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객체지향론적 상상력과 컴퓨터게임의 가능성에 대하여 2 / 오영진

Alex Wawro는 컴퓨터 게임 <프레이>(2017)를 분석하면서, 이머시브 심(Immersive sims) 장르가 특히 게임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준다고 말한다. (How Prey succeeds in giving players space to tell their own stories 06/06/17, [www.gamasutra.com](http://www.gamasutra.com/))



“플레이어는 다섯 시간 동안 수목원에서 하드웨어 연구실에 이르는 정거장 내부를 돌아다닐 수도 있고, 기밀 출입구를 통해 우주 공간으로 나가서 몇 분 만에 같은 경로를 되짚어 볼 수도 있다. 도중에 있는 우주선 창문 주변에 떠 있다 보면 두 시간 전에 벌인 광적인 싸움의 여파를 볼 수도 있고, 싸움을 피하려고 돌아다닌 유지보수 통로의 열린 해치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는 플레이어가 어딘가에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환상을 강화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이 탈로스 원을 실존하는 장소처럼 여기게 하여 모든 공간을 탐험하고 배우며 완벽히 파악할 수 있는 전체적인 환경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컴퓨터게임 중 이머시브 심 장르는 공간적으로 분할되어 있지 않고(과거의 게임들처럼 로딩 사이에 근본적으로 고립된 스테이지들이 아니고), 그 안의 모든 물리적 법칙이 모든 공간에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 있다. 만약 스테이지 1에 해당하는 구역에 있다하더라도 이론상 스테이지 10으로 곧바로 도달 가능한 게임 디자인을 보여준다. 이는 로딩과 로딩 사이에 게임 공간이 갇혀 있는 과거의 게임경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이감을 준다. 분명히 저곳에 명령받은 사물이 있다. 동시에 그 게임적 공간이 나의 플레이 상황과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사실. 이것이 영화와 소설적 재현과 게임적 재현의 궁극적으로 다른 점이다. 코딩된 객체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유아론적인 1인칭 시점의 시야를 넘어서게 만든다. 그래서 이머시브 심 장르의 플레이어들은 통상의 꼼수로 보이는 온갖 침투를 연구하는 것이 곧 플레이가 된다. 시나리오 디자이너가 절차적으로 체험하게 만들어 놓은 선형적 스토리를 게임공간이 열어준 자유를 통해 부수는 것이 이 장르의 매력이다. 이러한 분석이 이머시브 심 장르가 이미 완전히 실존하는 게임적 공간을 구현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공간을 지향하고 있을 뿐, 이 장르의 게임도 결국은 갈 수 없는 곳,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게임이 과거의 어떤 게임보다도 살아있는 객체들과 결부된 의미 있는 공간을 구현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최근 발매된 <라스트오브어스 2>(2020)는 게임의 시나리오 공학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엄청난 반감 때문에 논란에 휩싸이긴 했지만, 게임 속 객체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로프에 대한 물리적 반응이다. 통상의 게임에서는 로프를 묶는 척 하고, 그것이 풀리는 과정도 축약해서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로프는 분명한 물리적 부피와 질감, 탄성을 가지고 공간 안에서 각각의 객체들과 반응한다. 때로는 모서리에 걸리기도 하고, 그 길이가 엄격히 제한되며, 풀고 묶는 과정은 정확히 실제와 같다. 여기서 게임 속 캐릭터 '앨리'는 줄을 엉키지 않게 잘 풀고 묶는 캐릭터로 연출되는 방식으로 약간의 꼼수를 부리기는 한다.(절대 줄 풀고 묶기를 실수하지 않는 '앨리') 덕분에 이 공간퍼즐은 순수한 기하학적인 공간퍼즐이 아니라 객체와 객체들이 엉켜있는 실제공간 속 퍼즐이 된다. 그 결과로 창문, 계단, 철제문 등이 모두 의미를 갖으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다시 말해 게임 속 공간과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객체들 모두 단순 배경이 아니라 정말 놓여 있는 사물이 되는 것이다.


아직 CRPG(Computer Role Playing Game)는 문학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특정한 거대 이야기 속의 주인공 행세를 플레이어에게 강요하는데 머물고 있다. 실은 객체지향적 철학이 롤플레잉에 적용된다면, 주인공은 NPC(non-player character)가 되어도 무관해야 하며 더 이상의 특정 롤플레이에 대한 강요는 없어야 한다. 언뜻 죽은 듯 보이는 NPC들. N은 객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의 표식이다. 플레이가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 캐릭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캐릭터가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야 하지 않을까. 여하튼 기존 CRPG의 딜레마는 미리 제공된 시나리오 속에서 특정 성격과 배경이 확정된 캐릭터를 고르는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다는 점이다.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일은 위선적으로 굴거나 위악적으로 구는 일, 혹은 특정한 전술적 행동을 위해 아이템과 능력치를 조합하는 일이고, 그 자체로도 즐겁긴 하지만 하나의 가상 세계에 새로운 인격을 빌드한다는 감각까지 주지는 못한다.



