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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없는 개화파 찾기 / 한보람

작성자 사진: 한국연구원한국연구원

개화를 주제로 한 강의를 촬영한 적이 있다. 강의 녹화는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고 관객은 피디와 촬영기사 둘이었다. 관객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그들은 동영상 강의 제작의 전문가였을 뿐 역사 분야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랬기에 내가 하는 강의의 내용이 스튜디오 안에 있던 누군가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분량의 녹화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묵묵히 자기 앞의 카메라에 전념하고 있던 촬영기사분이 옆으로 오더니 질문을 했다. “정말로 갑신정변 때는 개화라는 용어가 없었나요?” 막 ‘개화’란 용어가 갑오개혁기 이후 분출되었다는 최신 학설을 소개했던 참이었다. 개화라는 단어가 역사 분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익숙한, 그리고 관심을 끄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날이었다.


     

‘개화’라는 찬란한 이름


국내 최대 검색엔진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개화’를 검색하면 ‘외국의 더 발전된 문화나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개화파’의 검색 결과는 ‘부강한 여러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여 그들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우리도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이다. ‘개화’와 ‘개화파’에 대한 아주 익숙한 설명들이다.

‘개화’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서구의 선진 문물’과 ‘부국강병’이라는 키워드와 연결되어 우리의 인식 속에 존재했다. 근대 제국주의 광풍 앞에서 힘없이 나라를 빼앗겼던 역사의 충격은 ‘개화’라는 용어에 반짝이는 빛을 부여했다. 그때 조선이 빠르게 서양 문명을 받아들였더라면, 그때 대한제국이 일본처럼 서구식 근대화에 재빠르게 성공했더라면, 일본의 식민지배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을 겪지 않았을 거라는 자조 섞인 바람. 그렇게 우리의 근대는 ‘실패한 근대’가 되었고, 그 속에서 ‘개화’는 우리 역사의 찬란한 이름이 되었다.

    


대한제국기 서울 전차의 모습
대한제국기 서울 전차의 모습

개화에 대한 낯선 생각


그런데 과연, 우리가 알던 개화가 존재했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19세기 역사상을 돌아보면 전반부는 세도정치의 암흑기, 후반부는 수구와 개화의 대립기로 설정되어 있다. 이 단순한 틀에 갇힌 한국 근대는 시작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 그림자를 조금이라도 거둬내기 위해 수구가 아닌 개화에 부합되고자 했던 움직임을 찾아내야 했다. 어느새 서구식 근대는 우리가 맞혀야 할 정답이 되어 있었다. 고종, 대원군, 박규수, 김옥균 등, 그리 많지 않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 근대사의 서사는 누가 그 역사의 정답에 다가갔는가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그때 조선은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고 헤매다가 국망의 비극을 맞았지만, 그래도, 그중에서도 정답을 향해 가려 했던 사람들이 존재했음은 조금의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설정해둔 정답을 맞히기 위해 애쓰고 있었을까?


     

박규수는 개화의 아버지인가?


그 정답을 정확히 간파했다고 손꼽히는 인물로 박규수가 있다. 시대의 선각자, 개화사상의 비조. 박규수에게 붙는 찬사들이다. 그의 사랑방에서 개화파가 성장했다는 신화는 이미 깨졌지만 아직도 여전히 박규수는 개화파의 아버지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가 개화파의 아버지였다면 마땅히 낡은 조선의 전통 체제와 구조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서구식 근대로 나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료에서 마주치는 그의 목소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박규수
박규수

 

“조선의 환곡은 그 법이 본래 아름다워 그 효과가 매우 컸으니, 어찌 전대의 피폐한 정치와 잘못된 계책에 비교하여 논할 수 있겠습니까.”

박규수가 1862년 대대적인 농민항쟁(진주민란)의 현장에 안핵사로 파견되었을 때 밝힌 의견이다. 그는 스스로 환곡 제도의 폐단이 가장 심하다고 진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전통 체제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환곡은 ‘옛날의 선량하고 아름다운 법규로써 백성과 나라가 힘입던 것’으로, 삼정 체제에 운영상 잘못이 더해져 폐단이 극대화되었을지라도 그 제도 자체는 훌륭한 것이었다. 따라서 개혁이 필요하다 해도 전적으로 제도를 갈아엎는 것이 아닌 운영상 폐단을 제거하면 되는 것이었다. 당대 조선사회가 이룩해 놓은 전통 체제에 대한 깊은 신뢰, 유능하고 보수적인 조선 관료 박규수는 그 확고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국가 현안의 해결을 모색했다.


     

개화파? 박규수가 만들고 싶었던 조선


1807년에 태어나 세도정치기의 혼란을 거쳐 진주민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까지. 근대 격변기 조선 개혁의 최전선에 서있었던 인물 박규수가 만들고 싶었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집권층의 책임의식인 ‘사(士)’ 의식을 강조했고, 집권층의 존재 가치로 민생 안정의 목표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백성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신뢰하는 바탕 위에서, 직면한 눈앞의 문제를 온건하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다. 그에게 있어 조선은 버려야 할 낡은 무언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문제가 생길지라도 얼마든지 고쳐나갈 수 있는 거대한 유산이었다. 그때 그 ‘개화파’들은 서양이 아닌 조선이 이룩한 문명의 길 위에서 그렇게 우리만의 근대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쓴 대한제국 남자들 Cornell University Library, Willard Dickerman Straight Papers (#1260)
선글라스를 쓴 대한제국 남자들 Cornell University Library, Willard Dickerman Straight Papers (#1260)


한보람(대전대학교 강사)
한보람(대전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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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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