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은 주로 동물계에 동성애와 트랜스젠더가 얼마나 차고 넘치는지를 주로 포유류와 조류의 사례로 보여준다. 그리고 과학자와 과학계가 이런 신나는 사실들을 어떻게 감추고 축소시키고 모호하게 표현해왔는지도 말해준다. 이 대목에서 과학자가 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될 때도 있다. 저자는 이런 이야기들을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비분강개하거나 아프게 후벼파는 방식보다는 여유있는 유머나 경쾌한 조롱 등을 구사한다. <이브닝 스탠더드(런던)>에서 써준 추천사에 ‘무의식적인 유머의 걸작’이라는 표현이 있길래, 이게 뭔 소린가, 했는데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건가 싶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너무 반성 모드로 가라앉거나 과학 혹은 과학계를 비난하는 대신 자연이 얼마나 다양한지에 기분좋게 놀라면서 세계가 천천히 가벼워지며 넓어지는 경험을 한다. 원 제목의 부제 Animal Homosexuality and Natural Diversity(동물의 동성애와 자연의 다양성)에 나름 깊이가 있었던 거다.
2.
이 책은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새로 론칭하는 의치약생명과학 브랜드 <히포크라테스>가 낸 첫 번째 책이다. 무지 두껍고(1360쪽) 값도 비싸며(4300원) 읽을 때 좀 불편하다. 나는 독서할 때 (목 건강을 생각해서) 책받침대를 사용하는데, 좀 더 큰 걸 사야 하나 잠시 고민... 하려다 말 정도였다. 암튼 이런 무지막대한 책을 꼭 사야 하나, 사면 안 읽긴 아깝고 그렇다고 또 이런 이유 때문에 다 읽으려 애쓸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내 건강에 대해 의치약생명과학적인 회의가 엄습한다. 게다가 1999년에 출간된 원서라니,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이런 분야에서 지난 세기에 나온 책을? 이런 책을 새 브랜드의 첫 책으로 낸 데에 무슨 심오한 이유라도?
3.
책이 도착하고 목차를 다시 한번 보았다. 2부로 나누어진 상세 목차가 일목요연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내용이 예상했던 것과 좀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동물계의 다양한 성에 대해 써놓은 책인 줄 알았다. 한데 포유류와 조류가 대상이며 그 주제도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이 아니라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중심으로 한 성적 다양성이었다. 구도를 왜 이렇게 잡았을까? 그런데 왜 원제나 번역본의 제목은 이런 거지?
4.
오른쪽 책날개에는 이 브랜드의 출간 예정 도서 4종이 예고되어 있다. 모두 국내 필자들의 저서다. 감닥 놀랐다. 어떤 분위긴지 함 보시겠는가?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 [[후성유전, 당신을 기록하다]], [[내 눈이 우주입니다 – 안과 의사도 모르는 신비한 눈의 과학]], [[나는 생명을 꿈꾼다 – 변형되는 삶과 죽음, 의료의 시대에 살아가는 방법]]. 이 책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보니 이 이외에도 근간 예정인 도서가 몇 권 더 적혀 있다. 국내 필자에 의한 책 3권과 외서 4권. 국내서는 [[스테로이드 연대기]], [[몸을 말하다 – 의사가 바라본 소우주, 몸]], [[피임, 물어봐도 돼요 – 당당하게 묻고 재밌게 배우는 피임 이야기]] 등이다. 국내서의 필자들은 시스템생물학과 교수, 약학대학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 등이다. 앞으로 이 브랜드 하나에서만 국내 전문가들의 저서들이 착착 출간될 것이라니, 작지만 의미 있는 미래가 이미 와 있는 셈이다. 참고로 외서쪽 필자들은 위장병 및 간 질환 전문의사, 미생물학 전문가, 간호사와 구급대원 등 현장 전문가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전문 분야인 임상심리학자, 30년간 척추 외과 의사로 일해온 사람. 이 의사는 자신이 개업의로 수술을 시작한 지 2년 후에 시작된 통증으로 15년간 만성 통증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창안한, 통증을 다스리기 위한 <자가치료법>을 소개하는 책이라고, 그래서 만성 통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한다.
5.
나는 오래전부터 생물의 성에 대해 큰 관심이 있었다(동물의 성만이 아니라 식물의 성까지 포함해서 죄다 파보고 싶었다. 식물에까지 관심이 미친 것은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참 전에 찰스 다윈의 식물의 수정을 개관하고 데이비드 애튼보로의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고전적 저작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 10년 넘게 제자리걸음이었다. 대중서 몇 권을 읽긴 했지만, 그 책들이 다 좋아서 유익하긴 했지만, 뭐랄까 생물의 성에 대해 참으로 리얼하게 느끼진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고 확연했다. 뭔지 모르지만 그 무언가를 접하면 그 장대한 세계에 대해 거대한 깨달음, 혹은 통찰로 곧장 도달할 수 있을 텐데...... 대략 이러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싶어했던 건 이성애의 드라마였다는 걸!
6.
사실 나는 이성애주의자도 아니다. 세상에는 n개의 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성이란 게 섹스만이 아니라 광대 무변한 시공장(時空場)의 차원에서 무한히 벌어지는 사태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지적으로 이런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과 내 평소의 관심은 또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이성애 이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 무의식적으로 억압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몰겠지만 하여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동성애나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나 차별 등에 대해서는 딱히 깊게 생각해본 적 없고 다만, 왜 당사자가 그러그러하다는데, 제3자가 이러이러하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못하겠다는 정도다. 화가 나긴 하지만 그것도 지적인 차원의 짜증인 거 같다.
7.
이런 나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알고 싶어했던 게 실은 이성애의 드라마”일 뿐이었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맞다. 잘 연결이 안 되실 거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그 점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고.
8.
과학은 지식을 생산한다. 무지도 생산한다. 최근 재밌게 읽고 있는 <現代思想> 6월호 특집의 주제 ‘무지학(agonotology)’의 논지다. 예컨대 세계의 거대 담배 회사들은 과학자들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연구를 시킨다. 담배가 몸에 좋다는 증거나 별로 해롭지 않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 아니다. 사람 병들고 죽게 만들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온 자들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그 회사들은 컨소시엄 같은 것을 만들어 과학자들에게 다양한 분야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연구를 의뢰한다. 결론이 어떻게 나던 그건 과학자들의 자유에 맡긴다. 단, 과학이라는 것도 100%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것, 어떤 결론도 최종적이지 않으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 대략 이런 취지를 뽑아낼 수 있는 것이면 된다. 사실 이런 것도 별도로 요구하진 않는다. 자기들이 이리저리 뽑아내면 되니까. 암튼 이런 식으로 이들에게 연구를 의뢰받은 과학자들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들을 포함해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무쟈게 많다.
9.
그럼 이런 연구 결과들을 얻다 갖다 쓰나? 바로 담배 회사들이 걸려 있는 소송에서 근거로 쓴다. 혹은 평소에 흡연과 질병의 상관관계에 대해 벌어지는 여론전에 자기들을 위한 근거로 꾸준히 동원한다. 대충 분위기 파악이 되었겠지만, 이런 식의 과학 연구를 담배 회사만 지원하고 있을 리가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크게 문제가 되었던 가습기 살균제 사태에서도 ‘저들’에게 가장 큰 무기가 되었던 것 중 하나가 ‘상관성을 확증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20여년 전에,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초국적 제약 회사의 약을 소비한 결과 질병 등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상관성의 입증을 소비자 측에서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섬뜩했었다. 국제적으로 부르주아들간에 그렇게 여러 협약들이 체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 다음 달 칼럼에 (하)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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