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시스템과 예술계는 서로 다른 운영 원리로 인해 종종 긴장 관계에 놓여왔다. 행정의 표준화된 절차와 예술의 실험적 성격이 상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후와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 기술 혁신의 가속화 등 현대 도시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는 기존의 행정적 접근법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나는 여기서 미국의 추상 조각가 브루스 비즐리 (Bruce Beasley, 1939 ~)의 예술적 실험을 되짚어본다.
왜 하필 조각가 비즐리의 작업이 도시 행정과 관련이 있는가? 그 답은 비즐리가 1980년대 추구한 창작 방법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컴퓨터 알고리즘 (체계적 접근)과 예술가의 직관 (창의적 판단)을 결합하는 프로세스를 개발했다. 이는 현대 도시가 마주한 핵심 과제 —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과 인간 중심 가치의 균형 — 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더욱이 비즐리의 기술 실험이 시작된 1980년대는 도시계획에서도 하향식 마스터플랜에서 유연하고 참여적인 접근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또한 1990년대 이후 공공미술은 단순한 설치물을 넘어 시민 참여와 소통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마찬가지로 도시 행정도 효율성만을 추구하던 단계를 넘어 시민 참여와 지역 맥락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즐리의 작업은 예술적 감성과 체계적 방법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복잡한 도시 문제 해결에 영감을 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오늘날 인공지능은 제조, 사무, 예술창작, 교육, 연구 등 과거 ‘블루칼라’, ‘화이트칼라’ 등으로 불리던 영역을 가리지 않고 현대사회를 파고드는 중이다. 각각의 분야에 맞춤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보안이나 효율을 위해 특정 기관·개인이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툴 제작으로 점차 개별화된다. 이것은 도시운영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거리에서 접하는 광고나 쓰레기 분리배출까지 이른바 스마트 기술이 관여하는 범위가 점차 넓어진다.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기술력과 인간성의 조화를 고민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 비즐리의 컴퓨테이션 작업 기획 역시 더 이전 세대의 여러 예들처럼, 기술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따라서 그 자체로 획기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이후에 증폭된 컴퓨팅 기술의 발전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도시 환경에서의 기술과 인간성 사이의 균형 문제를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인 차원으로 진화시켰다. 기술이 단순히 효율성을 추구하는 도구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의 방식과 직결되는 심오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되면서, 그 균형을 맞추는 문제가 더욱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복잡성 관리의 유사성
비즐리는 1980년대 초반 IBM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조각 창작 방식을 실험했다. 특히 그의 'Cubic Series'는 체계적인 창작 프로세스와 예술적 직관의 결합을 보여준다. 작가는 기본적인 형태 변수를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성된 수천 개의 변형 중에서 미적 판단으로 최종 형태를 선별했다. 이는 엄격한 방법론이 오히려 예술적 자유를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비즐리의 접근법은 현대 도시 행정이 직면한 복잡성 관리 문제와 유사성을 보인다. 도시계획가들 역시 시시각각 생장하는 도시의 무수한 변수 속에서 최적의 발전 경로를 모색해야 하는데, 하향식 마스터플랜은 이러한 복잡성을 다루는 데 한계를 보였다. 비즐리가 컴퓨터와 예술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창작 가능성을 발견했듯이, 도시의 복잡성에도 데이터 분석과 인간의 질적 판단을 결합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해졌다.
비즐리의 창작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활용해 기하학적 기본 요소들의 조합을 체계적으로 탐색했다. 그리고 프로그래밍 언어로 직접 3차원 공간에서의 형태 생성 규칙을 정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엄격한 수학적 원리를 따르면서도, 최종 선택에서는 철저히 주관적·미적 판단을 우선시했다. 'Cubic Series'는 입방체를 기본 단위로 하되 이를 반복, 축소, 확장, 결합하는 변주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했다. 당시로서는 무척 참신했던 이 접근법은 컴퓨터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창의적 협업자로 활용한 초기 사례로 평가받는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비즐리가 컴퓨터와의 협업 과정에서 취한 태도다. 그는 자신이 알고리즘을 통제하지만, 알고리즘은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을 이용했다. 이는 체계와 직관, 계산과 창의성이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상보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즐리는 기술적 엄밀함과 예술적 직관 사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각 영역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불확실성 시대의 통제된 우연성
살펴본 것처럼 비즐리 작업의 주된 특징은 '통제된 우연성 (controlled randomness)'에 있다. 일정한 무작위성이 포함된 채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은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유도한다. 작가는 우연성을 초대할 뿐 아니라 그 우연성이 작동할 수 있는 프레임워크를 설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그의 또 다른 대표 연작 'Acrylic Series'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시리즈에서 비즐리는 아크릴 재료의 물리적 속성과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계산된 형태를 조합하여,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유기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작품을 이루는 투명한 아크릴 블록들은 마치 타고난 모양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듯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엄격한 구조적 논리를 내포한다.
