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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인생이 아름답다 말하려면? / 김동규

추적추적 밤비가 내린다. 이런 날에는 누구라도 창밖을 바라보며 인생을 차분하게 복기하곤 할 것이다. 찬찬히 짚어보면, 우리네 인생은 분명 행복할 때도 있었고 괴로울 때도 많았다. 주체할 수 없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있던가 하면,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시절도 있었다. 회상의 말미쯤에서 우리는 희로애락(喜怒哀樂)들이 골고루, 알알이 박힌 생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하나라도 전무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분명 과장일 것이다.

허나 굳이 비중의 정도를 말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쁨보다는 고통과 슬픔의 시간이 더 길었다고 말할 것 같다. 자주 회자되는 불교의 고해(苦海)나 쇼펜하우어의 시계추(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인생) 비유가 그것을 말해 준다. 짧고 강렬했던 기쁨 뒤에는 항상 저미는 슬픔의 시간이 지루하게 이어지곤 했다. 어린 시절엔 그 시절 나름의 아픔이, 나이 든 시절엔 또 그 나름의 아픔이 있었다. 그렇다면 인생이 아름답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고통이나 불행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유독 젊은 시절이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되곤 하는데, 그건 또 왜일까?


이 물음을 접한 처음에는, ‘먼’ 과거를 ‘더욱 더’ 미화하는 기억의 속성(유아기로 퇴행하는 심리적 속성) 때문이 아닐까 추정해 보기도 했다. 맹수를 만나면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다는 타조처럼, 현재의 고통을 회피하는 방편으로 미화된 과거 속에 소갈머리를 푹 파묻어버릴 수는 있다. 이런 설명도 나름 일리는 있지만, 아무래도 그 이유만으로 속 시원히 납득되지는 않는다. 딱히 현실을 부정 또는 회피하거나 과거로 퇴행해야만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인생 전반을 회상하는 까닭이 매번 현재의 난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심리적 도피 내지 퇴행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젊은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 말할 수 있다. 가진 것도 더 많고 더 안정되고 더 여유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왜 과거가 더 아름답게 비칠까? 과거가 더 결핍되고 더 불안정하고 더 불행했는데도 그렇게 여겨지는 것은 무슨 연유(緣由)일까? 이런 걸 보면, 결핍이나 불안이나 불행 그 자체가 아름답지는 않지만, 놀랍게도 아름다움이 그것들을 구성 요소로 삼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미의 필수 요소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도,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는 요소임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제외한) 예술 장르 가운데 비극을 최고로 여겼다.

     

“… 비극은 시문학의 최고봉이라고 보아야 하며, 또 그렇게 인정을 받고 있다. 이 최고의 시적인 작업의 목적이 인생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과, 형언할 수 없는 인류의 고통과 비애, 악의의 승리, 우연의 횡포, 정당한 자나 죄 없는 자의 절망적인 파멸 등이 우리 눈앞에 전개된다는 것은 우리의 고찰에 아주 뜻깊은 것이고 또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권기철 옮김, 2008. 312쪽.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흐림 없는(속물적 욕망에 의해 왜곡·굴절되지 않는) 눈으로 인생과 세계를 관조할 때 떠오르는 빛나는 모습이다. 우리네 인생에 온갖 술수가 난무하고 고통과 비탄들로 가득 차 있더라도,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정직하게 직시해야 한다. 붓다의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동의했던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비극이야말로 생의 진실을 담은 예술장르였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고통(스런 인생)의 순수 직관(미적 관조)은 욕망의 고뇌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세계 인식의 힘이 불안이나 공포를 제거해 준다. 이런 점에서 심미적 통찰은 욕망의 진정제(das Quietiv)다. 하지만 아쉽게도 약발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 시간은 시지포스가 바윗돌을 굴려 산봉우리에 이르러 잠깐 세상을 한눈에 담았던 시간과 닮았다. 허나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시지포스는 다시 바위를 굴려야만 한다.


유년시절과 꿈의 아름다움. 미드저니 봇. 프롬프트 오영진.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어린 시절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까? 그건 바로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인생에는 꿈이 있었다. 그게 하루하루의 삶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로 그 꿈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원천이었다.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이란 꿈의 미화(美化) 작용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니체도 말했던 것처럼, 꿈은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를 만든다. 앞서 보았던 비극의 아름다움도 실상 고통스런 현실을 꿈의 고양(高揚)된 세계로부터 전망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시지포스 신화 속 높다란 산봉우리처럼 현실과 격리된 수직의 격차가 꿈결 같은 예술적 가상 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생의 부름켜가 커져갈수록, 꿈은 조금씩 작아져만 간다. 시간의 흔적인 나이테처럼 꿈은 겨우 희미한 흔적으로 남는다. 그렇게 우리는 생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년에도 아름다움을 간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논리상으로 방법은 간단하다. 꿈을 간직하기만 하면 된다. 단 꿈을 노욕(老慾 - 예컨대 젊어 보이기, 더 많은 돈과 명예, 권력 등을 차지하기)과 헛갈려서는 안 된다. 참된 미를 간직하려면, 노년의 꿈 역시 어릴 적 꿈처럼 순수해야할 것이다. 맑은 눈망울에 어린 사랑의 꿈. 세상에 물든 욕심이 아니라 천진(天眞)한 초심(初心)의 꿈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초심이란 사랑의 순도가 초절정인 마음 상태다. 오직 사랑밖에 모르는 가난한 마음이다. 생의 고통을 보고 겁에 질려 버린 마음이 아니라, 고통에 잠식된 모든 생을 어엿비 사랑하는 마음. 결국 생의 아름다움은 사랑의 고양 정도(純度)에 달렸다.

혹시라도 어릴 때부터 감당하기 힘든 고통들에 시달려 온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런 순진한 꿈을 도저히 간직할 수 없다면, 인생을 아름다움이 아닌 숭고로 규정해 보기를 권한다. 도무지 알 길 없는 생의 무간지옥에 빠졌지만 끝내 살아 돌아온 이는 숭고한 생을 몫으로 부여받은 사람이다. 이와 같이 뜻깊은 생은 미와 숭고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간다.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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