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리듬 / 김동규

아이가 잠자고 있다. 조금 뒤척이는 것 같더니만, 이내 작은 신음을 토해 낸다. 엄마를 부른다. 악몽을 꾼 것 같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는 아이를 달래 보지만, 아이의 칭얼댐은 계속된다. 여전히 비몽사몽 중인 것 같은데, 팔이 아프다는 둥 머리가 아프다는 둥 계속 응석을 부린다. 아픈 투정을 한다. 엄마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이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걱정한다. 거의 30분가량을 달래지만 소용없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아빠가 아이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잠을 깨운다. 엄마의 몸에 안겨 끝없는 보살핌을 갈구하는 아이의 욕망을 싹둑 절단해 버린다.


이후 부부싸움이 일어난다. 아내는 아이가 날 때부터 신경이 예민해서 그런 것인데 왜 때리느냐고 따지고, 남편은 엄마의 불안을 이용하는 아이의 영리한 욕망을 제지하지 않으면 엄마와 아이 모두가 불행해진다고 말한다. 부부가 한참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아이가 퉁명스레 말한다. “아휴!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이젠 그만 싸우세요.” 부모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이는 그저 악몽에 잠을 설쳐서 투정을 부린 것이 분명하다.


아이 교육에서 자유와 훈육이 언제나 갈등을 빚는다. 한편에서 교육은 아이의 자연스런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자유 방임이 상책인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에서 아이의 맹목적 욕망을 길들이는 훈육이야말로 교육인 듯 보인다. 사실 어떤 것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의 경험이 들쑥날쑥하기 때문이다. 각각 일리(一理)는 있다. 그렇다면 대립하는 교육의 두 원리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게 좋다는 말인데, 그게 매번 쉽지 않다. 『교육의 목적』이란 책에서 화이트헤드는 ‘리듬’이라는 말로 두 원리를 연결시키고 있다.


“자유와 훈육이라는 두 가지 원리는 반목이 아니라 발달하고 있는 성품의 앞뒤로 움직이는 자연스런 진동(sway)에 상응할 정도로 아동의 삶 속에서 조정되어야 한다. 내가 다른 곳에서 교육의 리듬이라고 불러온 것이 바로 이 자유와 훈육을 발달의 자연스런 진동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나는 과거의 절망적인 실책이 이 리듬의 중요성을 간과한 데서 기인했다고 확신한다. 교육의 기조는 초지일관 자유이지만, … 훈육이라는 중간단계가 존재한다는 게 나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면서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세 단계를 설정하기까지 한다. 첫 번째는 13, 14세까지의 낭만의 단계이다. 이 시기는 자유의 첫 시기로서 흥미, 호기심, 즐거움을 위한 자유가 만끽되도록 교육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14세에서 18세까지 정밀의 단계로서 중간에 자리한 훈육의 시기다. 이 시기에는 삶을 살아가는 옮고 그른 방법들이 있고 명확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부적인 것까지 촘촘히 배우는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는 18세에서 22세까지의 일반화의 단계로서 자유의 최종 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원리들의 능동적인 응용을 위해서 세부적인 것들을 포기하는 단계이다.



나는 이런 교육적 ‘단계’를 존중하지만, 꼭 여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단계라는 게 마치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정형화된 공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키가 크는 시점이 다르듯이, 사람마다 성장의 시간 편차가 심하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아이의 경우는 어떨까? 그 아이가 6살이라면, 이제 능숙해진 언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나이다. 형제자매가 있다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분투하는 시기다. 부모의 절대적인 보살핌을 받는 아기 단계에서 또래 친구들을 사귀며 확장된 관계를 만들어가는 단계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안정을 깨트리는 변화의 시기에는 큰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무슨 이유로든 공포에 휩싸이면, 순식간에 행복했던 과거로 퇴행하기 쉽다. 이 시기에는 자유와 훈육이 모두 필요하다. 화이트헤드 말처럼, 둘의 리드미컬한 화음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앞선 이야기에서 부부가 싸우듯, 엇박자가 나서는 곤란하다. 그건 아이가 진정 원하는 바도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3단계를 고지식하게 믿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의 리듬이다. 이 리듬은 대체 무엇에 따라 조율해야 할까? 화이트헤드가 미처 강조하지 못한 교육 리듬의 잣대는 ‘실감’이다. 정현종 시인에 따르면, “그보다 더 좋은 건/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 거야/무슨 길들은 소리 듣는 거보다는/냅다 한번 뛰어 보는 게 나을걸/뛰다가 넘어져 보고/넘어져서 피가 나 보는 게 훨씬 낫지/가령 <전망>이란 말, 언뜻/앞이 탁 트이는 거 같지만 그보다는/나무 위엘 올라가 보란 말야, 올라가서/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내 머뭇거리는 소리보다는/어디 냇물에 가서 산 고기 한 마리를/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걸/확실히 손에 쥐어 보란 말야/그나마 싱싱한 혼란이 나으니”(「시창작(詩創作) 교실」, 부분) 교육의 리듬은 자기 자신과 세계의 실감을 얻는 데 맞춰져야 한다.


아이에게 세계와 사랑에 대한 실감을 주는 쪽으로 자유와 훈육의 리듬이 맞춰져야 한다. 부모의 과보호로 흐리멍덩한 발달 장애를 초래해서는 곤란하다. 엄격한 훈육 때문에 신경쇠약을 야기해서도 안 된다. 교육의 리듬이란 아이가 몸소 실감을 얻는데 필요한 배경 리듬으로 연주되어야 할 것 같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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