현대적인 도시 경관과 공공미술에 관련된 영역에서도 이러한 통제된 우연성 개념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도시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인구 이동, 경제 변화, 자연재해, 사회적 변동과 문화적 요구 등은 모두 계획만으로는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도시는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일정한 질서와 방향성을 제공해야 한다. 예컨대, 도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 행정가들은 예산, 위치, 안전 기준 등 특정 프레임워크를 설정하지만, 그 안에서 예술가와 지역 주민들이 창의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기본 요소와 규칙은 정해져 있지만 그 조합과 변주는 열려 있는 시스템을 통해, 지역 특성과 주민들의 필요에 반응하는 유연한 도시 공간이 가능해진다. 2010년대 이후 등장한 '전술적 도시론'이나 '팝업 도시론'과 같은 접근법은 비즐리의 통제된 우연성 개념과 궤를 같이한다.


미술-기술-행정의 대화적 통합
비즐리의 이러한 접근은 현대 도시가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활용하는 방식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2025년 현재, 세계 주요 도시들은 '디지털 트윈'과 같은 기술을 활용해 도시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접근을 통해 시민들의 일상을 더 정교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여전히 도시의 질적 측면, 예를 들어 지역사회의 유대감이나 공공공간의 감성적 가치 등을 완전히 반영하기에 한계가 따른다. 비즐리의 작업이 보여주는 시스템적 접근과 인간적 판단의 균형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은 효율성을 높이지만, 인간적 판단과 지역 맥락의 고려가 변함없이 도시의 진정한 과제로 남아있다.
비즐리의 실험이 오늘날 기술중심도시와 도시기반미술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과 인간 직관 사이의 '대화적 관계'의 중요성이다. 비즐리에게 컴퓨터 알고리즘은 단순한 효율성 도구가 아니라 창의적 대화의 파트너로 기능했다. 마찬가지로 현대 도시의 데이터 기반 시스템도 단순히 효율성을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 도시의 창의적 발전을 위한 대화 파트너로 재개념화될 필요가 있다.
스마트시티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테크노크라시적 접근이 지배적이었고, 기술 중심적인 비전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센서와 데이터로 모든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구현 과정에서 많은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들이 시민들의 일상 경험과 괴리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리고 사람 중심 스마트시티, 포용적 도시 같은 개념이 부상하면서, 기술과 인간 경험의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도시기반미술 역시 비슷한 변화를 겪고 있다. 오래 전 장소 특정적 (site-specific) 조각물이나 설치물에 집중했던 공공미술은 점차 참여적, 과정 중심적, 관계적 특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비즐리의 'Aurai' (2006)가 자연의 움직임을 알고리즘으로 해석하듯, 최근의 도시기반미술 역시 도시의 복잡한 흐름과 관계를 시각화하고, 거주민들이 그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브루스 비즐리의 예술적 실험은 현대 도시가 직면한 기술과 인간성의 균형 문제에 유용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체계와 직관, 계산과 창의성, 통제와 우연성의 균형은 데이터 핵심 시대의 도시와 공공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시사한다. 물론 비즐리의 개인적 예술 실험이 복잡한 도시 문제의 해답을 모두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접근법에서 발견되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창의적 대화, 체계 내에서의 자유로운 변주, 실험과 반복을 통한 학습 등의 원칙은 현대 도시 행정과 미술이 함께 고민해야 할 중요한 주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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