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숨소리 / 김동규

일제 강점기에 활약했던 문사(文士), 상허 이태준의 수필 가운데 「고독」이라는 짧은 글이 있다. 처마 끝 풍경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쓸쓸히 들리는 밤에 이태준은 나지막한 또 다른 소리를 듣는다. 고독의 소리를 듣는다. 흥미롭게도 그 소리는 아내와 두 아이가 잠을 자며 내는 숨소리다.


“아내의 숨소리, 제일 크다. 아기들의 숨소리, 하나는 들리지도 않는다. 이들의 숨소리는 모두 다르다. 지금 섬돌 위에 놓여 있을 이들의 세 신발이 모두 다른 것과 같이 이들의 숨소리는 모두 한 가지가 아니다. 모두 다른 이 숨소리들은 모두 다를 이들의 발소리들과 같이 지금 모두 저대로 다른 세계를 걸음 걷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꿈도 모두 그럴 것이다.”

‘섬돌’이라는 단어가 등장해 옛이야기 같지만, 지금도 여느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숨소리를 가지고 있다. 순간순간 죽음의 리드(reed)를 진동시키며 가르랑대는 그 숨소리는 지독히 고독하다.


대도시 서울의 거리를 걷다 보면 무수한 이들과 스치게 된다. 다들 제각각 서로 다른 얼굴로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저이들은 나름의 자의식과 자기 세계를 살고 있다. 그들이 살고 있을 세계를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하나의 공통 세계에서 산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는 자기 본위의 세계를 영위하고 있다. 예컨대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저 여학생은 첫사랑에 막 빠졌는지 모르며,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수그린 저 중년의 남자는 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났는지 모른다.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외롭게 살고 있다.


고독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상대적 고독과 절대적 고독으로 구분할 수 있다. 통상 우리가 경험하는 고독은 상대적 고독이다. 즉 인간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고 ‘함께 있음’이 인간의 조건이기에, 고독이란 그로부터 파생된 외로움이다. 뜨거운 사랑을 했던 사람만이 냉혹한 고독을 경험할 수 있다. 사랑이 깊을수록 고독도 깊어만 간다. 당연히 사랑이 천박(淺薄)하면 고독도 천박할 수밖에 없다. 고독의 무게가 부담스러운 사람은 얄팍하게 타인을 만나면 된다. 이런 맥락에서 고독은 사랑(혹은 관계 상실)의 불가피한 결과물이다.


반면 절대 고독은 누구나 자주 경험하는 고독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절대자는 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절대 고독은 존재의 근원인 유일자로서 신에게 속한 고독이다. 인간은 엄두도 내지 못할 고독이다. 이것은 상대적 고독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고독일 것이다. 만일 인간 내부에 신을 감지할 수 있는 신성이 있다면, 절대 고독과 유사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절대자와 일대일로 대면하여 겪는 신비 체험이 있다면, 그 신비주의자는 고독이라 명명하기도 어려울 절대 고독을 조금은 맛보지 않았을까 싶다.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고독은 일자(the One)의 정념이다. 단독적인 개체의 아우라다. 역사상 이런 아우라를 가진 사람은 주권자 왕이나 지식인 계급이었다. 대체로 민중은 고독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먹고사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반면 피라미드식 권력의 정점에 있던 왕은 고독했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 자리를 탐하는 자가 있고, 중요 사안을 최종적으로 홀로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왕은 자기 고독의 이미지를 절대자 신에게서 빌려 온다. 신의 유일한 대리인으로서 신과 같은 절대 고독을 향유하는 인물로서 자신을 미화한다.


단 한 사람이 주권을 휘두르는 왕정 체제와는 다르게, 민주주의는 인민주권 이념을 바탕으로 시민이 주권자인 정치체제이다. 시민 다수가 어떻게 하나의 일반의지를 가질 수 있는지는 여전히 다툼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개별 시민이 과거 왕처럼 주권자적 고독을 짊어져야 한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주권자인 개개 시민은 여론을 고려하면서도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고독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그 목소리를 신적 음성이라 하든 양심의 목소리라 하든 그와 유사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권자로서의 민주시민이 있어야만,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라는 괴물의 출현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목소리를 종교적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상허의 숨소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나와 숨 쉬며 사는 것들은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것들은 다른 것들에 의존해서 산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죄다 기생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연을 맺으며 서로 기대며 산다. 신 같은 절대 독립성을 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목숨을 부지하면서 부단히 자기성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것의 단독성은 우주적 시간을 거치면서 만났던 것들과의 특별한 인연 조합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령 혐기성 박테리아가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까마득한 과거 지구 대기 중에 산소가 없던 시절의 기억이자 흔적이다. 우주적 사연을 담고 있는 유전자들의 특별한 인연 고리가 이어져서 지금의 생명체가 존재하는 셈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제각기 수백억년의 기억을 담고 있는 화석이다.



한 가족이지만 저마다 숨소리가 다르다. 같은 어미의 배에서 나왔지만, 아이들의 숨소리도 제각각이다. 그들은 저마다의 우주적 기억을 온축한 개별 생명체다. 절대 고독의 씨앗들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들의 숨소리는 주권자의 아우라를 가질 수 있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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