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너머로, 그 사이로: 수잔 레이시 <Across and In-Between>(2018)에 관하여 / 김보슬

금융, 기술, 법제, 미디어, 고용의 발달은 이주의 길을 넓혔다. 이제 우리는 출신국으로의 역이민, 제3국으로의 재이민, 여러 국가에 가족 구성원이 나뉘어 살며 왕래하는 거주 형태를 모두 포함한 초월적 이주의 시대를 맞았다. 빈번한 교역과 접촉은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차이를 표면화시켜 때로는 갈등을, 때로는 융합을 낳는다. 나라와 문화 사이에서 경계는 있어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눈을 부릅뜨고 확고히 해야 할 것이 되기도 한다.

초국가주의(transnationalism)는 다문화사회의 진전으로 이주자들의 인적‧문화적 네트워크가 국경을 초월하여 증대된다는 이론이다. 이주자에 의해서 출신국과 정착국 간에 발생하는 사회적 관계 자체와 그 유지에 관심을 갖는 초국가주의는 문화의 국제적 이동을 네트워크로 해석하고, 이에 정치적‧경제적‧민족적 맥락에서 동시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다문화사회의 진전 속에서도, 초국가주의는 자국의 이익을 명목으로 하는 실용주의의 도전을 받기도 한다. 유럽연합(EU)으로부터의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를 결정한 영국은 그것이 2020년 1월 발효되기까지 약 4년 6개월에 걸쳐 지난한 소요를 경험해야 했다. 이에 관련한 두 차례의 공식 협상 과정에서 커다란 과제로 부상한 사안들 중 하나가 바로 ‘백스톱(backstop)’ 조항이었다. 백스톱은 아일랜드-북아일랜드 간 국경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영국의 EU 탈퇴 후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영국령인 북아일랜드 사이에서 하드보더(국경을 엄격히 차단하고 통관과 통행 절차를 강화하는 조치)를 피할 수 있도록 영국과 EU가 영국을 당분간 EU 관세동맹에 잔류시키기로 타협한다”는 조항이었다. 영국 내 브렉시트 강경파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백스톱 설치안은 결국 무효화되었으나, 명시적 국경이 시민의 일상에 어떠한 효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볼 계기를 제공했다.

[사진 1. 아일랜드(좌)-북아일랜드(우) 간의 국경, Shauna Corr.]

이미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Anglo-Irish Treaty) 체결 이후 100여 년간, 하나의 섬은 두 개의 아일랜드로 구분돼 있었다. 다만 양측 모두 EU 회원국 자격을 유지하는 한, 한 나라처럼 무역과 교류가 자유로웠다.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그 자격을 박탈하면 어떤 식으로든 분리가 취해질 것이 예상됐다. 2018년, 이 지역에 닥쳐올 모종의 단절을 앞두고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미국의 미술가 수잔 레이시(Suzanne Lacy)는 퍼포먼스 작품 <Across and In-Between>을 펼쳤다. 국경 양쪽의 마을 주민들을 모두 개입시킨 이 작품은 브렉시트의 첨예한 쟁점들이 쏟아지는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변방 거주자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정치적으로 경계 지워진 것들이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바라볼 것을 촉구했다.

수잔 레이시는 경계가 정체성 확립에 어떻게 관여하고, 일상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심을 모으고자 했다. 영국 예술후원기금 ‘14-18 NOW’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국제예술제(Belfast International Arts Festival)’로부터 지원을 받은 이 작품의 실질적 실행 주체는 작가와 함께 뜻을 모은 300여 명의 국경지대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명시적, 암시적 다양한 차원의 경계들을 주제로 걸고 지역단위별 공청회, 거주민 구술채록과 같은 유의미한 단계를 함께 이끌어냈다. 이 작품의 최종 결과물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 The Yellow Line: 행정구역 상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모두에 걸쳐지거나 국경에 면해있는 다섯 지방 Fermanagh, Donegal, Leitrim, Cavan, Monaghan을 무대로 하여 농부, 목축업자, 보이스카우트 단원들과 같은 그곳 주민들을 비롯하여 등산객, 방문객 등을 등장시킨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풍경 속을 누비며 집단으로 ‘노란색 선 긋기/지우기’의 상징적 행위를 통해 경계의 주인이 되어도 보고, 경계의 의미를 탐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참여자들이 들려주는 미래에 관한 솔직한 낙담과 소망을 모두 담아냈다. 영상은 세 개의 대형 화면을 가로로 이어붙여 파노라마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2018년 10월 벨파스트 국제예술제 기간 중 매일 저녁 세 시간 동안 벨파스트 얼스터박물관(Ulster Museum) 외벽 위에 영사되었다.

