 자신의 역량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같이 때로는 빠르거나 느리게 리듬에 맞춰 춤출 것을 유혹하고 있다. 이 유혹에 응하지 못한다면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실은 기계로부터 소외된 존재다.
기술철학이 기술을 통한 인간의 역량확장에 집중했을 때, 우리는 기계주의의 역습만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 반대 역량확장에 대한 신화만을 신봉할 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인간만을 사유한다. 하지만 기술에 대한 철학은 인간성이 아니라 기술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이는 기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성이 무엇으로 새롭게 진화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분석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은 우리 사이에 있는 매개체 같은 것이 아니다. 차라리 메를로 퐁티가 말한 바 ‘살들의 접힘’5)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힘이 아니라 살로서 기계를 맞이하는 일은 동력혁명-힘을 기반으로 한 근대적 기계주의가 시작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이 글은 계간 <현대비평>3호에 실린 필자의 글 기계비평론의 일부를 편집 수정한 원고입니다.
1)有機械者 必有機事 有機事者 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기계가 있으면 기계의 일이 있고, 기계의 일이 있으면 기계의 마음이 있다. 가슴에 기계의 마음이 있으면 순백은 사라진다.” 莊子, 外編-天地篇
2)Friedrich Engels, “On Authority”, in The Marx-Engels Reader, ed. 2. Robert Tucker (ed.) (New York: W. W. Norton. 1978). 732. ; 랭던 위너, 손화철 저, 『길을 묻는 테크놀로지』, 씨아이알, 2018, 44p에서 재인용.
3)질베르 시몽동, 김재희 역,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2011, 그린비.
4)위의 책, 345p.
5)Donna Haraway, 『When Species Mee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8, 249p.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