이 점에서 <디스코 엘리시움>(2019)은 진일보한 CRPG이다. 이 게임의 독특한 점은 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에 무의식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아나키, 폭력, 관용, 두려움, 미련, 냉소, 순응 등의 무의식 요소들이 특정 행동의 성공 여부와 판단의 근거를 만든다. 플레이어의 선택이 어떤 결정에 대한 의구심이라면 주사위를 굴려 내면의 호기심이 발휘가능해야 비로소 탐구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는 그동안의 CRPG가 대화가 그저 옳은 답을 위해 계속 대화 분기를 빼내기만 하는 경우와 비교하면 획기적인 롤플레이 방식이다. <발더스 게이트>나 <폴아웃>은 훌륭한 고전 CRPG지만 기껏 부여된 운명 서사나 선악의 분기점에서 괴로워할 뿐이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운명론도 선악의 이분법 속에서도 살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언제나 자기 안의 수많은 나들에 의해 괴로워한다.


“난 널 사랑해, 아니야. 난 널 질투해, 아니야 난 널 증오해, 하지만 널 좋아해. 아니...”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던 중 내가 결정한 냉소적 행동이 너무 많아 더 이상 플레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상황에 냉소적인 인간이 되었으므로 현실적으로 폐인이 되는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이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게임오버를 선사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특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에 대해 그 힘을 이루는 무의식을 객체화시켜 알고리듬 속에 집어넣은 것이 이 게임의 매력이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등의 캐릭터가 소녀 라일리 앤더슨 안에서 요동치는 것처럼 플레이어는 선택 이전에 캐릭터 내부의 무의식들과 일종의 전술적 협상을 해야 한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 밖의 사물들이 아니라 내부의 무의식 요소를 객체화한 첫 번째 게임으로 기억될 것이다. 여기서 객체화했다는 표현은 작동 가능하고, 세계에 관여하며, 그래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변수로서 존재한다는 뜻이다. 역시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2>(2018)의 한 NPC의 하루는 우리에게 이 세계가 정말로 구현되고 있고, 그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지금까지 설명한 컴퓨터게임의 객체지향존재론적 구현은 실은 문학에서 이미 구현되었고 동시에 도달하려 했던 세계다. 문예이론가 바흐친이 논했던 다성성의 세계가 바로 이런 것이다. 작가 맘대로 조종되는 캐릭터들이 아닌 스스로 살아가는 캐릭터들. 그들이 엉켜 만들어내는 다성성(多聲性, polyphony)의 세계의 펼쳐냄. 그런데 인간 소설가는 소설을 쓰며 간혹 실수하기도 한다. 상처 입어 장기요양이 필요한 인물이 버젓이 다음 화에서 돌아다니고, 특정 성격이었던 캐릭터는 일관성을 잃고 갈팡질팡하기도 한다. 심지어 죽었는데 살아 돌아오는 경우도 생긴다. 어찌 되었거나 인간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데이터 세트를 유지하는 데 한계가 와 온 오류다. 반면, 바흐친의 다성성의 세계 속의 인물들은 그 자신의 관성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내면은 쉽게 작가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컴퓨터 게임 속에서 코딩적 산물로서 오히려 이 일관성은 더욱 유지할 수 있다. 점점 더 실제 같은 게임 화면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게임의 출현으로 인해 추상 언어인 프로그래밍은 하나의 생명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 반대로 기존의 서사 언어야말로 프로그래밍 언어로서 객체들과 객체들의 관계성 안에서 구현되어야 함을 바흐친은 그 자신의 언어, 다성성의 개념 안에서 펼친 것처럼 보인다. 코딩언어는 생명을 부여하는 사랑의 언어. 그 시작의 명령이다. 이 점에서 객체지향 프로그래밍 언어는 객체지향 존재론의 방향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객체지향적 언어와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학이 오래도록 해온 대상사물과 나와의 관계가 실은 이러한 게임적 공간에서 오히려 제대로 풀리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필자는 이 점에서 다소 충격적인 제의를 하고자 한다. 실은 이제 본격적으로 캐릭터가 살아 숨쉬고, 세계 내 사물이 살아있는 최첨단의 컴퓨터게임이야말로 지금 시대의 문학처럼 보인다고. 문학은 종이 위에 쓰여지기만 하지 않는다고.


*이 글은 2020년 컴퓨팅적 사고와 서사-문학성을 연결하는 방법을 주제로 한 실험적인 전시회, 서울익스프레스의 <Code for Love>에 필자가 참여하면서 쓴 짧은 글을 더 길게 발전시킨 글이다.


오영진(문화평론가, 메타버스 <끝나지 않는 항해> 연출자)

조회수 783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댓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