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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유의 역사를 꿰뚫는 탐문의 길, 『정신의 발견』 서평1 / 정준영

최종 수정일: 2020년 7월 22일

스넬의 『정신의 발견』은 20세기의 기념비적인 고전학 저술이다. 우리는 호메로스에서 시작되는 이 책의 논의를 보자마자 저자가 언어를 다루는 솜씨와 문헌학적 통찰력에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문헌학적 업적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예민한 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서 서사시와 서정시, 비극과 같은 그리스 문학 작품들의 의미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또한 자연과학과 철학의 주제를 논의할 때는 과학 정신과 철학 정신의 핵심을 찌르는 면밀한 분석과 논증의 능력을 보여준다. 첫 출간이 된 지 70여 년이 넘었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즐겨 읽는 이유는, 이 책이 문학과 과학과 철학의 날실들을 문헌학이란 씨실로 거미줄같이 아름답게 직조한 구성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은 역사서이다. 스넬은 어떻게 해서 고대 그리스에서 정신 또는 영혼 개념이 발견되고 발전되는지를 역사적 과정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그런데 정신은 자기를 이해하는 한에서 자기의식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스넬의 가정이다. 이를테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경우와 정신을 발견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역사 속에서 정신의 자기 이해와 자기의식이 나타나는 과정을 통해 문제를 고찰하려 한다.


그렇다면 정신이 자신을 의식하는 역사적 과정을 어떻게 발견하고 서술할 수 있을까? 스넬은, 헤겔이 의식의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을 어의(語義)의 발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의 문학 장르가 등장한 시대순에 따라 서사시, 서정시, 비극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을 분석하고, 그런 다음 역사, 과학, 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정신의 발견과 발전을 이야기한다. 스넬은 철저하게 언어학적 접근, 좀 더 한정해서 말하면 사전적 접근(lexicon approach)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스넬은 호메로스에서는 육체 자체를 통칭하는 용어가 없고, 마찬가지로 정신 또는 영혼 자체를 통칭하는 용어가 없다는 데 주목한다. 아닌 게 아니라 호메로스 심리 용어 중 프쉬케(psychē)는 죽을 때 인간을 떠나는 혼백을 가리키고, 튀모스(thymos)는 흥분과 같은 감정적인 것을 포섭하며, 노오스(noos)는 지적인 것을 포괄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마음’이나 ‘영혼’처럼 인간의 심리 또는 정신 영역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는 호메로스 사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스넬은 이 같은 언어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호메로스 인간에게는 정신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언어가 없으면 사유가 없다는 형이상학적 가정을 기반으로 한다. 즉, 스넬은 ‘영혼’을 통칭하는 용어가 없기 때문에 호메로스에서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그는 ‘영혼’과 ‘정신’을 호환해서 사용한다.) 그렇다면 그리스에서 ‘정신’은 언제 나타나게 되었을까? 스넬은 서정시가 등장하면서 인격적 개성이 자각되는 것을 일차적으로 주목하고, 그런 다음 비극에 가서야 행위자가 숙고를 하며 행동의 결단을 내리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본다. 정신의 자기의식적 결단은 비극에서 비로소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과학과 철학의 발생 배경에는 신화적 사고와 논리적 사고의 대립이 놓여 있다고 본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스넬은 언어학적 설명을 시도한다. 그는 그리스어 정관사가 추상화의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보편을 특정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랬다면 형용사나 동사를 개념적으로 고정시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정관사가 없었다면 그리스 철학의 추상적 사유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스넬의 결론적 진단이다. 이런 점에서 스넬의 해석은 언어의 존재와 발전에 사유의 존재와 발전을 대응시켜 설명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12장에서는 언어 속에 정신의 구조가 ‘닻을 내리고 있다(anlegen)’는 주장까지 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간략히 논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자.)


우리는 스넬의 해석과 관점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아름다움 자체’처럼 ‘자체성’을 강조하는 플라톤 철학의 경우 정관사가 없었다면 그런 사유를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건 거의 명확한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떠올릴 때 스넬의 설명에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스넬의 용어적 접근이 그리스의 모든 시대를 이해하는 데 타당한 방법일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우선 용어가 없으면 개념 또는 사유가 없다는 형이상학적 가정이 보편적으로 참일지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그런데 세부 주제 중 그의 해석과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많은 주제는 호메로스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호메로스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 보도록 하자.


