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인 한 방은 없었다. 정치권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특히 청문회 때마다 단골 메뉴로등장하는 언론사의 상투어이기도 하다. 물론 야당의 공격 능력에 대한 평가이다. 변죽만 울렸다는 뜻이리라. 결정적인 한 방 대신에 자질구레한 치부를 들추는 데서 그쳤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도덕적 기준치가 정해진다. 그 정도면 괜찮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덕적 순결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기준선들이 대개 고무줄이라는 것도 잘 안다. 최근에는 그 기준선들의 국제적 격차를 실감하는 일도 잦아졌다. 한국 정치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 주변 국가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이 또한 국가별로 정치인에 대한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정치인 못지않게 결정적인 한 방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대중적 스타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곧 기삿거리이자 돈이기 때문에, 말 한 마디만 잘못 해도 몰락하는 것은 순간이다. 어렵게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 올렸을 텐데도, 추락은 순식간이다. 최근에도 회복불가능한 치명상을 입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처럼 부정적인 한 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래 결정적인 한 방은 쾌감을 동반하는 모종의 긍정적 경험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결정적인 한 방을 기다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혹은 그것이 결정적이었음을 모르고 지나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가올 한 방이던, 이미 지나간 한 방이던 그것은 분명 삶의 방향을 크게 바꿔놓을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작가들에게도 결정적인 한 방의 경험은 중요하다. 작품 하나로 일약 스타가 된 작가가 있는가 하면, 평생 결정타를 날리지 못해서 결국 무명으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작가들의 경우 결정적인 한 방은 ‘읽히느냐, 잊히느냐’를 가르는 중차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단 한 방으로 끝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지속력이 문제이다.
헤밍웨이가 그렇다.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이후 10여 년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 다시 결정적인 단 한 방이 필요해졌다. 그것이 바로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던 「노인과 바다」(1952)라는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이 기대 이상의 사랑을 받으면서 헤밍웨이의 명성이 급격히 회복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두 번의 비행기 사고와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게 되고, 결국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권총으로 자살하는 경로를 밟게 된다.
그것은 우연하게도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노인의 삶을 떠올린다. 노인은 80여 일 동안 물고기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길이 5.5m, 무게 700kg이 넘는 거대한 물고기(청새치)를 만나게 된다. 웬만한 성인 키의 3배에다, 70kg 몸무게의 성인 남성 10명이 노인의 그물에 매달렸다고 상상해보라. 노인도 그렇게 큰 물고기는 평생 처음이라고 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노인은 그야말로 사투를 펼친다. 2박 3일을 잠도 못자고 물 한번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꼼짝없이 그물에 매달렸고, 드디어 물고기를 사로잡는 데 성공하게 된다. 말이 사로잡은 것이지 거대 물고기 옆에 작은 배가 달라붙은 것처럼 보였다.
소설의 대부분은 노인의 사투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물고기는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한 방이 될 뻔하였다.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서 사로잡은 물고기를 향해 상어떼들이 달려든다. 노인은 저항하지만, 상어떼는 죽어가면서도 물고기의 살점을 베어물기를 멈추지 않는다. 밤이 되고 물고기를 뜯어 먹는 상어떼를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어진 노인은 결국 탈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는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물고기는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뼈대만으로도 그 크기에 놀라워하지만, 노인은 무덤덤하다. 결정적인 한 방은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소설은 그 자체로 놀라움을 준다. 그야말로 연극으로 치면 모노 드라마에 불과한 소품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인물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웃집 소년이 있지만, 처음과 끝에만 잠깐 보일 뿐, 대부분의 장면은 그야말로 ‘노인과 바다’만으로 채워져 있다. 노인과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사건이랄 것도 크게 없는, 단순한 플롯의 소설이다. 이 단순한 소설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무엇보다, 긴박감을 조성해가는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을 먼저 꼽을 수 있다. 그 다음은 당연히 이 소설의 유일한 주인공 노인에게서 발견되는 묘한 매력에 있다. 특히 끝없이 쏟아내는 그의 넋두리는 진지함 가운데에서도 폭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다가 노인은 먹은 게 아무것도 없는 그 커다란 물고기가 불쌍해졌다. 그렇지만 이런 연민에도 물고기를 죽이겠다는 결심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놈을 잡으면 몇 사람이나 먹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사람들이 놈을 먹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없지. 물론 없고말고. 놈의 행동거지와 대단한 위엄을 생각할 때 놈을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런 일들은 난 잘 모르겠어. 노인은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가 태양이나 달이나 별을 죽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야. 바다에서 살아가며 우리의 진정한 형제를 죽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이야.
이 자유분방한 연상의 경로와 그 규모를 보라. 기필코 물고기를 죽이겠다는 사람이 그 물고기의 배고픔에 연민을 느낀다. 다음 순간 애써 잡은 물고기가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원통하다. 노인은 그들이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 버린다. 그래야 속이 시원할 테니까 말이다. 그 다음에는 엉뚱하게도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한탄한다. 다만 최소한의 희생에 그친다는 데에서 안도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물고기 외에도 태양, 달, 별들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 덕에 인간을 위해서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물고기는 진정한 형제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이 생각의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노인에게 과연 저 물고기가 결정적인 한 방이었을까, 되묻게 된다. 사실 저 물고기를 무사히 항구로 운반해 올 수 있었다고 한들, 그의 삶의 방향이 크게 달라졌을까? 노인의 사고 구조를 볼 때, 노인은 이미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세계에 도달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혹자는 밧줄에 쓸려서 피가 흘러내리는 노인의 양 손바닥에서 신적인 기운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결정적인 한 방이 지나가면서 남긴 상처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모르긴 해도 그 상처가 결정적인 한 방이었을 독자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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