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이순신과 그의 함대가 거둔 놀라운 승리로 기억된다. 교과서에 실리고, 소설로, 드라마로, 영화로 제작되어 그 승전서사는 국민의 교양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다음 자료는 어떤가.
호남 지방 사정을 말하자면, 주사(舟師)가 소속된 지방의 수군(水軍)은 깡그리 흩어져 없어진 상태이고, 수령이 전지(田地)의 면적에 따라 인부를 차출해 식량을 스스로 마련하게 한 뒤 격군(格軍)에 채워 넣습니다. 격군은 한 번 배에 오르면 교대할 기약도 없고, 살아갈 물자도 없어 굶어죽도록 방치해 두었다가 죽으면 시신을 바다에 던져, 한산도에는 백골이 쌓여 보기에도 참혹합니다(<선조실록> 27년(1594) 10월 3일).
1595년 3월 2일. 갑오년(1594)․ 계사년(1595) 이래 수병(水兵)들이 고생이 심했다. 또 바닷가 곳곳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한산도를 지키는 군졸이 열에 여덟, 아홉은 죽었다. 이 때문에 배를 타고 간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남아 있는 자들은 도망하고 흩어져, 허다한 군선(軍船)들이 다 비게 되었다.
이순신이 이것을 걱정하여 수군(水軍)에 딸린 각 고을에 명령하여 촌백성을 찾아내어 수군에 채워 넣게 하고, 군관(軍官)과 여러 장수를 바닷가 시장에 나누어 보내어 장사꾼을 덮쳐 잡아 배에 실어 수군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길가의 시장이 다 없어졌고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사람들은 풀숲이나 구덩이 속에서 숨어 있다가 틈을 보아 밭을 갈고 곡식을 거두었다(趙慶男, <亂中雜錄> 권3).
넓은 남해 바다에서 함대를 움직이고 왜선(倭船)을 충파(衝破)한 것은 판옥선 갑판 아래 ‘격군’이었다. 강제로 끌려온 격군은 갑판 아래 갇혀 노를 저었다. 지치고 굶주리다 죽으면 바다에 던졌다. 주검은 백골이 되어 쌓였다.
역사는 갑판 아래 있었던 수많은 격군을 각별히 기억하지 않는다. 오직 이순신과 주변의 별들만 찬란히 빛날 뿐이다. 만약 수군의 승리서사를 벗어나 판옥선의 갑판 아래를 들여다보면, 전쟁의 리얼리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구성될 것이다.
2.
전생이 시작되고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1592년(선조 25) 5월 10일 홍문관 부제학 홍인상(洪麟祥) 등은 선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바다 건너 작은 오랑캐가 변경을 범하자 고을들은 바람에 쓸리듯 하였고, 그놈들의 향도(嚮導)가 되었으며, 서울 백성들 중에는 적을 막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적들이 재를 넘기 전에 이미 투항할 뜻이 있었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길거리에 떠돌았습니다. 급기야 종묘사직이 폐허로 변하고, 도성과 대궐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왜군의 침입에 저항이 거의 없었고 도리어 길잡이가 되는 자들까지 나타났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중 지배계급에 대한 반감과 민심의 이반은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1597년 11월 12일 전라 우수사 이시언(李時言)은, 해남, 강진, 장흥, 보성, 무안 등의 고을은 인민이 거의 다 왜적에게 붙어 사족(士族)의 피난처를 일일이 가르쳐 주었고, 이에 사족들이 거의 살육되었다고 왕에게 보고했다.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하자 영변 지방 사람들은 숙천부(肅川府)의 관아 기둥에 ‘대가(大駕)가 강계로 가지 않고 의주로 갔다’고 왕(선조)의 행선지를 써 놓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5년(1592) 6월 28일). 근대 내셔널리즘의 입장에서는 침략 전쟁에서 외적에게 동조하는 민중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의 실상이었다.
