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를 꽤 괜찮다고 느끼며 읽는 도중에 같은 저자의 신간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출간 소식을 접했다. 책값이 꽤 비쌌다. 곧 페이퍼백이 나올 거 같다는 소문도 있어 잠시 구매를 망설였다. 그러저러한 와중에 어찌어찌하다보니 질렀고, 도착하자마자 「여는 말」을 읽었다. 무릎을 치며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이런 소릴 해야지!” 더 이상 양자혁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연연하지 말고, 그러느라고 시간 질질 끌며 배회하지 말고, 아예 존재론 혁명으로 나아가자는 제안과 자신이 해보겠노라는 포부가 적혀 있었다.
2. “그간 많은 사람들이 대안적 존재론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양자역학이 고전적 존재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주목하여 반형이상학적, 반실재론적 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왔다. 이는 잘못된 관념의 틀을 벗어나게 하는 데에 유용한 면이 있으나 새로운 관념의 틀을 제시하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는 이제 “지금까지 우리의 직관이 바탕에 두고 있었던 원초적 존재론을 문제”(책 p.6) 삼겠다고 한다. 그를 통해 아예 새로운 ‘직관’을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3. 벌써 20여 년도 더 된 일인 거 같은데, 나는 양자역학의 세계를 접하고 큰 놀라움과 해방감을 맛본 이래, 화제를 모으는 관련 신간들이 나오면 읽으려고 애써온 입장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나 닐스 보어의 생각을 좋아하고 당연히 ‘코펜하겐 해석’에 크게 경도되어 있는 편이다. 내 아이디로 ‘보어’를 오래도록 써왔을 정도다. 보어가 언급된 틈을 타 그의 생애를 그린 평전 [[닐스 보어 - 20세기 양자역학의 역사를 연 천재]](푸른지식, 2015)를 잽싸게 소개하자. 출판사에선 그래픽 노블이라 했지만 그냥 만화책이라 생각하면 된다. 진중한 만화책이긴 하지만 보어가 워낙 흥미로운 인물이기에 책도 기본적으로 재밌다. [[로지 코믹스]], [[레드 로자]]와 함께 내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그래픽 평전 중 한 권이다. 검색하다 보니 같은 저자의 [[앨런 튜링]], [[파인만]], [[호킹]] 등도 나와 있네. 다른 두 사람은 그닥 궁금하지 않지만 튜링은 보고 싶은걸.
4.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학이라고 하면 배우려고만 하지 창조하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나의 양자역학상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극히 자연스러운 태도에 대해서도, 자기가 무슨 과학의 대변인이나 사도라도 되는 양 곧장 경계하고 머잖아 비난을 해댄다.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시건방진 태도는 금물이라며 호들갑이다.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는 된다. 아직도 서양 하면 꾸벅 죽는 데다가 과학에 대한 교조주의까지 어려서부터 ‘주입’받아온 탓이리라.
5. 나는 인생의 30년 정도를 과학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다 20, 30년 전쯤 재미진 대중과학서들을 통해 급속히 과학의 세계를 애정하게 되었다. 물론 과학의 위험스러움과 과학자들의 편협한 면도 많이 보았으니 그냥 애정이라고 하면 어폐가 있고, 굳이 표현하자면 급속히 가까워졌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초기부터 좋아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오래 전 어떤 일본 잡지에선가 봤던 두 여성의 발언이다. 그 기사는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 좌담 같은 것이었는데, 그중 한 여성(그녀는 요리사 또는 요리 연구가였다)이, 자기가 얼마 전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운 요리를 개발했다고 말했다. 또 한 명은 안무가(혹은 무용가)였는데, 양자역학의 입자-파동 이중성을 이번 무대의 안무에 구현해보았다, 대략 이런 얘기를 했다. 그런 발언에 주변 사람들은 웃거나 실없는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다른 토픽과 다를 바 없이 활기차게 대화를 이어갔다. ‘주변 사람들’이란 과학자거나 과학철학자, SF작가 등이었다. 인상적이었다. 아~ 그냥 자연스러운 거구나. 참 좋구나.
6. 장회익에게 과학은, 특히 물리학의 동역학은 보편이론이다. 보편이니까 기괴한 것이 아니며 또한 특수 계층만의 세계도 아니다. 아무리 위대한 음악이나 미술 작품이라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해설이 가능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깊이, 풍부하게 감상될 수 있듯이 과학 또한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연’과학 아닌가! 우리를 언제나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한 지식과 탐구가 바로 과학이다. 이렇게 과학을 보편적인 앎의 추구라 보는 장회익은 아인슈타인의 1936년 논문 「물리학과 실재」를 이 책의 지침으로 삼았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앎 자체에 대한 심층적 통찰이 요청되고 있으며, 이것은 더 이상 철학자들의 소관으로 넘길 것이 아니라 과학자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론적 바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수행해야 할 때가 되었다”(24)고 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테제를 던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생각은 “과학이라는 것 전체가 종국적으로는 하나의 다듬어진 일상적 사고 이상의 어떤 게 아니다.”라는 통찰이다. 그러니까 과학자라는 이유로 자기 분야에만 갇히지 말고 “일상적 사고의 성격 분석이라고 하는 더욱 어려운 과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더 이상 피해”서는 안 된다. 역시 아인슈타인의 말에는 어떤 감동이 있다. “세계의 영원한 신비는 이것이 이해된다는 것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이 절로 떠오른다.
