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에 관하여 / 김동규

최종 수정일: 3월 9일

외숙부와는 몇 번 마주친 적이 없는데도 만남이 강렬했다. 소박하고 진솔한 그분의 말씀 가운데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내가 대학에 막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자수성가하여 꽤 큰 가게를 운영하셨던 외숙부를 방문했다. 그는 입학을 축하한다며 맥주를 따라 주시면서, 그동안 본인이 대학에 대해 생각해 온 바를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십대 시절 그는 굳이 대학에 갈 이유를 찾지 못했고 집안 형편도 여의치않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벌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난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를 그때도, 지금도 찾지 못했다. 고졸인 것에 대해 전혀 후회도 없단다. 대학 나왔다고 뽐내는 놈치고 나보다 나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더라. 그런데 딱 하나, 대학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배운 사람과 만났을 때, 그이한테서 어떤 이질감을 느꼈는데, 묘하게도 그게 반감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을 멋져 보이게 했지. 왠지 범접하기 힘든 무엇이었는데, 그것 하나만큼은 정말 부럽더라구. 지금도 난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네가 대학에 가면 꼭 그걸 배웠으면 좋겠다.”

숙부가 부러워했던 그것은 무엇일까? 분명 전공 지식은 아닐 테다. 그의 이야기 문맥상 그렇기도 하거니와, 현장에서 익힌 실전 지식은 말할 나위도 없고, 독서량이 많아서 예컨대 그는 경제 관련 이론에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상한 윤리 의식 같은 것도 아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그는 누구보다 윤리적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계급적 차이를 만드는데 일조한다는 소위 문화자본 같은 것도 딱히 아닌 것 같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 혹은 ‘있는 척’하는 삶을 본능적으로 증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숙부가 말했던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대학 주변에서 30년 넘게 살다시피 한 나는 여전히 그것을 찾는 중이다. 학생들과 함께 힘닿는 만큼 그걸 만들어 보려고도 한다. 대학에서 배우고 나면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그 무엇을 말이다. 일단 내가 찾은 것은 ‘교양’이라는 단어다. 물론 저마다 교양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찾았다고 말하기도 곤란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교양의 의미를 좀 더 구체화함으로써 숙부가 말했던 ‘그것’에 조금 다가가 보기로 하겠다.


교양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려우니 일단 ‘교양 아닌 것’을 말해 보기로 한다. 먼저 교양은 실용적인 지식은 아니다. 그렇다고 허영으로 가득한 취미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양은 전문 지식이 아니다. 교양은 고등교육에 속하지만, 전문가를 양성하는 전공교육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가 쉽게 잘 정리해 두었다.


“교양교육은 요컨대 의사소통 훈련입니다. 그것도 뭔가 잘 모르는 것과의 의사소통, 공통의 용어나 도량형이 없는 자와의 의사소통 훈련이지요. … 전공교육은 ‘내부 사람만의 파티’를 의미합니다. ‘전문용어로 대화가 되는’ 장소, 혹은 ‘통하는 걸로 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 먼저 교양교육을 통해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과의 의사소통방식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은어로 대화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고 나서 지금까지 은어로 말해왔던 것을 ‘은어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이해시키지요. 거기까지 가능해지면 고등교육은 일단 목표를 달성한 셈입니다.”

그에 따르면, 교양이란 말이 안 통하는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전문화 시대에는 동일한 모국어를 쓰더라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괴테와 발레리에 익숙한 대학생은 코딩과 미시경제에 익숙한 친구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미 1950년대에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단절을 두고 스노(Charles Percy Snow, 1905-1980)는 『두 문화』라 명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학계에서 요즘 언급되는 통섭, 융합, 학제 연구가 사실은 모두 교양교육의 이념에 뿌리 내린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양교육은 대학 교육의 처음이자 끝이다.



교양은 초중등 과정에서 배우는 한갓 윤리나 도덕 교육이 아니다. 교양이란 똑같은 윤리 의식을 가진 공동체 구성원끼리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지침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차라리 전혀 다른 윤리관을 가진 사람들과 만났을 때 그들과 소통하는 법과 관련된 것이다. 윤리적 차원의 소통이 가능해지려면 가장 먼저 ‘나’의 독선(獨善)에의 집착을 버려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자각, 내가 모르는 세상이 훨씬 드넓다는 깨달음이 선행해야 한다. 이처럼 교양이란 자신의 오류 가능성과 무지를 자각하는 배움을 기본 베이스로 삼는다. 이것은 뽐낼 수 없는 지식이며, 있어도 없는 척해야 하는 깨달음이다.


교양은 계급적 차이를 재생산하는 문화자본일 수 있다.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100% 배제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둘의 구분이 차별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교양교육은 여가를 누릴 수 있었던 귀족의 교육과정이었다. 교양교육은 본디 순수한 사유나 미학적 인식을 위한 교육으로서, 탁월한 사유 능력과 가없는 상상력을 통해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제어력을 함양하는 교육이었다. 이것은 엘리트주의자였던 플라톤이나 공자의 이상적인 교육내용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교양은 교양 자체가 엘리트의 문화자본일 수 있음을 성찰할 수 있는 비판 능력 함양을 포함한다. 수세대에 걸쳐 부를 축적한 귀족적인 부자는 스스럼없이 파격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데 반해서, 벼락부자가 된 졸부는 체화되지 못한 예절을 모방하느라 전전긍긍한다고 한다. 교양 있는 사람은 자본(권력이나 명예 혹은 지식)이 있는 사람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지만, 없는 사람 앞에서는 겸손히 자세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낯선 타인과 진정성이 오가는 대화를 할 수 있기 위해서다. 요컨대 참된 교양인이란 아무리 낯설고 달라 보여도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연민의 밧줄로 묶인 공동 운명체임을 늘 기억하는 자이다.


아마도 돌아가신 외숙부가 말씀하셨던 큰 배움을 얻은 사람이란 이런 사람이지 않았을까.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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