민중의 지배계급에 대한 반발 중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토적(土賊)’으로 불린 군도(群盜) 집단이다. 사족들은 “백성들이 모두 나라를 망각하고 적을 영입했고, 토적은 날뛰면서 왜군을 도와 잔학한 짓을 하였다.”(<선조실록> 29년(1596) 2월 22일)고 증언했다. 실제 토적이 왜군을 인도하여 산을 수색한다는 말을 듣고 통천군수 정구(鄭逑)가 자살을 하는 일까지 있었다. 1592년 4월 14일 전쟁의 발발로부터 불과 2달 남짓이 지난 뒤 김수(金睟)의 보고에 의하면, 왜군의 침입 이후 초계 군수 이유검(李惟儉)과 의령 현감 오응창(吳應昌) 등이 패군장(敗軍將)으로서 효시된 후 토적이 빈틈을 타서 관곡을 훔쳐내었다고 하였다. 이 토적이란 평소 활동하던 군도일 것이다. 이후 토적의 활동에 대한 기사가 실록에 쏟아진다. 1593년(선조 26) 4월 21일 안집사(安集使) 김늑(金玏)은 경상도에서 ‘토적’이 날뛰어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대낮에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등 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고 보고했고, 같은 해 8월 9일 우부승지 구성(具宬)은 순천, 광양, 곡성을 분탕(焚蕩)한 무리들은 왜적이 아닌 ‘토적’이라고 보고했다.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를 근거로 하건대, 토적의 발생 사례가 가장 많았던 해는 1594년이었다. 이 중 가장 강력했던 집단은 남원의 김희(金希)ㆍ이복(李福)ㆍ강대수(姜大水), 경상우도의 고파(高波) 등이었다. 이들의 활동지는 지리산으로부터 남원 회문산(回文山), 장성(長城) 노령(蘆嶺) 등 수십 개 군의 산골이었다. 김희 등은 1594년 12월 5일 남원 판관 김유, 운봉 현감 남간(南侃)이 거느린 수백 명의 군사와 독포장(督捕將) 정기룡(鄭起龍)의 군사 3백 명의 연합 공격을 여유 있게 방어하는 등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관군은 계속 이들을 압박했다. 이들 중 고파는 1595년 1월 장성에서, 김희․강대수는 같은 해 6월 영남에서 패배해 죽었다. 조경남은 이로 인해 산군(山郡)의 길이 다시 열려 사람과 물자가 통하게 되었다고 했으니(趙慶男, <亂中雜錄> 3), 1594․1595년은 전라도 일대가 이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기도에서는, 현몽(玄夢)이 광주(廣州)․이천의 산골짜기를, 이능수(李能水)가 양주의 산골짜기를 근거로 삼아 활동했다. 현몽의 부대는 백정, 산척, 재인 등 천민으로 구성된 집단으로 짐작된다. 조정은 1593년 10월 경 승병을 거느린 방어사(防禦使) 변응성(邊應星)으로 하여금 이능수와 현몽 부대를 압박하고,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어 내부 분열을 유도했다. 부대는 와해되었고, 이능수는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하지만 가장 사나웠다고 하는 현몽은 달아나 끝내 잡히지 않았다.
전쟁 중 반란도 이어졌다. 국경인(鞠景仁)과 이몽학(李夢鶴)의 난은 충분히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는 송유진(宋儒眞)의 난을 들어본다. 송유진은 원래 의병(義兵) 출신으로 공을 가장 많이 세운 사람이었다(李恒福의 기록). 그가 “사람은 죽이지 않고 오직 군량과 무기만 모은다”라고 했던 바, 2천 명의 군사를 모았던 것은 본디 의병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충청도 천안과 직산(稷山) 일대에서 군도로 활동했다. 그가 모은 군사는 지리산, 속리산, 광덕산, 청계산 등지에 웅거하고 있던 토적들로 짐작된다(선조수정실록 27년(1594) 1월 1일). 1594년 1월 서울의 수비가 허술한 것을 알고는 진군하여 국가를 전복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행동에 나섰지만, 직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된다. 전쟁 중 있었던 토적의 활동과 반란은 민중이 지배체제에 대해 품고 있었던 격심한 반감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3.