7. 양자역학이라는 신비로운 분야가 있다는 건 세상이 다 안다. 그 신비에 대한 해석들이 더 신비롭다는 것까지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또한 세상에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말도 잘 알려져 있다. 장회익은 양자역학에 대한 이런 담론 상황이 못마땅하다. 지금이 양자역학 초창기인 1920, 30년대도 아니고 벌써 등장한 지 100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이 지경이어서는 곤란하다, 이러고도 과학이고 과학 담론이랄 수 있느냐는 불만이다. 맞는 말이다. 나는 코펜하겐 해석이 가장 깊이 있고 풍요로운 해석이라 여기지만, 그와 동시에 양자역학에 새로운 담론이 안 나온 지 오래라고, 그래서 심한 정체 상태에 빠져있다고도 생각한다. 이젠 내가 치고 나가겠다는 장회익의 포효에 전적으로 흥분하며 열렬한 성원을 보낸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양자역학에 대한, 자연과학에 대한 과도한 신비주의로부터, 또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로부터 얼른 탈출해야 한다. 나는 양자역학 중 이 지점이 좋다든가, 이 대목은 언젠가는 교정되어야 할 거 같아 라든가, 자유롭게 웃고 떠들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양자역학이 형성되고 정립되어온 과정에도 그런 기운이 크게 역할을 했다. 양자역학은 과학계의 낡은 세력들을 개무시하면서 청년들이 마구 치고 나온 새 과학이었고, 그래서 당시 ‘청년의 과학’(독일어로 Knabe(소년)의 과학이란 말이었던 거 같은데, 정확한 단어가 기억이가 안 난다)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불온하고 뜨거웠던 열기는 20세기의 [[티마이오스]]라 할 수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전체를 조용히, 그러나 활활 불태우고 있다.
8. 양자역학이라는 분야에는 분명 전문 분야로서의 일반적 개념들이 있고, 그 개념들 사이에 엄밀한 관계들이 있다. 한데 아인슈타인은 앞서 말한 논문에서 “과학이라는 것 전체가 종국적으로는 하나의 다듬어진 일상적 사고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같은 취지에서, 양자역학의 개념들과 그 관계들은 반드시 감각 경험과의 특정한 관계들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 또한 잊어선 안 된다.
9. 양자역학이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고, 그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신비주의적인 언사와 제스쳐로 가득 차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 경험과 구체적이고 풍부한 관계들을 형성해 내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장회익은 철학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 그래서 과학자인 자신이 나섰다. 과학의 좁은 세계에 스스로 유폐되지 않고 드넓은 세상에 나와 존재론 혁명을 감행한 것이다. 혁명의 성공은 양자역학을 잘 해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추측 또는 예측을 가능케 할” 수조차 있다. 자연의 참모습에도 크고 작은 변경을 초래할 터이다. 이 책의 부제가 ‘양자역학이 불러온 존재론적 혁명’인 연유다.
10. 책에는 장회익이 오래전부터 천착해온 여헌 장현광(그는 율곡과 거의 동시대인이다)도 당연히 언급된다. [[삶과 온생명]](현암사, 2014)에서 읽었던지는 기억이 불분명하지만, 어느 헌책방에서 장현광의 고서를 구하게 되었고, 그가 장회익의 직계 조장이었다고 했던 거 같다. 그건 그렇고, 장회익에 따르면 서양의 근대 과학은 세상에 유일한 괴물이 아니라 멀리로는 수천 년 전의 [[주역]]과, 가깝게로는 장현광 같은 사상가와 함께 ‘예측적 앎’이라고 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제1장 4절 「동아시아 성리학이 본 예측적 앎」). 물론 큰 차이도 있다. 장현광(1554-1637)의 1631년 텍스트 [[우주설]](지만지, 2018)에는 부록에 해당하는 「답동문」이 있는데, 거기에는 보편이론으로 나아가기 위한 예측적 앎의 구도가 훌륭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보편적 대상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상을 구성하는 존재물의 보편적 ‘특성’에 해당하는 질량이라든가 또 이 대상이 지닐 ‘상태’ 개념이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55)은 것이다. 이 지점을 동양에서 과학이 탄생하지 못한 아픈 과거로 여겨 안타까워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중립적으로 동양과 서양이 근대에 크게 갈라진 기로로 봐야 할지는 더 생각해보기로, 아니 그 이상으로 더 알아보고 연구해보기로 하자.
(다음 달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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