[사진 2. 박물관 외벽에 영사된 ‘The Yellow Line’, 사진_Helen Sloan.]

[사진 3. ‘The Yellow Line’의 한 장면, 사진_Helen Sloan.]


2. Border People’s Parliament: 브렉시트 논란이 한창이던 2018년 10월 20일, 작품에 참여 중이던 주민 150명이 북아일랜드 의회 건물을 찾았다. ‘국경주민의회(Border People’s Parliament)’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행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면밀한 준비와 연출 끝에 진짜 의회의 큰 방에 모이게 된 이들은 초대받은 사람들과 국경지대의 풍경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동안 대화는 녹음되고, 발언자들의 모습은 사진으로 기록됐다. 신자유주의, 산업별 노조주의, 국가주의가 경합하는 세상에서 이 '의회'는 국경 생활을 위한 개인과 공동의 성찰 장소를 추구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저녁을 먹으며 이들은 ‘The Yellow Manifesto – The True Account of A Border and People’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이틀 후 BBC 라디오 4 <Today>를 통해 방송되었다.

[사진 4, 5. ‘Border People’s Parliament’의 현장, 사진_Helen Sloan.]

<Across and In-Between>은 국경지대의 삶이 직면한 정치적 이슈를 재치 있게 끄집어내면서, 복잡한 문제에 창의적으로 대응하는 예술의 놀이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벨파스트 국제예술제에서 작품 공개를 앞두고 있던 2018년 10월, 수잔 레이시는 이렇게 설명했다. "보이지 않는 국가 간 경계를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다. 개인적‧상징적 차원의 경계, 또는 정치세력에 의해 그어진 경계에 관하여 의견이 오가는 장을 만들고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예술 작업은 서로 충돌하는 패러다임들을 더듬곤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 시골과 도시, 실제의 분리와 상상 속의 것…. 짧은 기간이었으나 우리는 두 나라 사이 국경지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의식과 정체성이 있음을 외부에 호소했고, 놀이를 빌어 여럿이 함께 그것을 더듬어 보았다."


[영상 1: <Across and In-Between> 트레일러 영상]

인터뷰에 응한 주민들은 출근길이 멀어진다고 걱정, 농부들은 원래 소를 먹이던 곳까지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며 걱정이었다. 아일랜드 특유의 회색 하늘과 회색 바위, 녹색 풀과 황토색 절벽으로 가득한 경관이 이 국경지대를 무심히 덮고 있지만 보이지 않게 그 속에는 두 나라를 가르는 선(線)이 흐른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너머로, 그 사이로 파고들어 새로운 자국을 대범하게 남겼다. 회색과 녹색 위로 명료하게 도드라지는 노란 선. 다름 아닌 이것이 초국가주의의 실체가 아닐까.

이주자는 정치적으로 거주국의 지배를 받지만 경제적 활동과 문화적 활동은 거주국의 영토를 벗어나 출신국 또는 제3국과 연결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에 국제화를 이해함에 있어 초국가주의적 관점은 유용하다. 특히 우리나라도 분단, 대북 문제, 탈북민 수용 등을 거치며 이분법을 내면화하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초국가주의 현상의 한 가운데에 놓이게 됐다. 얼마 전에 접한 유튜브 채널 ‘김영철 콤프레샤’에서 김영철 씨는 탈북자 출신인 스스로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법률적, 정치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외국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냉정한 그의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그걸 인정해야 사정없이 외롭지 않을 터이다. 경계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은 국적을 바꾼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주체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도 요구되는 연습이다. 끝없이 경계를 저 멀리 바깥으로 밀어내버리고 허겁지겁 중심으로 뛰어가려고만 해서도, 경계를 회피하면서 초월을 가장해서도 안 된다.

<Across and In-Between>이 주는 교훈은 나와 남이 다르다는 것을 선언할 필요나 그걸 이해해 달라는 주장이 아니라, 정치적 분리에도 어쨌든 유연함와 관대함으로 대처해 보겠다는 여유로운 자세일 것이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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