왜군은 전쟁 중 조선인을 대거 납치해 갔는데, 전쟁이 끝나고 외교가 복구되자, 조선은 그들을 쇄환하기 시작하였다. 1604년 유정(惟政)이 3천여 명을, 1607년 여우길(呂祐吉)․경섬(慶暹)이 1340명을 데리고 왔다. 그 뒤 1617년과 1624년에도 다시 조선 사람을 데리고 오기 위해 사신단을 보냈지만, 데리고 온 사람은 1백 명 남짓이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피로인(被擄人)들이 일본화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이건 조선과 일본 모두 인정하는 바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은 간양록(看羊錄)에서 미묘한 말을 남기고 있다. 당시 이예주(伊豫州) 대진현(大津縣)에 조선 사람 남녀 1천여 명 중 먼저 잡혀온 사람들 중 절반은 귀국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 불과 5년이 지난 뒤인데도 귀국을 거부했던 것이다. 귀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조선 사족체제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전쟁 종식 이후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면 소문을 듣고 미리 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귀국을 약속하고도 정작 배를 탈 때 나타나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귀국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강홍중(姜弘重)이 쓴 동사록(東槎錄)(1624)에 의하면, 이문장(李文長)이란 사람은 조선의 법이 일본의 법만 못하고 살기가 어려우니 돌아가는 것이 이로울 것이 없다면, 사람들을 설득해 돌아가려는 마음을 끊어버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이문장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성립(李成立)ㆍ김춘복(金春福) 두 사람은 조선 사신이 머무르는 숙소를 찾아와 강홍중에게 “일본에 잡혀온 사람들이 자의로 온 것이 아닌데, 조선으로 데려가면 대우를 아주 박하게 한다고 들었다”고 항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이 강홍중의 입으로도 증명이 된다. 곧 강홍중은 선조(宣祖)에게 귀국 보고를 하면서 자신이 ‘감언이설’로 달래어 데리고 온 사람이 막상 부산에 도착한 뒤 어떻게 살 방도가 없다면서 자신을 따라오며 하소연했지만, 겨우 5일분 양식을 주고 보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1636년 일본에 파견된 황호(黃㦿)는 구걸로 연명하고 있던 해남(海南) 출신의 피로인은 귀국 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분노하였다. “돌아가면 군졸이 아니면 노비가 될 것이니, 이 땅에서 차라리 편하게 지내는 것이 낫다”며 귀국을 단호히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황호는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고 흥분했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노비는 말할 것도 없고, 군졸이 된다는 것 역시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 말 조선사회에서는 ‘상것’으로 착취의 한 복판에 놓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삶의 수단과 보람이 있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사실상 조선사회의 기본모순의 통처(痛處)를 찔렀던 것이다. 황호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흥분했던 것은, 군졸 아니면 노비라는 말에 조선사회의 치부가 여과 없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
1592년은 조선은 건국 2백년이 되는 해였다. 왕조는 온갖 모순을 노정하고 있었고, 이미 붕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양인 내부에서 사족이 분리, 형성되면서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만들어졌고 그 구조 위에서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층의 수탈이 강화되고 있었다. 민(民)의 저항적 에너지는 홍길동과 임꺽정 등 군도(群盜)의 형태로 집약되었다. 그 저항이 본격화할 무렵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왜군의 총칼에 가장 큰 희생을 당한 것은 민(民)이었다. 또한 민은 전쟁에 동원되었고 한편으로는 체제에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중의 저항적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민중이 처했던 상황을 선조실록의 사관은 전쟁 발발 이후 ‘국가는 백성을 초개(草芥)처럼 보았고, 표범이나 승냥이처럼 포악하게 굴었으며, 교활한 아전은 더욱 탐오(貪汚)하고 잔혹하게 굴었다’(<선조실록> 31년(1598) 8월 12일)는 말로 압축했다.
사족체제는 임진왜란(여기에 병자호란을 더하여)을 거치며 민의 저항적 에너지가 사라진 것을 계기로 강화될 수 있었다. 임병양란 이후 유교국가로의 본격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사족-남성을 위한 사회를 강고하게 유지하는 여러 장치들이 보다 철저하게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는 임병양란 이후 해체된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강화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판옥선 갑판 아래에 있던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임진왜란을 읽고, 그 전후의 역사를 다시 구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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