그의 해석에서 호메로스 인간은 개성도 없으며 외부의 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결단도 내리지 못하는 존재이다. 즉 능동적 행위자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이 같은 스넬의 관점에 대해서 여러 차원의 신랄한 비판이 수많은 고전학자들에 의해 시도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진행중이다. 예를 들어 윌리엄스(B. Williams)나 길(C. Gill)과 같은 학자는 스넬의 인간 이해가 지나치게 근대적이라는 근본적인 비판을 가한다. 스넬은 자기의식을 정신 존재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칸트적인 관점이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여기서 상세하게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아쉽게도 국내에는 별로 소개가 안 되어 있지만, 20세기 후반 이래 스넬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압도적이다.)


서평자가 보기에 서양 근대의 시각을 보편화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행위자 자격 조건을 스넬처럼 ‘자기의식’ 여부에서 찾는 것은 지나치게 좁은 근대적 기준이기 때문이다. 스넬은 서문에서 “우리는 초기 희랍 문화의 증언들을 지나치게 우리의 근대적 상상에 따라 평가함으로써 여전히 희랍적 사유의 발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그의 발전론적 설명을 보면 호메로스와 같은 옛날 시점에 대해 ‘...가 없다’, ‘...를 아직(noch) 알지 못했다’는 식의 표현이 아주 자주 사용된다. 여기서 ‘...’에 해당되는 내용들은 근대적인 것들이다. 이는 스넬이 은연중에 근대적 기준을 선취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호메로스 영웅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같은 영웅은 자기 존재(자아)를 자기의식을 통해 확인하기보다 타인 또는 공동체의 일원에게 확인받기를 원한다. 명예 가치를 추구하는 명예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시인 호메로스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 지평 속에서 자기 존재를 구성하려고 한다. 즉, 호메로스 영웅들은 서사적 지평 속에서 자신을 이야기로 표현하고 또 이야기로 자신을 구성한다. 적어도 스넬이 후자의 측면에 대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스넬의 결론이 보편 타당하게 수용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학자들의 논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듯하다. 스넬의 한계가 없지 않지만 그리스의 정신사를 여전히 발전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한 노선이 있고, 이에 반대해 스넬의 발전론 자체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보는 노선이 있다. 후자와 관련된 2010년대의 논의 중 호메로스와 연관된 주요 논의를 소개한다면, 롱(A. A. Long)과 같은 학자는 호메로스를 해석할 때, 스넬처럼 육체와 정신을 대립적으로 보는 데카르트적 관점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호메로스의 심리관을 ‘심신 동일성(psychsomatic identity)’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말이 낯설어서 그렇지 이런 관점은 느슨하게 보자면 육체와 정신을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유가적 관점과 유사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유가는 수심(修心)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수신(修身)이라고 표현한다. ‘나’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롱은 호메로스의 심리관이 플라톤의 심리학보다 열등하다고 평가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는 스넬의 발전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그런가 하면 케이언스(D. L. Cairns) 같은 고전학자는 영혼 삼분설을 주장하는 플라톤의 심리학적 설명의 기초는 은유(metaphor)에 있다고 보면서, 플라톤의 은유적 설명이 바로 호메로스적 은유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사실 우리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불문하고 정신 또는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곤 한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은 ‘애를 끊다’고 말하고, 현대의 우리 또한 ‘애태우다’ 같은 표현을 수없이 사용한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의 심리학에 대한 최근 논의 중 일부는 은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로 모아지고 있는 듯하다. 이런 해석은 스넬처럼 호메로스와 플라톤을 대비하기보다 그들간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최근의 은유 해석과 세부 견해는 다르지만, 스넬 또한 은유를 비롯한 비유에 대해 일찍부터 주목을 하고 있었다. 『정신의 발견』 11장은 ‘비유, 직유, 은유, 유추’를 논의하고 있는데, 그의 논의는 철학적 수준에 닿아 있는 것 같다. 이런 평가가 정당하다면, 최근의 은유 담론을 논의할 때도 스넬을 논의선상에 끌어들이는 것은 정당한 일일 것이다.


사실 고대 그리스의 문헌학, 언어학, 문학 분야의 현대 전문가들은 관련된 논쟁을 벌일 때마다 그 시발점을 스넬로 잡고 논의를 이끌기 일쑤이다. 스넬이 고대 그리스의 정신사를 이해하는 한 전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후의 논의들은 스넬에 동조하느냐, 비판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입각점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스넬은 현재 시점에서도 고대 그리스 문학에 대한 고전학적 지형도의 꼭지점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우리라고 해도 스넬을 의식하지 않고 고대 그리스 문학의 정신을 제대로 논의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스넬의 『정신의 발견』은 우리가 서양 고대 그리스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 발견』에 대한 한국어 최초 역본은 1994년 김재홍 교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절판 상태로 있었기에 이 책을 한국어로 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재홍 교수와 김남우 교수가 새롭게 공역을 해서 번역을 내놓았다. 정말 어려운 텍스트를 새롭게 번역해준 두 분 선생님께 큰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정준영(정암학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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